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너머의 여순]③ 4.3·형무소·보도연맹…여순사건이 부른 죽음들

입력 2020.10.2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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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이 올해로 7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어느 지역의 일로만 여겨져 왔습니다. '여수와 순천'이라는 명칭이 붙은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남 전역과 경남 서부 지역, 전북 지역까지 직접 여순사건의 피해를 봤고, 제주 4.3의 무차별 학살과 6.25 직후 형무소·보도연맹 학살에도 연관됐습니다. 여순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인 셈입니다. 여순사건 72주년을 맞아 지역적 한계를 넘어 여순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들여다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합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직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제주도토벌출동거부 병사위원회 성명서 중, 1948. 10.)

여순사건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제주 4.3입니다. 제주 4.3은 여순사건의 발단이 됐습니다. 여수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의 성명서만 봐도 그렇습니다. 제주도 출병 거부가 봉기의 이유였습니다. '4.3이 없었으면 여순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은 그래서 유효합니다.

■ 4.3 초토화 작전 계기는 여순사건

그런데 거꾸로 4.3을 애기할 때도 여순사건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4.3의 희생자는 최대 3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희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배경에는 여순사건이 있습니다. 4.3의 가장 참혹한 시기는 여순사건이 발생한 이후 찾아왔습니다. 1948년 11월, 여순사건으로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반정부 세력을 뿌리 뽑겠다는 명목으로 제주에서 '초토화 작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제주에서 군경의 4.3 토벌을 피해 굴로 숨었던 10여 명이 집단 희생된 다랑쉬굴. (제주 4.3 평화기념관)제주에서 군경의 4.3 토벌을 피해 굴로 숨었던 10여 명이 집단 희생된 다랑쉬굴. (제주 4.3 평화기념관)

'초토'(焦土)는 불에 타서 그을린 땅을 의미합니다. 제주 진압군은 말뜻 그대로 중산간 마을 대부분을 불태웠습니다. 방화 뒤에는 무차별 총살이 이어졌습니다. 무장대의 가족을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이 자행됐습니다. 노인도, 어린이도 예외 없이 살해됐습니다. 토벌을 명목으로 한 무참한 살해는 대부분의 산간마을이 초토화되고 나서야 멎었습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박찬식 전 제주 4.3 연구소 소장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민간인 학살의 역사에서, 어떻게 보면 4.3보다도 먼저 여순이 희생을 본 지역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여순사건을 '모델'로 4.3에 대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력한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여수 '형제묘'와 제주 '백조일손지묘'
남해가 내려다보이는 여수 만성리. 여기에 둥그렇고 커다란 봉분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은 '형제묘'입니다. 1949년 1월, 반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민간인 125명이 한꺼번에 처형된 뒤 불탄 곳이죠.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길이 없던 유족들은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지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비슷한 무덤이 제주에도 있습니다. 서귀포 대정면에 있는 '백조일손지묘'입니다. 6.25 직후 '사상이 불순한 자를 고른다'는 '예비검속'으로 붙잡혀 온 제주도민 132명이 사살됐습니다. 여름날 버려진 시신은 빠르게 썩어들어갔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유족들은 한곳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조상은 백 명[百祖]이라도, 한데 묻힌 자손들은 하나[一孫]라는 의미였습니다.

바다 건너 여수와 제주에 비슷한 형태의 무덤이 모두 있다는 사실은 여순사건과 제주 4.3의 연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여수 만성리 형제묘(왼쪽)와 제주 백조일손지묘(오른쪽). 여수 만성리 형제묘(왼쪽)와 제주 백조일손지묘(오른쪽).

■ 억울한 군사재판…형무소에서 스러진 넋들

여순사건이 부른 죽음은 제주를 넘어 전국으로 이어집니다. 6.25 직후 일어난 전국 형무소의 학살 사건이 그렇습니다. 앞서 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학살된 민간인들에 대해 말씀드렸죠. 그런데 이렇게 '즉결 처분'을 당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닙니다. 민간인 상당수는 군법에 따른 군사재판을 받았습니다. 내란죄, 국기문란죄, 이런 혐의로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이나 무기징역, 심지어 사형을 받기까지 했죠.

여순사건 관련자들을 마구잡이로 '죄인'으로 만들다 보니, 전국 형무소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1948년 봄 전국 형무소 재소자는 22,000명이었는데, 1950년 1월에는 두 배 넘는 48,000명에까지 이릅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2010)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6.25 전쟁은 비극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른바 '좌익 사범'으로 포화 상태가 된 형무소를 일종의 위협으로 느낀 정부가, 이들을 없애야겠다는 판단을 내린 겁니다.

아직도 유골이 나오고 있는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터.아직도 유골이 나오고 있는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터.

대표적인 사례가 '대전 산내 학살 사건'입니다. 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군경이 대전형무소 수감자 중 '정치범'들을 모아 놓고 집단 살해했습니다. 형무소에서 화물차로 죄수들을 실어온 뒤 골짜기 주변에 기다란 구덩이 여러 개를 파 놓고 죽여 묻은 겁니다.

2007년부터 발굴이 진행 중인 골령골에서는 지금도 유골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발굴과 진상규명 작업을 벌여오고 있는 전숙자 대전 산내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회장은 "시신이 켜켜이 쌓여 있는 모습으로 묻힌 것이 확인된다. 유골 위에 흙, 그 위에 유골, 그 위에 흙을 겹쳐져 쌓는 식으로 묻어 놓은 것이다. 골령골 골짜기가 완전히 '뼈 밭'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적게는 1,800명, 많게는 7,000명이 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 산내 학살 사건의 희생자 상당수는 여순사건 때문에 형무소에 갇힌 이들입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여순사건 관련자가 최소 천 명 이상 수용돼 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특히 여순사건 재소자들은 제주4.3 등 다른 사건에 비해 대부분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대전뿐 아니라 서울, 인천, 광주, 목포, 전주, 대구 등에서도 6.25 직후 여순 사건 관련자들이 사살됐습니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발견된 유골들.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발견된 유골들.

■ 70년 전 억울함 벗으려…재심 청구한 유족들

하지만 이들이 실형을 받은 근거인 '군사재판'은 불법적 성격이 짙습니다. 무엇보다도 군인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재판을 민간인에게도 적용한 이유는 당시 내려진 '계엄령'이었는데, 이 계엄령 자체가 계엄법도 없이 내려졌습니다. 수사와 재판도 적법하지 않게 이뤄진 정황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올해 1월 여순사건 재심에서 사형을 당한 철도원이 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전 산내 학살 사건의 여순사건 관련 유족 25명이 최근 재판을 다시 해 달라는 '재심'을 청구한 이유입니다. 여순사건으로 부당한 형을 받았고, 이 때문에 목숨을 잃은 가족들에 대해 뒤늦게라도 명예를 회복해 달라는 요구입니다. 김운택 대전 산내유족회 전남지회장은 "엉뚱하게 협력자로 지목을 받아 형님이 대전형무소에서 돌아가셨다"라며 "죄가 없는 사람을 누명 씌워 죽게 했으니, 죄를 벗기 위해 재심 청구를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전 골령골에서 살해된 여순사건 관련 수감자의 군사재판 관련 기록.대전 골령골에서 살해된 여순사건 관련 수감자의 군사재판 관련 기록.

기막힌 것은, 재판을 받은 기록이 없는 경우에는 재심조차 청구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군사재판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유족들은 기록이 없다는 건 오히려 사법 처리가 더 불법적으로 이뤄진 정황을 보여준다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마찬가지로 여순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서 아버지를 잃은 유족 김홍기 씨의 말입니다.

"기록이 없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왜 우리 잘못입니까. 잡아갔을 때 기록을 안 했든지, 기록도 없이 사람을 죽인 것인데 이것 때문에 (명예회복이)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 '좌익 몰이'가 부른 보도연맹 학살

수십만 명이 숨진 한국 현대사 최악의 민간인 학살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역시 여순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 전향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관변 단체죠. 여순사건 이후인 1949년 결성됐는데, 좌익 경력자뿐 아니라 이념과 무관한 민간인들까지 가입이 강요되면서 수십만 명으로 규모가 늘었습니다. 이렇게 보도연맹이 대규모 단체가 된 것은 사회 전반에서 이른바 '좌익 몰이'가 이뤄졌기 때문이고, 그 발단은 단연 여순사건이었습니다.

보도연맹원 수천 명이 학살된 경남 경산의 코발트 광산.보도연맹원 수천 명이 학살된 경남 경산의 코발트 광산.

6.25가 발생하자 이런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여 사살한 것이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입니다. 전국 산천이 학살지였습니다. 경남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서, 충북 청원의 분터골에서, 전남 여수의 무인도 애기섬에서 보도연맹원들이 무참히 죽어갔습니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6.25 형무소 학살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에서 보듯이, 전쟁이 터지자마자 여순사건 등에 관련된 이들이 대대적으로 처형된 것은 이 사건의 여파가 1950년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순사건은 사건 자체의 피해 규모보다도 훨씬 더 비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잇따른 대량 학살의 게기가 됐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를 피로 물들인 비극의 씨앗이 된 것이죠. 여순사건을 단순한 특정 지역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순사건 72주년 기획보도, 다음 순서에서는 지역을 넘어 역사를 바꿔 놓은 여순사건의 여파에 대해 들여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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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순 너머의 여순]③ 4.3·형무소·보도연맹…여순사건이 부른 죽음들
    • 입력 2020-10-21 14:12:04
    취재K

편집자 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이 올해로 7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어느 지역의 일로만 여겨져 왔습니다. '여수와 순천'이라는 명칭이 붙은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남 전역과 경남 서부 지역, 전북 지역까지 직접 여순사건의 피해를 봤고, 제주 4.3의 무차별 학살과 6.25 직후 형무소·보도연맹 학살에도 연관됐습니다. 여순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인 셈입니다. 여순사건 72주년을 맞아 지역적 한계를 넘어 여순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들여다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합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직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제주도토벌출동거부 병사위원회 성명서 중, 1948. 10.)

여순사건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제주 4.3입니다. 제주 4.3은 여순사건의 발단이 됐습니다. 여수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의 성명서만 봐도 그렇습니다. 제주도 출병 거부가 봉기의 이유였습니다. '4.3이 없었으면 여순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은 그래서 유효합니다.

■ 4.3 초토화 작전 계기는 여순사건

그런데 거꾸로 4.3을 애기할 때도 여순사건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4.3의 희생자는 최대 3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희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배경에는 여순사건이 있습니다. 4.3의 가장 참혹한 시기는 여순사건이 발생한 이후 찾아왔습니다. 1948년 11월, 여순사건으로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반정부 세력을 뿌리 뽑겠다는 명목으로 제주에서 '초토화 작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제주에서 군경의 4.3 토벌을 피해 굴로 숨었던 10여 명이 집단 희생된 다랑쉬굴. (제주 4.3 평화기념관)
'초토'(焦土)는 불에 타서 그을린 땅을 의미합니다. 제주 진압군은 말뜻 그대로 중산간 마을 대부분을 불태웠습니다. 방화 뒤에는 무차별 총살이 이어졌습니다. 무장대의 가족을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이 자행됐습니다. 노인도, 어린이도 예외 없이 살해됐습니다. 토벌을 명목으로 한 무참한 살해는 대부분의 산간마을이 초토화되고 나서야 멎었습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박찬식 전 제주 4.3 연구소 소장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민간인 학살의 역사에서, 어떻게 보면 4.3보다도 먼저 여순이 희생을 본 지역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여순사건을 '모델'로 4.3에 대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력한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여수 '형제묘'와 제주 '백조일손지묘'
남해가 내려다보이는 여수 만성리. 여기에 둥그렇고 커다란 봉분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은 '형제묘'입니다. 1949년 1월, 반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민간인 125명이 한꺼번에 처형된 뒤 불탄 곳이죠.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길이 없던 유족들은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지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비슷한 무덤이 제주에도 있습니다. 서귀포 대정면에 있는 '백조일손지묘'입니다. 6.25 직후 '사상이 불순한 자를 고른다'는 '예비검속'으로 붙잡혀 온 제주도민 132명이 사살됐습니다. 여름날 버려진 시신은 빠르게 썩어들어갔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유족들은 한곳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조상은 백 명[百祖]이라도, 한데 묻힌 자손들은 하나[一孫]라는 의미였습니다.

바다 건너 여수와 제주에 비슷한 형태의 무덤이 모두 있다는 사실은 여순사건과 제주 4.3의 연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여수 만성리 형제묘(왼쪽)와 제주 백조일손지묘(오른쪽).
■ 억울한 군사재판…형무소에서 스러진 넋들

여순사건이 부른 죽음은 제주를 넘어 전국으로 이어집니다. 6.25 직후 일어난 전국 형무소의 학살 사건이 그렇습니다. 앞서 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학살된 민간인들에 대해 말씀드렸죠. 그런데 이렇게 '즉결 처분'을 당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닙니다. 민간인 상당수는 군법에 따른 군사재판을 받았습니다. 내란죄, 국기문란죄, 이런 혐의로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이나 무기징역, 심지어 사형을 받기까지 했죠.

여순사건 관련자들을 마구잡이로 '죄인'으로 만들다 보니, 전국 형무소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1948년 봄 전국 형무소 재소자는 22,000명이었는데, 1950년 1월에는 두 배 넘는 48,000명에까지 이릅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2010)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6.25 전쟁은 비극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른바 '좌익 사범'으로 포화 상태가 된 형무소를 일종의 위협으로 느낀 정부가, 이들을 없애야겠다는 판단을 내린 겁니다.

아직도 유골이 나오고 있는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터.
대표적인 사례가 '대전 산내 학살 사건'입니다. 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군경이 대전형무소 수감자 중 '정치범'들을 모아 놓고 집단 살해했습니다. 형무소에서 화물차로 죄수들을 실어온 뒤 골짜기 주변에 기다란 구덩이 여러 개를 파 놓고 죽여 묻은 겁니다.

2007년부터 발굴이 진행 중인 골령골에서는 지금도 유골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발굴과 진상규명 작업을 벌여오고 있는 전숙자 대전 산내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회장은 "시신이 켜켜이 쌓여 있는 모습으로 묻힌 것이 확인된다. 유골 위에 흙, 그 위에 유골, 그 위에 흙을 겹쳐져 쌓는 식으로 묻어 놓은 것이다. 골령골 골짜기가 완전히 '뼈 밭'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적게는 1,800명, 많게는 7,000명이 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 산내 학살 사건의 희생자 상당수는 여순사건 때문에 형무소에 갇힌 이들입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여순사건 관련자가 최소 천 명 이상 수용돼 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특히 여순사건 재소자들은 제주4.3 등 다른 사건에 비해 대부분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대전뿐 아니라 서울, 인천, 광주, 목포, 전주, 대구 등에서도 6.25 직후 여순 사건 관련자들이 사살됐습니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발견된 유골들.
■ 70년 전 억울함 벗으려…재심 청구한 유족들

하지만 이들이 실형을 받은 근거인 '군사재판'은 불법적 성격이 짙습니다. 무엇보다도 군인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재판을 민간인에게도 적용한 이유는 당시 내려진 '계엄령'이었는데, 이 계엄령 자체가 계엄법도 없이 내려졌습니다. 수사와 재판도 적법하지 않게 이뤄진 정황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올해 1월 여순사건 재심에서 사형을 당한 철도원이 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전 산내 학살 사건의 여순사건 관련 유족 25명이 최근 재판을 다시 해 달라는 '재심'을 청구한 이유입니다. 여순사건으로 부당한 형을 받았고, 이 때문에 목숨을 잃은 가족들에 대해 뒤늦게라도 명예를 회복해 달라는 요구입니다. 김운택 대전 산내유족회 전남지회장은 "엉뚱하게 협력자로 지목을 받아 형님이 대전형무소에서 돌아가셨다"라며 "죄가 없는 사람을 누명 씌워 죽게 했으니, 죄를 벗기 위해 재심 청구를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전 골령골에서 살해된 여순사건 관련 수감자의 군사재판 관련 기록.
기막힌 것은, 재판을 받은 기록이 없는 경우에는 재심조차 청구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군사재판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유족들은 기록이 없다는 건 오히려 사법 처리가 더 불법적으로 이뤄진 정황을 보여준다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마찬가지로 여순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서 아버지를 잃은 유족 김홍기 씨의 말입니다.

"기록이 없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왜 우리 잘못입니까. 잡아갔을 때 기록을 안 했든지, 기록도 없이 사람을 죽인 것인데 이것 때문에 (명예회복이)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 '좌익 몰이'가 부른 보도연맹 학살

수십만 명이 숨진 한국 현대사 최악의 민간인 학살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역시 여순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 전향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관변 단체죠. 여순사건 이후인 1949년 결성됐는데, 좌익 경력자뿐 아니라 이념과 무관한 민간인들까지 가입이 강요되면서 수십만 명으로 규모가 늘었습니다. 이렇게 보도연맹이 대규모 단체가 된 것은 사회 전반에서 이른바 '좌익 몰이'가 이뤄졌기 때문이고, 그 발단은 단연 여순사건이었습니다.

보도연맹원 수천 명이 학살된 경남 경산의 코발트 광산.
6.25가 발생하자 이런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여 사살한 것이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입니다. 전국 산천이 학살지였습니다. 경남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서, 충북 청원의 분터골에서, 전남 여수의 무인도 애기섬에서 보도연맹원들이 무참히 죽어갔습니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6.25 형무소 학살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에서 보듯이, 전쟁이 터지자마자 여순사건 등에 관련된 이들이 대대적으로 처형된 것은 이 사건의 여파가 1950년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순사건은 사건 자체의 피해 규모보다도 훨씬 더 비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잇따른 대량 학살의 게기가 됐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를 피로 물들인 비극의 씨앗이 된 것이죠. 여순사건을 단순한 특정 지역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순사건 72주년 기획보도, 다음 순서에서는 지역을 넘어 역사를 바꿔 놓은 여순사건의 여파에 대해 들여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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