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너머의 여순]④ 현대사 트라우마 여순사건…‘여순 체제’의 그늘

입력 2020.10.2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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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이 올해로 7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어느 지역의 일로만 여겨져 왔습니다. '여수와 순천'이라는 명칭이 붙은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남 전역과 경남 서부 지역, 전북 지역까지 직접 여순사건의 피해를 봤고, 제주 4.3의 무차별 학살과 6.25 직후 형무소·보도연맹 학살에도 연관됐습니다. 여순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인 셈입니다. 여순사건 72주년을 맞아 지역적 한계를 넘어 여순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들여다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합니다.

'국가보안법', 많은 분이 아실 겁니다.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하는 법률. 한때 폐지와 존치 논란이 불붙기도 했었습니다. 북한과의 긴장 상태가 여전한 상황에서 국가 안보를 위해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고 독재정권의 탄압 무기가 됐다며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죠. 여전히 논란이 뜨거운 주제입니다.

■ 국가보안법 제정 계기는 여순사건이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이 생긴 계기가 바로 여순사건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국가보안법 초안이 공개된 건 1948년 11월 3일, 공포는 1948년 12월 1일에 이뤄졌습니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여 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죠. 이렇게 짧은 기간에 통과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순사건이 정권뿐 아니라 입법부를 포함한 전반적인 체제의 위기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2009)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2월 제정된 국가보안법. 당시 국회의 모습입니다.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2월 제정된 국가보안법. 당시 국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제정되자마자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처벌하는 수단으로도 악용됐습니다. 국가보안법 제정 뒤 1년 동안 검거된 사람들은 무려 11만 8천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정부 정책에 어긋나는 목소리를 내면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 현대사를 연구해 온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교 석좌교수는 "공산주의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미국의) 매카시 의원이 그랬던 것처럼 누구든지 목표가 됐다. 국가보안법과 함께 생각해 볼 때, 한국의 매카시즘(반공주의)이 그때 시작됐다고 믿는 것도 놀랍지 않다."라고 국가보안법의 영향을 설명했습니다.

■ '빨갱이'와 '반공주의'의 탄생…"대한민국은 여순체제"

역사 연구자들은 이른바 '빨갱이'에 대한 혐오감 역시 여순사건으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실제 여순사건 이후 사회 전반에서 좌익을 숙청하고 척결하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됩니다. 지역 유지나 우익 인사들까지 좌익 협력자로 간주해 처형된 사례도 있습니다. 군대는 물론 교육계와 법조계까지, 조금이라도 색깔이 달라 보이는 이들이 죄다 솎아졌습니다.

여순사건으로 인해 심한 위기감을 느꼈고, 이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고, 사회 전반에서 '좌익 몰이'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을 오랫동안 규정해 온 '반공주의'가 탄생합니다. '반공',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이죠. 뭔가에 반대한다는 건 완전한 이념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반공주의는 오랜 시간 한국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해 온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반공주의의 배경에 여순사건이 있는 겁니다.

대표적인 ‘좌익 몰이’ 사례인 ‘인혁당 사건’ 당시의 판결 모습입니다.대표적인 ‘좌익 몰이’ 사례인 ‘인혁당 사건’ 당시의 판결 모습입니다.
여순사건을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 주철희 박사는 "이 사건이 미친 영향은 대한민국 전 사회에 걸쳐 있다. 국가가 국민을 감시, 통제,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만들면서 반공 국가와 반공 '문화'를 형성됐고, 여기서 이분법적 사회가 탄생했다"고 평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을 '여순 체제'라고 부르는 이도 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상임위원을 맡았던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대한민국 60년은 여순사건을 기점으로 형성된 '여순 체제 60년'이나 다름없다"며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바로 알려면 반드시 여순사건을 알아야 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도자료, 2009.1.)

■ 반복된 비극의 시초…반성 되지 못한 국가폭력

앞선 기획보도에서 여순사건이 불러일으킨 참혹한 죽음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여순사건의 또 다른 중요성은, 이런 국가폭력의 '모델'이 됐다는 데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먼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저항 세력을 없애고, 계엄령을 근거로 즉결 처분을 일삼고, 왜곡된 군사재판을 통해 처벌합니다.

이런 일련의 국가폭력은 정부 수립 이후 여순사건에서 처음으로 행사됐고, 이후 반복됩니다. 제주 4.3이 그렇고, 6·25 전후 형무소와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그랬습니다. 넓게 보면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역시 여순사건이 만들어 낸 흐름 안에 놓여 있다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남녀 아동까지라도 철저히 조사해 불순분자를 제거하라”고 말했습니다. 여순항쟁 역사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남녀 아동까지라도 철저히 조사해 불순분자를 제거하라”고 말했습니다. 여순항쟁 역사관.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는 "여순사건에서 벌어졌던 국가에 의한 폭력, 민간인에 대한 폭력은 하나의 원형이 됐다. 그것에 대한 대면과 성찰 없이 여순사건을 반란이라는 등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하고 넘어왔기 때문에 국가폭력이 반성 되지 않고 계속됐다. 광주 5.18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고 본다."라고 밝혔습니다.

정부 수립 전후의 혼란기에서 일어난 여순사건은 좌우, 지역을 막론하고 억울한 목숨을 수없이 앗아갔습니다. 그러나 여순사건의 피해는 희생자 수에만 있지 않습니다. 현대사에 짙게 드리운 반공주의와 국가폭력의 시초가 여순사건에 있었던 겁니다. 신생 대한민국은 태어나자마자 여순사건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열악한 조건에서도 열심히 성장했지만, 이면에 어딘가 뒤틀린 모습이 남게 된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현대사의 '트라우마'처럼 작용한 여순사건, 지역의 일이라기에는 그 역사적 영향력은 너무나도 큽니다.

여순사건 72주년 기획보도 '여순 너머의 여순', 다음 시간에는 마지막 순서로 여순사건의 전국적인 조명과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과제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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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순 너머의 여순]④ 현대사 트라우마 여순사건…‘여순 체제’의 그늘
    • 입력 2020-10-22 15:47:58
    취재K

편집자 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이 올해로 7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어느 지역의 일로만 여겨져 왔습니다. '여수와 순천'이라는 명칭이 붙은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남 전역과 경남 서부 지역, 전북 지역까지 직접 여순사건의 피해를 봤고, 제주 4.3의 무차별 학살과 6.25 직후 형무소·보도연맹 학살에도 연관됐습니다. 여순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인 셈입니다. 여순사건 72주년을 맞아 지역적 한계를 넘어 여순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들여다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합니다.

'국가보안법', 많은 분이 아실 겁니다.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하는 법률. 한때 폐지와 존치 논란이 불붙기도 했었습니다. 북한과의 긴장 상태가 여전한 상황에서 국가 안보를 위해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고 독재정권의 탄압 무기가 됐다며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죠. 여전히 논란이 뜨거운 주제입니다.

■ 국가보안법 제정 계기는 여순사건이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이 생긴 계기가 바로 여순사건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국가보안법 초안이 공개된 건 1948년 11월 3일, 공포는 1948년 12월 1일에 이뤄졌습니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여 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죠. 이렇게 짧은 기간에 통과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순사건이 정권뿐 아니라 입법부를 포함한 전반적인 체제의 위기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2009)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2월 제정된 국가보안법. 당시 국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제정되자마자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처벌하는 수단으로도 악용됐습니다. 국가보안법 제정 뒤 1년 동안 검거된 사람들은 무려 11만 8천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정부 정책에 어긋나는 목소리를 내면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 현대사를 연구해 온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교 석좌교수는 "공산주의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미국의) 매카시 의원이 그랬던 것처럼 누구든지 목표가 됐다. 국가보안법과 함께 생각해 볼 때, 한국의 매카시즘(반공주의)이 그때 시작됐다고 믿는 것도 놀랍지 않다."라고 국가보안법의 영향을 설명했습니다.

■ '빨갱이'와 '반공주의'의 탄생…"대한민국은 여순체제"

역사 연구자들은 이른바 '빨갱이'에 대한 혐오감 역시 여순사건으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실제 여순사건 이후 사회 전반에서 좌익을 숙청하고 척결하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됩니다. 지역 유지나 우익 인사들까지 좌익 협력자로 간주해 처형된 사례도 있습니다. 군대는 물론 교육계와 법조계까지, 조금이라도 색깔이 달라 보이는 이들이 죄다 솎아졌습니다.

여순사건으로 인해 심한 위기감을 느꼈고, 이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고, 사회 전반에서 '좌익 몰이'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을 오랫동안 규정해 온 '반공주의'가 탄생합니다. '반공',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이죠. 뭔가에 반대한다는 건 완전한 이념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반공주의는 오랜 시간 한국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해 온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반공주의의 배경에 여순사건이 있는 겁니다.

대표적인 ‘좌익 몰이’ 사례인 ‘인혁당 사건’ 당시의 판결 모습입니다. 여순사건을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 주철희 박사는 "이 사건이 미친 영향은 대한민국 전 사회에 걸쳐 있다. 국가가 국민을 감시, 통제,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만들면서 반공 국가와 반공 '문화'를 형성됐고, 여기서 이분법적 사회가 탄생했다"고 평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을 '여순 체제'라고 부르는 이도 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상임위원을 맡았던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대한민국 60년은 여순사건을 기점으로 형성된 '여순 체제 60년'이나 다름없다"며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바로 알려면 반드시 여순사건을 알아야 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도자료, 2009.1.)

■ 반복된 비극의 시초…반성 되지 못한 국가폭력

앞선 기획보도에서 여순사건이 불러일으킨 참혹한 죽음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여순사건의 또 다른 중요성은, 이런 국가폭력의 '모델'이 됐다는 데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먼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저항 세력을 없애고, 계엄령을 근거로 즉결 처분을 일삼고, 왜곡된 군사재판을 통해 처벌합니다.

이런 일련의 국가폭력은 정부 수립 이후 여순사건에서 처음으로 행사됐고, 이후 반복됩니다. 제주 4.3이 그렇고, 6·25 전후 형무소와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그랬습니다. 넓게 보면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역시 여순사건이 만들어 낸 흐름 안에 놓여 있다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남녀 아동까지라도 철저히 조사해 불순분자를 제거하라”고 말했습니다. 여순항쟁 역사관.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는 "여순사건에서 벌어졌던 국가에 의한 폭력, 민간인에 대한 폭력은 하나의 원형이 됐다. 그것에 대한 대면과 성찰 없이 여순사건을 반란이라는 등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하고 넘어왔기 때문에 국가폭력이 반성 되지 않고 계속됐다. 광주 5.18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고 본다."라고 밝혔습니다.

정부 수립 전후의 혼란기에서 일어난 여순사건은 좌우, 지역을 막론하고 억울한 목숨을 수없이 앗아갔습니다. 그러나 여순사건의 피해는 희생자 수에만 있지 않습니다. 현대사에 짙게 드리운 반공주의와 국가폭력의 시초가 여순사건에 있었던 겁니다. 신생 대한민국은 태어나자마자 여순사건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열악한 조건에서도 열심히 성장했지만, 이면에 어딘가 뒤틀린 모습이 남게 된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현대사의 '트라우마'처럼 작용한 여순사건, 지역의 일이라기에는 그 역사적 영향력은 너무나도 큽니다.

여순사건 72주년 기획보도 '여순 너머의 여순', 다음 시간에는 마지막 순서로 여순사건의 전국적인 조명과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과제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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