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인 노후의 시작 ‘연명의료중단 결정’ 어디까지 왔나?

입력 2020.10.18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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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어서 잘 죽는 게 소원이에요"

70대 이종태, 이상희 씨 부부는 지난달 말 우연히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웰다잉'을 알게 됐습니다. 낯선 단어였지만, 부부는 방송국과 '114'에 묻고 물어 시민단체 웰다잉시민운동을 찾았습니다.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문서를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서울 양천구에 사는 이종태, 이상희 씨 부부는 지난달 말 시민단체 ‘웰다잉시민운동’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서울 양천구에 사는 이종태, 이상희 씨 부부는 지난달 말 시민단체 ‘웰다잉시민운동’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중환자실에서 산소마스크를 끼고 시간을 보내는 어르신들을 보며 결심했다고 말했지만, 자녀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커 보였습니다. 아픈 부모를 두고 자식들이 의사에게 치료를 중단해 달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냐는 겁니다. 부부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두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다"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늙어서 잘 죽는 게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지 않으냐"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종태, 이상희 씨 부부처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19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는 의향서,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지난달까지 70만 8,808명이 등록했습니다.

연명의료 중단 의사를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연명의료계획서'인데요. 말기 또는 임종기에 있는 환자를 위해 의료진이 본인 또는 가족의 의사를 확인해 작성해 두는 문서입니다. 역시 지난달까지 5만 1,832건이 등록돼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 4명 중 1명 요양병원에서 사망…"마음대로 못 죽는다"

늘어나는 수치 속에 숨은 의미가 있습니다. 연명의료 의사를 밝힌 것에 비해 실제 이행률이 낮은 겁니다. 지난해 연명의료중단 결정 이행 건수는 4만 8천여 건. 이 중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의한 결정은 1,072건(2.2%)에 불과합니다. 지난해 전체 사망자 29만 8천여 명과 비교하면 0.3% 수준입니다. 여전히 연명의료 중단 10건 중 6건은 본인보다는 가족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고 있습니다.


이행률이 낮은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기반이 잘 안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사망자 4명 중 1명이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는데요. 정작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할 수 있는 '의료기관 윤리위원회'는 대부분 요양병원에 없습니다.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을 하려면 위원회가 있는 주변의 상급종합병원이나 종합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말기 암 환자 등에게 완화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호스피스 기관 정착도 아직입니다.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의 호스피스 참여율이 낮고, 이용 질환도 여전히 제한적입니다. 2017년부터 암을 제외한 3개 질환(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 후천성면역결핍증 등) 환자도 가정형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됐는데요. 2018년 기준 호스피스 이용자 1만 8,120명 중 암을 제외한 3개 질환자 이용자는 29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이용률이 낮습니다.


■ "적극적인 행정으로 생애 자기결정권 높여야"

제도는 있지만, 정착은 더딥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제도화에 힘쓴 윤영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정부와 의료계, 호스피스 기관 등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윤 교수는 "연명의료 결정 과정으로 사망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은 어떻게 죽음에 이르는지에 대한 현황 파악도 안 되고 있다"면서, "심폐소생술을 계속하는지, 혹은 방치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지 등에 대해 파악을 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본인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힐 수 있도록 해야 자기 결정권을 높일 수 있다고도 조언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건강검진을 병원에서 하는 만큼 그 과정에서 의향서 작성 여부 등을 물을 수 있고, 중증질환 진단을 받았을 때 관련 의사를 확인할 수 있다"며 "건강할 때 본인의 의사를 밝힐 기회를 제시해줘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연명의료 결정은 '웰다잉' 논의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유산 기부와 장기 등 신체 기부, 장례 문화 등 넓은 의미의 논의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윤 교수는 "현재는 너무나 갈 길이 멀고, 연명의료 결정 만이라도 자기 결정권이 존중되도록 하는 게 시급하다"며 "이 상태로 가면 20년쯤 뒤엔 '안락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강해질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가능 기관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https://www.lst.go.kr)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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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체적인 노후의 시작 ‘연명의료중단 결정’ 어디까지 왔나?
    • 입력 2020-10-18 08:08:00
    취재K
■ "늙어서 잘 죽는 게 소원이에요"

70대 이종태, 이상희 씨 부부는 지난달 말 우연히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웰다잉'을 알게 됐습니다. 낯선 단어였지만, 부부는 방송국과 '114'에 묻고 물어 시민단체 웰다잉시민운동을 찾았습니다.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문서를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서울 양천구에 사는 이종태, 이상희 씨 부부는 지난달 말 시민단체 ‘웰다잉시민운동’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중환자실에서 산소마스크를 끼고 시간을 보내는 어르신들을 보며 결심했다고 말했지만, 자녀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커 보였습니다. 아픈 부모를 두고 자식들이 의사에게 치료를 중단해 달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냐는 겁니다. 부부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두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다"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늙어서 잘 죽는 게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지 않으냐"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종태, 이상희 씨 부부처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19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는 의향서,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지난달까지 70만 8,808명이 등록했습니다.

연명의료 중단 의사를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연명의료계획서'인데요. 말기 또는 임종기에 있는 환자를 위해 의료진이 본인 또는 가족의 의사를 확인해 작성해 두는 문서입니다. 역시 지난달까지 5만 1,832건이 등록돼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 4명 중 1명 요양병원에서 사망…"마음대로 못 죽는다"

늘어나는 수치 속에 숨은 의미가 있습니다. 연명의료 의사를 밝힌 것에 비해 실제 이행률이 낮은 겁니다. 지난해 연명의료중단 결정 이행 건수는 4만 8천여 건. 이 중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의한 결정은 1,072건(2.2%)에 불과합니다. 지난해 전체 사망자 29만 8천여 명과 비교하면 0.3% 수준입니다. 여전히 연명의료 중단 10건 중 6건은 본인보다는 가족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고 있습니다.


이행률이 낮은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기반이 잘 안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사망자 4명 중 1명이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는데요. 정작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할 수 있는 '의료기관 윤리위원회'는 대부분 요양병원에 없습니다.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을 하려면 위원회가 있는 주변의 상급종합병원이나 종합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말기 암 환자 등에게 완화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호스피스 기관 정착도 아직입니다.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의 호스피스 참여율이 낮고, 이용 질환도 여전히 제한적입니다. 2017년부터 암을 제외한 3개 질환(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 후천성면역결핍증 등) 환자도 가정형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됐는데요. 2018년 기준 호스피스 이용자 1만 8,120명 중 암을 제외한 3개 질환자 이용자는 29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이용률이 낮습니다.


■ "적극적인 행정으로 생애 자기결정권 높여야"

제도는 있지만, 정착은 더딥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제도화에 힘쓴 윤영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정부와 의료계, 호스피스 기관 등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윤 교수는 "연명의료 결정 과정으로 사망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은 어떻게 죽음에 이르는지에 대한 현황 파악도 안 되고 있다"면서, "심폐소생술을 계속하는지, 혹은 방치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지 등에 대해 파악을 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본인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힐 수 있도록 해야 자기 결정권을 높일 수 있다고도 조언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건강검진을 병원에서 하는 만큼 그 과정에서 의향서 작성 여부 등을 물을 수 있고, 중증질환 진단을 받았을 때 관련 의사를 확인할 수 있다"며 "건강할 때 본인의 의사를 밝힐 기회를 제시해줘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연명의료 결정은 '웰다잉' 논의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유산 기부와 장기 등 신체 기부, 장례 문화 등 넓은 의미의 논의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윤 교수는 "현재는 너무나 갈 길이 멀고, 연명의료 결정 만이라도 자기 결정권이 존중되도록 하는 게 시급하다"며 "이 상태로 가면 20년쯤 뒤엔 '안락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강해질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가능 기관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https://www.lst.go.kr)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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