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피해자인데 국민참여재판 증인까지 해야 하나요”

입력 2020.10.1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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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만 19살의 나이에 배심원들 앞에 섰던 A 양은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버겁다고 말합니다. 성추행 피해자로서 국민참여재판의 증인에 참여한 뒤 A 양의 삶은 그전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았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곧 휴학했고 여러 차례 상담을 받았지만 먹던 약도 모두 거부한 채 결국 하루하루를 어머니와 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 성추행 피해자가 겪은 국민참여재판..."울다 얘기하기를 반복해"

A 양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2016년 엄마의 지인이자 집주인이었던 B 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자주 집을 드나들던 B 씨가 A 양의 엉덩이를 치는 등의 행동을 했던 겁니다. A 양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집안에서 일어났던 일이라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B 씨는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습니다. 결국, 1심 재판부였던 춘천지방법원은 피고 측이 요청한 국민참여재판을 받아들였습니다.

국민참여재판 녹취록 중 일부 발췌국민참여재판 녹취록 중 일부 발췌

B 씨의 변호인은 '(피고인이) 누군가의 아버지일 수 있다. 벌금형만 나와도 직장을 잃게 된다'며 변론을 펼쳤습니다. 술렁이는 법정의 공기는 A 양에게도 느껴졌습니다. 이후 A 양은 법정에서의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고 합니다. 쏟아지는 질문과 이어지는 불신의 눈초리, 참다못해 터져 나온 눈물까지 겹쳐 법정에 선 내내 머릿속이 새하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녹취록을 확인해보니 피고 측 변호인은 A 양이 '기억이 안 난다'고 답하면 '정말 안 나느냐'고 되묻거나 '그래도 기억이 나는 게 있을 거 아니냐'며 압박했습니다. A 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질문을 하거나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A 양은 "울다 얘기하길 반복하며 점점 감정이 격해졌던 것 같다"며 "표정을 봐야 한다는 이유로 아무런 가림막 없이 얘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너무나 당황스러웠다"고 회상했습니다.

■ 피해자가 원치 않는 국민참여재판 왜 열리나?

국민참여재판은 기본적으로 피고인의 권리입니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배제할 수 있다는 규정은 있지만,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재판부 판단에 달린 겁니다. 이 때문에 피해자가 원치 않아도 피고 측 주장을 배제할 이유가 없거나 재판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국민참여재판이 열리기도 합니다.

A 양도 국민참여재판을 원치 않는다는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또, 당시 A 양이 생일이 지나지 않은 만 19살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B 씨의 변호인조차 국민참여재판이 진행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국민참여재판을 수용했습니다.

B 씨가 국민참여재판을 요구하면서 제시한 근거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증거나 증언의 신뢰도가 낮다는 것, 그리고 가해자로 지목된 B 씨가 혐의를 완전히 부인하고 있다는 점 등이었습니다. 그중 특히 눈길을 끄는 건 A 양이 언론사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2차 피해 우려가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피고인 B 씨 측도 국민참여재판에 A 양이 등장하면 2차 가해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이 같은 주장을 펼친 겁니다. A 양은 "당시 인터뷰는 모자이크에 음성변조까지 약속받고 한 일"이라며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한 인터뷰가 이렇게 악용될 거라고 생각 못 했다"고 말합니다.

■ 성범죄 국민참여재판 무죄율 7배…"악용 우려"

성범죄의 경우 국민참여재판은 무죄율이 비교적 높습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KIC) 자료를 보면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열렸던 국민참여재판의 평균 무죄율은 10.9%인데 이 가운데 성범죄 사건의 경우 18.8%나 무죄가 나왔습니다.

[출처 : 한국형사정책연구원][출처 :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일반 재판보다 국민참여재판의 무죄율이 더 높은 건 어느 범죄나 비슷한 추세지만 특히 성범죄의 경우는 무죄율이 더 높습니다. 살인 등 주요 4대 범죄의 경우 일반 재판보다 국민참여재판에서의 무죄율이 5배 더 높지만, 성범죄 사건의 경우 국민참여재판의 무죄율이 일반 재판보다 7.5배나 더 높습니다.

이 때문에 국민참여재판이 피고인에게 악용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앞서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유도 국가대표 출신 '왕기춘 사건'에서도 왕 씨가 국민참여재판을 요구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연구소 '울림'의 김보화 책임연구원은 "성폭력 사건의 특성상 명백한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며 "국민참여재판에서는 배심원들의 감정에 호소할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성범죄에 대해 더 보수적인 판단이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배심원들이 왜곡된 성적인 통념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재판 과정에서 부적절한 질문들이 피해자들한테 주어지기도 해 2차 가해의 우려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1심에서 국민참여재판이 진행될 경우 항소심에서 이를 뒤집기도 어렵습니다. 2008년부터 10년간 국민참여재판이 항소심에서 파기되는 경우는 29%로 일반 재판(41%)보다 낮게 조사됐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의 경우 항소심에서 새로운 혐의가 추가되지 않는 이상 원심판결이 존중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김 연구원은 "(성범죄는) 기존 범죄들처럼 명확한 물증이나 증거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범죄의 영역인데 국민참여재판이 적절한지 의문"이라며 "성폭력 범죄 전체에 대해서 특히 피해자가 요구했을 때에는 더 적극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 결국 '무죄'..."좀 더 잘 얘기했으면 달랐을까"

A 양은 국민참여재판 법정에 나간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날'에 대해 말하면서 지금도 중간중간 울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날 조금 더 감정을 절제하고 잘 말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민참여재판에서 7명 중 2명만이 B 씨가 유죄라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재판부도 피해자의 법정에서 진술이 모호하고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로 판결했습니다. 2심에서는 원심판결을 뒤집을 만한 이유가 없다며 또다시 무죄가 나왔고 지금은 대법원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애초에 양쪽 입장이 완전히 다른 사건이었습니다. 국민참여재판에서 제시된 새로운 내용도, 새로운 증인도 없었습니다. A 양은 "(가해자가) 요구한 거짓말탐지기 조사도 정작 가해자는 본인은 약을 먹는다는 이유로 나만 받았고 어렵게 진술 분석을 받은 내용도 피고 측이 거부해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다"며 "그날 처음 보는 배심원들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걸로 판결이 났다고 생각하니 억울할 뿐"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이 국민참여재판은 대체 누구를 위한 재판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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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추행 피해자인데 국민참여재판 증인까지 해야 하나요”
    • 입력 2020-10-19 11:31:14
    취재K
1년 전 만 19살의 나이에 배심원들 앞에 섰던 A 양은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버겁다고 말합니다. 성추행 피해자로서 국민참여재판의 증인에 참여한 뒤 A 양의 삶은 그전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았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곧 휴학했고 여러 차례 상담을 받았지만 먹던 약도 모두 거부한 채 결국 하루하루를 어머니와 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 성추행 피해자가 겪은 국민참여재판..."울다 얘기하기를 반복해"

A 양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2016년 엄마의 지인이자 집주인이었던 B 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자주 집을 드나들던 B 씨가 A 양의 엉덩이를 치는 등의 행동을 했던 겁니다. A 양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집안에서 일어났던 일이라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B 씨는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습니다. 결국, 1심 재판부였던 춘천지방법원은 피고 측이 요청한 국민참여재판을 받아들였습니다.

국민참여재판 녹취록 중 일부 발췌
B 씨의 변호인은 '(피고인이) 누군가의 아버지일 수 있다. 벌금형만 나와도 직장을 잃게 된다'며 변론을 펼쳤습니다. 술렁이는 법정의 공기는 A 양에게도 느껴졌습니다. 이후 A 양은 법정에서의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고 합니다. 쏟아지는 질문과 이어지는 불신의 눈초리, 참다못해 터져 나온 눈물까지 겹쳐 법정에 선 내내 머릿속이 새하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녹취록을 확인해보니 피고 측 변호인은 A 양이 '기억이 안 난다'고 답하면 '정말 안 나느냐'고 되묻거나 '그래도 기억이 나는 게 있을 거 아니냐'며 압박했습니다. A 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질문을 하거나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A 양은 "울다 얘기하길 반복하며 점점 감정이 격해졌던 것 같다"며 "표정을 봐야 한다는 이유로 아무런 가림막 없이 얘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너무나 당황스러웠다"고 회상했습니다.

■ 피해자가 원치 않는 국민참여재판 왜 열리나?

국민참여재판은 기본적으로 피고인의 권리입니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배제할 수 있다는 규정은 있지만,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재판부 판단에 달린 겁니다. 이 때문에 피해자가 원치 않아도 피고 측 주장을 배제할 이유가 없거나 재판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국민참여재판이 열리기도 합니다.

A 양도 국민참여재판을 원치 않는다는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또, 당시 A 양이 생일이 지나지 않은 만 19살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B 씨의 변호인조차 국민참여재판이 진행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국민참여재판을 수용했습니다.

B 씨가 국민참여재판을 요구하면서 제시한 근거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증거나 증언의 신뢰도가 낮다는 것, 그리고 가해자로 지목된 B 씨가 혐의를 완전히 부인하고 있다는 점 등이었습니다. 그중 특히 눈길을 끄는 건 A 양이 언론사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2차 피해 우려가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피고인 B 씨 측도 국민참여재판에 A 양이 등장하면 2차 가해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이 같은 주장을 펼친 겁니다. A 양은 "당시 인터뷰는 모자이크에 음성변조까지 약속받고 한 일"이라며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한 인터뷰가 이렇게 악용될 거라고 생각 못 했다"고 말합니다.

■ 성범죄 국민참여재판 무죄율 7배…"악용 우려"

성범죄의 경우 국민참여재판은 무죄율이 비교적 높습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KIC) 자료를 보면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열렸던 국민참여재판의 평균 무죄율은 10.9%인데 이 가운데 성범죄 사건의 경우 18.8%나 무죄가 나왔습니다.

[출처 :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일반 재판보다 국민참여재판의 무죄율이 더 높은 건 어느 범죄나 비슷한 추세지만 특히 성범죄의 경우는 무죄율이 더 높습니다. 살인 등 주요 4대 범죄의 경우 일반 재판보다 국민참여재판에서의 무죄율이 5배 더 높지만, 성범죄 사건의 경우 국민참여재판의 무죄율이 일반 재판보다 7.5배나 더 높습니다.

이 때문에 국민참여재판이 피고인에게 악용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앞서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유도 국가대표 출신 '왕기춘 사건'에서도 왕 씨가 국민참여재판을 요구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연구소 '울림'의 김보화 책임연구원은 "성폭력 사건의 특성상 명백한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며 "국민참여재판에서는 배심원들의 감정에 호소할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성범죄에 대해 더 보수적인 판단이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배심원들이 왜곡된 성적인 통념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재판 과정에서 부적절한 질문들이 피해자들한테 주어지기도 해 2차 가해의 우려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1심에서 국민참여재판이 진행될 경우 항소심에서 이를 뒤집기도 어렵습니다. 2008년부터 10년간 국민참여재판이 항소심에서 파기되는 경우는 29%로 일반 재판(41%)보다 낮게 조사됐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의 경우 항소심에서 새로운 혐의가 추가되지 않는 이상 원심판결이 존중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김 연구원은 "(성범죄는) 기존 범죄들처럼 명확한 물증이나 증거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범죄의 영역인데 국민참여재판이 적절한지 의문"이라며 "성폭력 범죄 전체에 대해서 특히 피해자가 요구했을 때에는 더 적극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 결국 '무죄'..."좀 더 잘 얘기했으면 달랐을까"

A 양은 국민참여재판 법정에 나간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날'에 대해 말하면서 지금도 중간중간 울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날 조금 더 감정을 절제하고 잘 말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민참여재판에서 7명 중 2명만이 B 씨가 유죄라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재판부도 피해자의 법정에서 진술이 모호하고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로 판결했습니다. 2심에서는 원심판결을 뒤집을 만한 이유가 없다며 또다시 무죄가 나왔고 지금은 대법원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애초에 양쪽 입장이 완전히 다른 사건이었습니다. 국민참여재판에서 제시된 새로운 내용도, 새로운 증인도 없었습니다. A 양은 "(가해자가) 요구한 거짓말탐지기 조사도 정작 가해자는 본인은 약을 먹는다는 이유로 나만 받았고 어렵게 진술 분석을 받은 내용도 피고 측이 거부해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다"며 "그날 처음 보는 배심원들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걸로 판결이 났다고 생각하니 억울할 뿐"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이 국민참여재판은 대체 누구를 위한 재판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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