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너머의 여순]② 남도 곳곳은 여순사건 ‘학살터’

입력 2020.10.2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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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이 올해로 7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어느 지역의 일로만 여겨져 왔습니다. '여수와 순천'이라는 명칭이 붙은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남 전역과 경남 서부 지역, 전북 지역까지 직접 여순사건의 피해를 봤고, 제주 4.3의 무차별 학살과 6.25 직후 형무소·보도연맹 학살에도 연관됐습니다. 여순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인 셈입니다. 여순사건 72주년을 맞아 지역적 한계를 넘어 여순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들여다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합니다.

구름도 없는 가을 하늘, 그 아래에 높낮이를 달리한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강물도 잔잔히 흐릅니다. 섬진강과 지리산이라는 천혜의 자연을 갖추고 있는 전남 구례군의 10월 모습입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 같은 풍경이지만, 72년 전 이곳의 색깔은 핏빛이었습니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 진압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킨 국군 14연대는 진압군을 피해 대부분 지리산 지역으로 입산했습니다. 한 번 숨으면 자취를 찾기 어려운 험한 산세에 의지해서 게릴라 작전을 펼쳤죠. 진압군은 산악 지대를 추적하며 토벌에 나섰습니다.

전남 구례군 간전면 간문천변.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지만 72년 전 민간인들이 학살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전남 구례군 간전면 간문천변.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지만 72년 전 민간인들이 학살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 아름다운 산골 마을, 전장이 되다

지리산과 백운산을 끼고 있는 구례는 전장으로 변했습니다. 구례의 산자락 마을들은 반군에게는 식량을 얻는 통로였지만 진압군에게는 표적이 됐습니다. 진압군은 토벌 작전을 위해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내쫓는 '소개 작전'을 벌였고, 반군에 협력했다는 의심이 들면 죽였습니다.

1948년 11월, 두 살이던 신영식 씨도 그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신 씨 가족은 산간 마을에서 소를 키우며 남부럽지 않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일상이 송두리째 뿌리 뽑힌 건 진압군이 반군 소탕 작전을 벌이면서였습니다. 빨치산들만 토벌하는 게 아니라 주변 마을까지 초토화된다는 말에, 신 씨의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숨겨둔 채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가족이 걱정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아들은 9대 독자였습니다. 산에 간 지 몇 시간도 안 되어서 신 씨의 아버지는 다시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죽어도 가족과 죽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살던 집은 진압군이 불태운 상태였지만 그래도 가족을 찾아서 좋았습니다. 이튿날, 군인들에 의해 끌려갈 때까지는 말입니다.

여순사건 유족 신영식 씨가 피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 씨는 이곳 간문천변에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여순사건 유족 신영식 씨가 피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 씨는 이곳 간문천변에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 "한이 서린다"…구례 전역에서 학살 자행

간문국민학교로 끌려간 신 씨의 아버지는 사흘 뒤 학교 옆 간문천변에서 다른 주민들과 함께 사살됐습니다. 이른바 '간문천변 사건'으로 희생된 겁니다. 신 씨는 "아버지가 아무 죄도 없이 사흘을 굶다가 돌아가셨다. 한이 서린다"며, "아버지를 잃은 뒤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 눈물도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고 울먹였습니다.

간문천변 사건의 참상은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의 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납니다. 구례군 간전면에 주둔했던 국군 12연대는 마을 주민들을 연행해 반군 협조 여부 등을 취조한 뒤 사살했습니다. 사람들을 줄줄이 묶은 채 일렬로 쏴 죽였습니다. 사살 전 수용자들은 서로 뺨 때리기를 강요당했습니다. 진화위가 추정한 간전면 희생자는 70여 명, 그러나 간문천변에서만 시신 3백구를 묻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구례지역 여순 사건 조사보고서, 2008)

구례 지역 여순사건 피해를 조사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구례 지역 여순사건 피해를 조사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구례 전역에서 비슷한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학살터가 14곳, 희생자가 8백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올해 구례 여순사건 유족들에 대한 구술 채록 연구 작업을 진행한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최성문 연구원은 "여수와 순천의 학살은 비교적 일시적으로 벌어졌지만, 구례 지역은 민간인 학살이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펼쳐졌다는 특징이 발견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여순항쟁 유족연합회장이자 구례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이규종 회장은 "빨갱이 자식이라고 하는 딱지 때문에 불이익과 피해를 받을까 봐 아직도 얘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며 "현재까지 나온 조사 결과보다 실제 피해자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여순사건 피해, 경남 산청에서도 발생

전남 여수와 순천에서 시작된 여순사건은 경남 서부 지역에서도 민간인 학살 피해를 냈습니다. 구례와 마찬가지로 지리산 지역에 인접한 경남 산청, 하동 등이 피해 지역입니다.

1949년 7월 18일, 산청군 시천면 신천리에서도 30명 가까운 주민들이 군에 의해 사살됐습니다. 빨치산들의 매복에 당해 1개 소대가 거의 몰살되는 피해를 보자, 진압군이 주민들을 보복 살해한 겁니다. 군인들은 마을 주민 백여 명을 학교에 모이게 한 뒤, 청년 30여 명을 골라 좌익단체 가입 여부를 물었습니다. 아무도 가입하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청년들이 거짓말을 한다며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여기에 못 이긴 10여 명이 가입했다고 말하자 그들을 사살했고, 다른 청년들도 함께 죽였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산청 시천‧삼장 민간인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2007)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세워져 있는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세워져 있는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

아들이 죽는 걸 본 아버지는 눈이 뒤집혔습니다. "왜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이느냐. 나도 죽여라."라고 외쳤습니다. 군인들은 "여기 있는 게 전부 네 자식이냐. 영감탱이가 죽고 싶으면 이리 나와라."라고 말하며, 아버지도 총살했습니다. 이재천 경남 산청 시천‧삼장 민간인희생자 유족회장의 삼촌과 할아버지가 그렇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 피로 물든 남도…"여수·순천이 끝이 아니다"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 14연대 군인들을 토벌하면서, 이들을 도왔다는 의심만으로 주민들을 학교에 모아 놓고 죽이는 행위. 똑 닮아 있는 여순사건의 민간인 피해는 구례와 산청에서만 일어난 게 아닙니다. 광양과 보성, 고흥 등 주민들이 무장봉기에 호응했던 전남 동부 지역은 물론, 화순과 나주, 영암과 무안 등 전남 전역에서 비슷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경남 서부뿐 아니라 전북 임실과 김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20년 10월 19일, 전라남도가 72년 만에 처음으로 주관한 여순사건 합동위령제가 구례에서 열렸습니다.2020년 10월 19일, 전라남도가 72년 만에 처음으로 주관한 여순사건 합동위령제가 구례에서 열렸습니다.

진화위가 4년여에 걸쳐 지역별로 나눠 조사한 결과를 종합하면, 이런 여순사건 토벌 과정에서의 민간인 희생 피해가 난 지역은 22개 시군에 이릅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다시 쓰는 여순사건 보고서, 2012)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여순사건은 여수와 순천이 진압됐다고 해서 끝난 사건이 아니다. 지리산 주변 지역들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1948년을 넘어 49년, 50년에도 계속 벌어진다. 당시 남한의 남쪽 부분이 모두 해당되는 사건이 여순사건"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남도 곳곳을 학살터로 만들고 피로 물들인 여순사건을 '여순'이라는 이름에 가두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순사건 72주년 기획보도 '여순 너머의 여순', 다음 순서에서는 여순사건이 부른 더 많은 죽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와 6·25 전후 잇따른 대량 학살이 어떻게 여순사건과 관련돼 있는지를 탐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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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순 너머의 여순]② 남도 곳곳은 여순사건 ‘학살터’
    • 입력 2020-10-20 14:02:54
    취재K

편집자 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이 올해로 7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어느 지역의 일로만 여겨져 왔습니다. '여수와 순천'이라는 명칭이 붙은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남 전역과 경남 서부 지역, 전북 지역까지 직접 여순사건의 피해를 봤고, 제주 4.3의 무차별 학살과 6.25 직후 형무소·보도연맹 학살에도 연관됐습니다. 여순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인 셈입니다. 여순사건 72주년을 맞아 지역적 한계를 넘어 여순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들여다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합니다.

구름도 없는 가을 하늘, 그 아래에 높낮이를 달리한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강물도 잔잔히 흐릅니다. 섬진강과 지리산이라는 천혜의 자연을 갖추고 있는 전남 구례군의 10월 모습입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 같은 풍경이지만, 72년 전 이곳의 색깔은 핏빛이었습니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 진압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킨 국군 14연대는 진압군을 피해 대부분 지리산 지역으로 입산했습니다. 한 번 숨으면 자취를 찾기 어려운 험한 산세에 의지해서 게릴라 작전을 펼쳤죠. 진압군은 산악 지대를 추적하며 토벌에 나섰습니다.

전남 구례군 간전면 간문천변.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지만 72년 전 민간인들이 학살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 아름다운 산골 마을, 전장이 되다

지리산과 백운산을 끼고 있는 구례는 전장으로 변했습니다. 구례의 산자락 마을들은 반군에게는 식량을 얻는 통로였지만 진압군에게는 표적이 됐습니다. 진압군은 토벌 작전을 위해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내쫓는 '소개 작전'을 벌였고, 반군에 협력했다는 의심이 들면 죽였습니다.

1948년 11월, 두 살이던 신영식 씨도 그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신 씨 가족은 산간 마을에서 소를 키우며 남부럽지 않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일상이 송두리째 뿌리 뽑힌 건 진압군이 반군 소탕 작전을 벌이면서였습니다. 빨치산들만 토벌하는 게 아니라 주변 마을까지 초토화된다는 말에, 신 씨의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숨겨둔 채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가족이 걱정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아들은 9대 독자였습니다. 산에 간 지 몇 시간도 안 되어서 신 씨의 아버지는 다시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죽어도 가족과 죽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살던 집은 진압군이 불태운 상태였지만 그래도 가족을 찾아서 좋았습니다. 이튿날, 군인들에 의해 끌려갈 때까지는 말입니다.

여순사건 유족 신영식 씨가 피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 씨는 이곳 간문천변에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 "한이 서린다"…구례 전역에서 학살 자행

간문국민학교로 끌려간 신 씨의 아버지는 사흘 뒤 학교 옆 간문천변에서 다른 주민들과 함께 사살됐습니다. 이른바 '간문천변 사건'으로 희생된 겁니다. 신 씨는 "아버지가 아무 죄도 없이 사흘을 굶다가 돌아가셨다. 한이 서린다"며, "아버지를 잃은 뒤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 눈물도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고 울먹였습니다.

간문천변 사건의 참상은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의 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납니다. 구례군 간전면에 주둔했던 국군 12연대는 마을 주민들을 연행해 반군 협조 여부 등을 취조한 뒤 사살했습니다. 사람들을 줄줄이 묶은 채 일렬로 쏴 죽였습니다. 사살 전 수용자들은 서로 뺨 때리기를 강요당했습니다. 진화위가 추정한 간전면 희생자는 70여 명, 그러나 간문천변에서만 시신 3백구를 묻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구례지역 여순 사건 조사보고서, 2008)

구례 지역 여순사건 피해를 조사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구례 전역에서 비슷한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학살터가 14곳, 희생자가 8백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올해 구례 여순사건 유족들에 대한 구술 채록 연구 작업을 진행한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최성문 연구원은 "여수와 순천의 학살은 비교적 일시적으로 벌어졌지만, 구례 지역은 민간인 학살이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펼쳐졌다는 특징이 발견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여순항쟁 유족연합회장이자 구례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이규종 회장은 "빨갱이 자식이라고 하는 딱지 때문에 불이익과 피해를 받을까 봐 아직도 얘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며 "현재까지 나온 조사 결과보다 실제 피해자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여순사건 피해, 경남 산청에서도 발생

전남 여수와 순천에서 시작된 여순사건은 경남 서부 지역에서도 민간인 학살 피해를 냈습니다. 구례와 마찬가지로 지리산 지역에 인접한 경남 산청, 하동 등이 피해 지역입니다.

1949년 7월 18일, 산청군 시천면 신천리에서도 30명 가까운 주민들이 군에 의해 사살됐습니다. 빨치산들의 매복에 당해 1개 소대가 거의 몰살되는 피해를 보자, 진압군이 주민들을 보복 살해한 겁니다. 군인들은 마을 주민 백여 명을 학교에 모이게 한 뒤, 청년 30여 명을 골라 좌익단체 가입 여부를 물었습니다. 아무도 가입하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청년들이 거짓말을 한다며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여기에 못 이긴 10여 명이 가입했다고 말하자 그들을 사살했고, 다른 청년들도 함께 죽였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산청 시천‧삼장 민간인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2007)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세워져 있는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
아들이 죽는 걸 본 아버지는 눈이 뒤집혔습니다. "왜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이느냐. 나도 죽여라."라고 외쳤습니다. 군인들은 "여기 있는 게 전부 네 자식이냐. 영감탱이가 죽고 싶으면 이리 나와라."라고 말하며, 아버지도 총살했습니다. 이재천 경남 산청 시천‧삼장 민간인희생자 유족회장의 삼촌과 할아버지가 그렇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 피로 물든 남도…"여수·순천이 끝이 아니다"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 14연대 군인들을 토벌하면서, 이들을 도왔다는 의심만으로 주민들을 학교에 모아 놓고 죽이는 행위. 똑 닮아 있는 여순사건의 민간인 피해는 구례와 산청에서만 일어난 게 아닙니다. 광양과 보성, 고흥 등 주민들이 무장봉기에 호응했던 전남 동부 지역은 물론, 화순과 나주, 영암과 무안 등 전남 전역에서 비슷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경남 서부뿐 아니라 전북 임실과 김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20년 10월 19일, 전라남도가 72년 만에 처음으로 주관한 여순사건 합동위령제가 구례에서 열렸습니다.
진화위가 4년여에 걸쳐 지역별로 나눠 조사한 결과를 종합하면, 이런 여순사건 토벌 과정에서의 민간인 희생 피해가 난 지역은 22개 시군에 이릅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다시 쓰는 여순사건 보고서, 2012)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여순사건은 여수와 순천이 진압됐다고 해서 끝난 사건이 아니다. 지리산 주변 지역들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1948년을 넘어 49년, 50년에도 계속 벌어진다. 당시 남한의 남쪽 부분이 모두 해당되는 사건이 여순사건"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남도 곳곳을 학살터로 만들고 피로 물들인 여순사건을 '여순'이라는 이름에 가두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순사건 72주년 기획보도 '여순 너머의 여순', 다음 순서에서는 여순사건이 부른 더 많은 죽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와 6·25 전후 잇따른 대량 학살이 어떻게 여순사건과 관련돼 있는지를 탐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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