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너머의 여순]① 여순사건 72년, 여순 ‘너머’를 생각한다

입력 2020.10.1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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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이 올해로 7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어느 지역의 일로만 여겨져 왔습니다. '여수와 순천'이라는 명칭이 붙은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남 전역과 경남 서부 지역, 전북 지역까지 직접 여순사건의 피해를 봤고, 제주 4.3의 무차별 학살과 6.25 직후 형무소·보도연맹 학살에도 연관됐습니다. 여순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인 셈입니다. 여순사건 72주년을 맞아 지역적 한계를 넘어 여순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들여다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합니다.

'여순사건'.

수많은 이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평생을 짓누르는 족쇄가 돼 온 말. 누군가는 '빨갱이'를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항쟁'을 떠올리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말.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는 생경한 말입니다. 교과서에서도 어렴풋이 본 듯 만 듯, 익숙하지 않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 "여순사건이 뭐야?"…지역에 갇힌 역사

여순사건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먼저 '여순'이 뭔지 궁금해 합니다. '여수·순천의 줄임말'이라는 답변과 함께, 약간의 설명을 들으면 의문이 조금은 풀립니다.

"1948년 10월,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더불어민주당 소병철 의원 외 국회의원 151명 발의,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 2020.)

관광지로 유명한 전남 여수와 순천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고는 잊어버립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떠올릴 일도 거의 없습니다. 제주 4.3이나 광주 5.18은 해마다 그날이 돌아오면 전국적인 조명을 받으며 기억을 상기해 주지만, 여순사건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크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여순을 아는 사람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여순 반란 사건'이라고 불렸고, 지금은 '여수·순천 10·19', 또는 '여순항쟁'이라고도 합니다. 명칭이 어떻든 여순사건은 곧 '여수와 순천'입니다. 이른바 '일대일 대응' 관계인 겁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해서일까요. 여순사건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여수와 순천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수·순천 사람들만의 일이라는 거죠. 사건 전개도, 가해 행위와 피해의 발생도 특정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으로 이해됩니다.

■ 광범위한 피해, 막대한 영향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례·보성·광양 등 전남 동부, 화순, 영암과 함평 등 전남 중서부 지역을 비롯해, 하동과 산청 등 경남 서부와 임실과 김제 등 전북에까지 여순사건과 직결된 참혹한 학살이 자행됐습니다.(여수지역사회연구소, <다시 쓰는 여순사건 보고서>, 2012.)


6.25 직후 전국의 형무소 재소자들이 무더기로 총살된 것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악의 민간인 대학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도 여순사건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14연대의 무장봉기가 일어난 1948년 10월부터 1950년 6.25 전후에까지, 여순사건은 특정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수많은 죽음을 불러일으킨 겁니다.

여순사건의 정치·사회적 영향도 지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얼룩진 국가폭력의 원형은 여순사건에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원인이 됐고, 이후 대한민국이 사실상의 '반공 국가'로 태어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렇게 여순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 때문에, 대한민국을 ‘여순 체제’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을 정도입니다.


■ '여순 너머의 여순'을 생각한다

여순사건은 과연 여수와 순천만의 일일까요? 혼란하고 또 혼란했던 시기, 여수와 순천 너머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여순사건이 당긴 죽음의 방아쇠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을까요? 전남의 작은 두 도시에서 일어났다는 사건이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70여 년 전 일어난 일을, 지금도 기억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순사건 72주년 기획보도, '여순 너머의 여순'을 통해 조금이나마 답해보고자 하는 질문들입니다.

다음 순서에서는 72년 만의 첫 여순사건 합동 위령제가 왜 여수나 순천이 아닌 구례에서 열렸는지를 알아봅니다. 구례 산골 곳곳에 숨겨져 있는 피맺힌 이야기와, 전남 동부뿐 아니라 중서부, 경남 서부, 전북 등지에서 여순사건 피해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도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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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순 너머의 여순]① 여순사건 72년, 여순 ‘너머’를 생각한다
    • 입력 2020-10-19 17:05:45
    취재K

편집자 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이 올해로 7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어느 지역의 일로만 여겨져 왔습니다. '여수와 순천'이라는 명칭이 붙은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남 전역과 경남 서부 지역, 전북 지역까지 직접 여순사건의 피해를 봤고, 제주 4.3의 무차별 학살과 6.25 직후 형무소·보도연맹 학살에도 연관됐습니다. 여순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인 셈입니다. 여순사건 72주년을 맞아 지역적 한계를 넘어 여순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들여다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합니다.

'여순사건'.

수많은 이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평생을 짓누르는 족쇄가 돼 온 말. 누군가는 '빨갱이'를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항쟁'을 떠올리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말.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는 생경한 말입니다. 교과서에서도 어렴풋이 본 듯 만 듯, 익숙하지 않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 "여순사건이 뭐야?"…지역에 갇힌 역사

여순사건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먼저 '여순'이 뭔지 궁금해 합니다. '여수·순천의 줄임말'이라는 답변과 함께, 약간의 설명을 들으면 의문이 조금은 풀립니다.

"1948년 10월,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더불어민주당 소병철 의원 외 국회의원 151명 발의,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 2020.)

관광지로 유명한 전남 여수와 순천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고는 잊어버립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떠올릴 일도 거의 없습니다. 제주 4.3이나 광주 5.18은 해마다 그날이 돌아오면 전국적인 조명을 받으며 기억을 상기해 주지만, 여순사건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크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여순을 아는 사람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여순 반란 사건'이라고 불렸고, 지금은 '여수·순천 10·19', 또는 '여순항쟁'이라고도 합니다. 명칭이 어떻든 여순사건은 곧 '여수와 순천'입니다. 이른바 '일대일 대응' 관계인 겁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해서일까요. 여순사건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여수와 순천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수·순천 사람들만의 일이라는 거죠. 사건 전개도, 가해 행위와 피해의 발생도 특정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으로 이해됩니다.

■ 광범위한 피해, 막대한 영향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례·보성·광양 등 전남 동부, 화순, 영암과 함평 등 전남 중서부 지역을 비롯해, 하동과 산청 등 경남 서부와 임실과 김제 등 전북에까지 여순사건과 직결된 참혹한 학살이 자행됐습니다.(여수지역사회연구소, <다시 쓰는 여순사건 보고서>, 2012.)


6.25 직후 전국의 형무소 재소자들이 무더기로 총살된 것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악의 민간인 대학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도 여순사건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14연대의 무장봉기가 일어난 1948년 10월부터 1950년 6.25 전후에까지, 여순사건은 특정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수많은 죽음을 불러일으킨 겁니다.

여순사건의 정치·사회적 영향도 지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얼룩진 국가폭력의 원형은 여순사건에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원인이 됐고, 이후 대한민국이 사실상의 '반공 국가'로 태어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렇게 여순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 때문에, 대한민국을 ‘여순 체제’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을 정도입니다.


■ '여순 너머의 여순'을 생각한다

여순사건은 과연 여수와 순천만의 일일까요? 혼란하고 또 혼란했던 시기, 여수와 순천 너머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여순사건이 당긴 죽음의 방아쇠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을까요? 전남의 작은 두 도시에서 일어났다는 사건이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70여 년 전 일어난 일을, 지금도 기억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순사건 72주년 기획보도, '여순 너머의 여순'을 통해 조금이나마 답해보고자 하는 질문들입니다.

다음 순서에서는 72년 만의 첫 여순사건 합동 위령제가 왜 여수나 순천이 아닌 구례에서 열렸는지를 알아봅니다. 구례 산골 곳곳에 숨겨져 있는 피맺힌 이야기와, 전남 동부뿐 아니라 중서부, 경남 서부, 전북 등지에서 여순사건 피해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도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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