[취재후] 구청이 새집 짓겠다고 300년 역사 파괴?…사라지는 동래읍성

입력 2020.10.14 (06:09) 수정 2020.10.14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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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터 + 성벽(2단) 전경

집터 + 성벽(2단) 전경

■ 300년 역사 깃든 '동래구청 신청사 부지 발굴 현장'

300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동래읍성과 읍성 일대의 생활유적이 지난 8일 처음으로 세상 밖에 드러났습니다. 1731년(조선 영조 7년)부터 일제강점기 시대를 거치며 생성된 유적이 겹겹이 쌓여 4개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시대에 쌓인 문화층에는 건물터, 우물, 배수로와 같은 유구(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와 조선 후기 백자, 기와, 동전과 같은 유물이 발굴됐습니다.

이곳 일대는 부산 동래구청의 신청사 예정지입니다. 예정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물길을 파내어 왜적의 침입을 막는 군사시설, 즉 '해자'도 발견됐습니다. 지난 2006년 동래읍성 유구를 일부 확인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생활유적과 군사시설, 동래읍성 성벽 모두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미 주택과 도로 등으로 뒤덮인 부산 도심에서 유물을 찾는 건 쉽지 않습니다. 일단 유적지 위에 있는 건물을 철거하고 건물 소유주에게 일일이 보상해줘야 하는데 발굴과 보존 비용이 막대합니다. 이번 동래구청 신청사 건립을 위해 시작된 발굴 조사가 더욱 중요한 이유입니다. 발굴 목적은 신청사 건립을 위한 적절성 여부 확인이었지만, 일반 사유지 아래에서 발굴된 유적지보다 보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발굴 현장에 사람들 서 있는 모습발굴 현장에 사람들 서 있는 모습

■ 거짓말에 현장 공개까지 미뤄온 동래구청

취재진은 동래구청 신청사 터 아래에서 유적이 발굴됐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7월부터 현장 공개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동래구청은 거절했고 사진 자료도 없다고 했습니다. 뭔가 이상했습니다.

또 '발굴조사법'을 보면 시굴과 발굴에 걸쳐 진행되는 '문화재 학술 자문회의'와 문화재청 주관의 '전문가 검토 회의'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의무사항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발굴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외부 전문가가 함께 논의해서 이 유물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외부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동래구청은 회의를 진행하고서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했습니다. 동래구청이 유적지를 발굴해 회의한 내용을 문화재청에 보고서로 제출했음에도 취재진에게 관련 문서조차 없다고 숨긴 겁니다.

한편 문화재청은 1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동래구청에 발굴 현장을 대국민 공개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전문가뿐만 아니라 시민단체와 언론, 일반 시민들도 발굴이 이뤄지는 과정을 들여다보고 혹 발굴조사단이 간과한 부분이 없는지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과정이 발굴현장 일반 공개입니다. 지역 사학계나 유적에 관심 있는 학자들이 현장을 확인하고 보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는 통상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나 동래구청은 문화재청의 권고 사항도 무시하다 KBS 보도 이후 최근에서야 현장을 공개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역 사회에선 공개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발굴조사 1년 만에 열린 대국민 현장공개, 역사적 가치가 높지만, 현장이 텅 비어 있었던 이유입니다.

동래구 ‘신청사 건축부지 내 발굴’ 전경동래구 ‘신청사 건축부지 내 발굴’ 전경

■ 유적 고스란히 있는데, 지하 4층까지 파겠다는 동래구

취재진이 전문가와 함께 발굴현장에 가보니 왜 동래구청이 거짓말에 버티기로 일관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비공개로 발굴 조사가 진행되는 사이, 4개 층인 유적지는 절반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일제강점기 층과 조선 후기에 쌓인 생활 문화층을 이제는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유적을 왜 훼손했느냐는 지적에 대해 동래구청 관계자는 "유적이 계속 나와 아래층을 발굴하기 위해선 위층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습니다. 조선 전기 유물을 꺼내기 위해서 조선 후기 유물을 부수고 땅을 파도 된다는 말일까요?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부산의 사학자들은 이 땅 자체가 팔수록 유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에 보존을 전제로 논의가 진행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화재청 주관의 전문가 검토회의에 단 2명의 전문가가 참석해 보존 혹은 발굴조사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 또한 문제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국보, 보물 아니면 막무가내로 파헤쳐도 되는가? 동래읍성이 주는 교훈

동래구청은 유적이 대량으로 발견되고 있는 이 자리에 계획대로 지하 4층, 지상 9층 규모의 신청사를 짓겠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땅을 깊게 파야 하는 탓에 남은 조선 시대 전기의 생활유적과 동래읍성 성체(성벽) 훼손까지 불가피합니다.

'부산의 역사는 동래를 빼면 없다.' 부산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공식처럼 존재하는 말입니다. 경상도의 중심지였던 동래가 파괴되면 부산에 남은 옛 흔적은 앞으로 볼 수 없다는 절박함이 배어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살았던 흔적이라는 이유로 파헤쳐도 될까요? 우리가 왕족과 귀족의 생활상만 보며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유적 보존보다는 신청사 건립에만 온통 신경을 쏟고 있는 동래구청은 '발굴 현장 숨기기' 등에 대한 해명과 사과 대신 KBS와 인터뷰한 학계 전문가는 누구인지만 따져 물었습니다. 아직도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동래구청의 슬로건이 '얼쑤 동래'입니다. 외래어가 대부분인 전국 지자체 슬로건 중에서 신명나고 역사를 자랑스럽게 계승하는 의미가 담겨 주목을 많이 받았지요. 동래구청이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한번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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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14 06:09:50
    • 수정2020-10-14 06:16:11
    취재후·사건후

집터 + 성벽(2단) 전경

■ 300년 역사 깃든 '동래구청 신청사 부지 발굴 현장'

300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동래읍성과 읍성 일대의 생활유적이 지난 8일 처음으로 세상 밖에 드러났습니다. 1731년(조선 영조 7년)부터 일제강점기 시대를 거치며 생성된 유적이 겹겹이 쌓여 4개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시대에 쌓인 문화층에는 건물터, 우물, 배수로와 같은 유구(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와 조선 후기 백자, 기와, 동전과 같은 유물이 발굴됐습니다.

이곳 일대는 부산 동래구청의 신청사 예정지입니다. 예정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물길을 파내어 왜적의 침입을 막는 군사시설, 즉 '해자'도 발견됐습니다. 지난 2006년 동래읍성 유구를 일부 확인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생활유적과 군사시설, 동래읍성 성벽 모두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미 주택과 도로 등으로 뒤덮인 부산 도심에서 유물을 찾는 건 쉽지 않습니다. 일단 유적지 위에 있는 건물을 철거하고 건물 소유주에게 일일이 보상해줘야 하는데 발굴과 보존 비용이 막대합니다. 이번 동래구청 신청사 건립을 위해 시작된 발굴 조사가 더욱 중요한 이유입니다. 발굴 목적은 신청사 건립을 위한 적절성 여부 확인이었지만, 일반 사유지 아래에서 발굴된 유적지보다 보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발굴 현장에 사람들 서 있는 모습
■ 거짓말에 현장 공개까지 미뤄온 동래구청

취재진은 동래구청 신청사 터 아래에서 유적이 발굴됐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7월부터 현장 공개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동래구청은 거절했고 사진 자료도 없다고 했습니다. 뭔가 이상했습니다.

또 '발굴조사법'을 보면 시굴과 발굴에 걸쳐 진행되는 '문화재 학술 자문회의'와 문화재청 주관의 '전문가 검토 회의'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의무사항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발굴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외부 전문가가 함께 논의해서 이 유물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외부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동래구청은 회의를 진행하고서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했습니다. 동래구청이 유적지를 발굴해 회의한 내용을 문화재청에 보고서로 제출했음에도 취재진에게 관련 문서조차 없다고 숨긴 겁니다.

한편 문화재청은 1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동래구청에 발굴 현장을 대국민 공개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전문가뿐만 아니라 시민단체와 언론, 일반 시민들도 발굴이 이뤄지는 과정을 들여다보고 혹 발굴조사단이 간과한 부분이 없는지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과정이 발굴현장 일반 공개입니다. 지역 사학계나 유적에 관심 있는 학자들이 현장을 확인하고 보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는 통상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나 동래구청은 문화재청의 권고 사항도 무시하다 KBS 보도 이후 최근에서야 현장을 공개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역 사회에선 공개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발굴조사 1년 만에 열린 대국민 현장공개, 역사적 가치가 높지만, 현장이 텅 비어 있었던 이유입니다.

동래구 ‘신청사 건축부지 내 발굴’ 전경
■ 유적 고스란히 있는데, 지하 4층까지 파겠다는 동래구

취재진이 전문가와 함께 발굴현장에 가보니 왜 동래구청이 거짓말에 버티기로 일관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비공개로 발굴 조사가 진행되는 사이, 4개 층인 유적지는 절반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일제강점기 층과 조선 후기에 쌓인 생활 문화층을 이제는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유적을 왜 훼손했느냐는 지적에 대해 동래구청 관계자는 "유적이 계속 나와 아래층을 발굴하기 위해선 위층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습니다. 조선 전기 유물을 꺼내기 위해서 조선 후기 유물을 부수고 땅을 파도 된다는 말일까요?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부산의 사학자들은 이 땅 자체가 팔수록 유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에 보존을 전제로 논의가 진행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화재청 주관의 전문가 검토회의에 단 2명의 전문가가 참석해 보존 혹은 발굴조사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 또한 문제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국보, 보물 아니면 막무가내로 파헤쳐도 되는가? 동래읍성이 주는 교훈

동래구청은 유적이 대량으로 발견되고 있는 이 자리에 계획대로 지하 4층, 지상 9층 규모의 신청사를 짓겠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땅을 깊게 파야 하는 탓에 남은 조선 시대 전기의 생활유적과 동래읍성 성체(성벽) 훼손까지 불가피합니다.

'부산의 역사는 동래를 빼면 없다.' 부산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공식처럼 존재하는 말입니다. 경상도의 중심지였던 동래가 파괴되면 부산에 남은 옛 흔적은 앞으로 볼 수 없다는 절박함이 배어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살았던 흔적이라는 이유로 파헤쳐도 될까요? 우리가 왕족과 귀족의 생활상만 보며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유적 보존보다는 신청사 건립에만 온통 신경을 쏟고 있는 동래구청은 '발굴 현장 숨기기' 등에 대한 해명과 사과 대신 KBS와 인터뷰한 학계 전문가는 누구인지만 따져 물었습니다. 아직도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동래구청의 슬로건이 '얼쑤 동래'입니다. 외래어가 대부분인 전국 지자체 슬로건 중에서 신명나고 역사를 자랑스럽게 계승하는 의미가 담겨 주목을 많이 받았지요. 동래구청이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한번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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