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네 애비 전화번호” 초등교사 폭언이 남긴 과제는?

입력 2020.10.25 (11:01) 수정 2020.10.2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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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손찌검 보다는 낫다고?…깊은 트라우마 남기는 '말폭력'
'몰래 한 녹음' 증거 효력은?…정서학대 밝히기 위한 실증적 체계 부족
학대 '사각지대' 내몰린 시골 마을 아이들



■ 말로 베인 상처, '트라우마' 흉터로 남아

전북 고창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가 8살짜리 박 군에게 한 막말입니다. 아이가 들고 있던 녹음기에 고스란히 담겼고, 뉴스를 통해 '그 선생 목소리'가 공개되면서 큰 공분을 일으켰지요. 저희는 피해 아동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4명의 전문가에게 이번 사건의 분석과 상담을 의뢰했습니다. 모두 심각한 '정서학대'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8살 박 군에게 한 폭언초등학교 교사가 8살 박 군에게 한 폭언
비단 말뿐 아닙니다. '탁자를 내리치며 짓는 표정', '벌레 보듯 흘리는 눈빛', 그렇게 만들어진 '공포 분위기'까지, 이 모든 게 '정서학대'입니다. 김리진 전북대 아동학과 교수는 "정서학대는 물리적 폭력처럼 눈에 보이는 상처가 남지 않아, 스스로 인지하는 것도 보호자가 발견하는 것도 힘들다"며 "그만큼 반복될 가능성이 크고, 누적될수록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고 경고했습니다.

심각한 트라우마 남기는 ‘정서학대’심각한 트라우마 남기는 ‘정서학대’

■ 그 정도는 봐줄 수도...?

정서학대가 주는 상처가 결코 신체학대보다 작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말 폭력엔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입니다. 실제 처벌로 이어지는 비율에 이런 관대함이 잘 드러납니다. 지난해 아동보호전문기관에 들어온 아동학대 신고 가운데, 신체학대로 분류된 490건은 경찰 수사를 통해 절반에 가까운 47%가 처벌로 이어진 반면, 869건의 정서학대 가해자는 단 27%만 처벌받았습니다.

최윤경 아동권리보장원 학대예방 담당은 "사회적으로 정서학대는 덜 위험하다는 관점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2014년 아동학대범죄 특례법이 생기며 정서학대 처벌에 대한 근거가 마련됐지만, 여전히 기준이 모호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녹음 파일'처럼 명확한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형사 처분을 위한 수사 자체가 이뤄지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물론 피해자의 진술이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 아동이 너무 어리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제대로 진술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사들에 따르면 학대를 당한 아이들은 "너무 무서웠어요"라는 말만 반복하다 진술을 끝내는 때가 많다고 합니다. 무슨 학대였냐, 몰아세울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정서학대를 벌하기 위한 실증적 체계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물리적 증거 없이 아동의 진술에만 의존해야 한다면 학대의 객관적 평가를 위한 방법론의 연구가 시작돼야 합니다.

■ 몰래 녹음한 '그 선생 목소리'…증거 효력은?

'녹음 파일' 얘기가 나왔으니, 많은 분이 궁금해했던 증거 효력에 대해 짚어보려 합니다. 사례가 있습니다.

먼저 2017년입니다. 대구 한 가정에서 생후 10개월 된 아기가 울자 아동 돌보미가 막말을 쏟아냈습니다. 이런 폭언은 아기 어머니가 집에 몰래 켜둔 녹음기에 그대로 담겼고, 부모는 아동학대 혐의를 주장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무죄를 내렸습니다. 제삼자가 타인의 대화를 몰래 녹음한 파일을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뒤집힙니다. 당시 아동 돌보미가 한 말은 일방적으로 쏟아낸 욕설이고, 10개월 아기와 의사소통을 주고받은 정상적 대화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입니다. 녹음 파일은 증거로 채택됐습니다.

2018년 일도 있습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3학년 학생 부모가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학교를 보냈다가 교사의 학대를 발견했습니다. 교사는 위법한 증거라고 계속 주장했지만, 이 사건 역시
재판부는 유죄를 냈습니다. 3학년 아이가 스스로 법적 이익을 방어할 능력이 없고, 아동학대가 중대 범죄이기 때문에 증거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고 재판부가 인정한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번 고창 사건은 논란의 여지 자체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이걸 눌러" 이렇게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녹음을 박 군이 스스로 했기 때문입니다. 녹음 행위자가 피해 아동이기 때문에, 녹취는 타인 간의 대화가 아닌 직접 대화에 대한 기록이 됩니다. 처음부터 통신비밀보호법 위배를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 학대 '사각지대' 내몰린 시골 마을 아이들

전라북도 아동보호전문기관 현황전라북도 아동보호전문기관 현황
이번 사건은 전북 고창 시골 마을에서 발생했지요. 전라북도의 아동보호전문기관 현황입니다. 각 지역의 숨은 학대를 찾아내고 다친 아이를 치료하는 일을 이곳에서 합니다. 전북에는 4곳이 있는데, 모두 도시에 있습니다. 그럼 나머지 지역에서 난 학대와 피해는 누가 감시하고 보살필까요?

'전북 광역사례관리센터'에서 모아서 합니다. 이곳 직원 17명이 나머지 10개 지역을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적은 인원이 많은 지역을 담당하다 보니, 드러난 사건에 대응하기도 버겁습니다. 학대 사례를 찾아내는 건 당연히 더 어렵습니다. 이처럼 도시에 기관이 몰리고 시골이 소외되는 건 전형적으로 '양'의 논리에 배경을 둔 구조입니다. '아이들이 많은 곳=학대 잦은 곳'으로 계산한 편의주의적 발상인 셈이지요. 아이 100명 사이에서 발생한 10건의 학대와 10명 사이에서 발생한 1건의 학대는 '무게'가 같습니다.

치료를 받는 것도 시골 마을 아이들에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번 고창 사건을 예로 들겠습니다. 사건 직후인 당장은 교육청 지원으로 상담사가 박 군이 사는 시골 마을 집으로 방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례를 분석한 전문가들은 폭언 내용이 잔혹하고 상습성도 의심되는 만큼 장기간의 치료의 필요성을 한목소리로 진단하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상담사의 발길이 끊긴 이후 계속 제대로 된 심리 치료를 받으려면, 박 군은 직접 관련 기관들이 모여있는 도시로 먼 걸음을 해야만 합니다.

이상희 전북아동보호전문기관 팀장은 "물리적 거리와 인프라 때문에 학대 관리가 늦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고백하면서 "시골 마을에도 기본적인 아동학대 사례 관리를 할 수 있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도시 아이도 시골 아이도 학대는 똑같이 아픕니다. 교육 기회를 두고 지리적 불평등이 생긴 지는 오래지만, 적어도 폭력에서 구제받을 기회만큼은 모든 아이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연관기사]
“애비 전화번호 뭐냐고!”…초등학생에게 폭언한 교사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24511

8살배기 손에 쥐여준 녹음기와 ‘그 선생 목소리’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25289

‘교사가 8살 학생에 폭언’…경찰 수사 착수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25522

전문가들 “심각한 수준의 학대, 진심 어린 사과·화해 필요”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29667

손 안 댔으니 괜찮다?…트라우마 큰 ‘언어 폭력’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30648

[심층K] 학대 ‘사각지대’ 내몰린 시골 마을 아이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3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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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네 애비 전화번호” 초등교사 폭언이 남긴 과제는?
    • 입력 2020-10-25 11:01:16
    • 수정2020-10-25 11:01:23
    취재후·사건후
<strong>손찌검 보다는 낫다고?…깊은 트라우마 남기는 '말폭력'<br />'몰래 한 녹음' 증거 효력은?…정서학대 밝히기 위한 실증적 체계 부족<br /></strong><strong>학대 '사각지대' 내몰린 시골 마을 아이들</strong><br />


■ 말로 베인 상처, '트라우마' 흉터로 남아

전북 고창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가 8살짜리 박 군에게 한 막말입니다. 아이가 들고 있던 녹음기에 고스란히 담겼고, 뉴스를 통해 '그 선생 목소리'가 공개되면서 큰 공분을 일으켰지요. 저희는 피해 아동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4명의 전문가에게 이번 사건의 분석과 상담을 의뢰했습니다. 모두 심각한 '정서학대'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8살 박 군에게 한 폭언비단 말뿐 아닙니다. '탁자를 내리치며 짓는 표정', '벌레 보듯 흘리는 눈빛', 그렇게 만들어진 '공포 분위기'까지, 이 모든 게 '정서학대'입니다. 김리진 전북대 아동학과 교수는 "정서학대는 물리적 폭력처럼 눈에 보이는 상처가 남지 않아, 스스로 인지하는 것도 보호자가 발견하는 것도 힘들다"며 "그만큼 반복될 가능성이 크고, 누적될수록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고 경고했습니다.

심각한 트라우마 남기는 ‘정서학대’
■ 그 정도는 봐줄 수도...?

정서학대가 주는 상처가 결코 신체학대보다 작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말 폭력엔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입니다. 실제 처벌로 이어지는 비율에 이런 관대함이 잘 드러납니다. 지난해 아동보호전문기관에 들어온 아동학대 신고 가운데, 신체학대로 분류된 490건은 경찰 수사를 통해 절반에 가까운 47%가 처벌로 이어진 반면, 869건의 정서학대 가해자는 단 27%만 처벌받았습니다.

최윤경 아동권리보장원 학대예방 담당은 "사회적으로 정서학대는 덜 위험하다는 관점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2014년 아동학대범죄 특례법이 생기며 정서학대 처벌에 대한 근거가 마련됐지만, 여전히 기준이 모호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녹음 파일'처럼 명확한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형사 처분을 위한 수사 자체가 이뤄지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물론 피해자의 진술이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 아동이 너무 어리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제대로 진술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사들에 따르면 학대를 당한 아이들은 "너무 무서웠어요"라는 말만 반복하다 진술을 끝내는 때가 많다고 합니다. 무슨 학대였냐, 몰아세울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정서학대를 벌하기 위한 실증적 체계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물리적 증거 없이 아동의 진술에만 의존해야 한다면 학대의 객관적 평가를 위한 방법론의 연구가 시작돼야 합니다.

■ 몰래 녹음한 '그 선생 목소리'…증거 효력은?

'녹음 파일' 얘기가 나왔으니, 많은 분이 궁금해했던 증거 효력에 대해 짚어보려 합니다. 사례가 있습니다.

먼저 2017년입니다. 대구 한 가정에서 생후 10개월 된 아기가 울자 아동 돌보미가 막말을 쏟아냈습니다. 이런 폭언은 아기 어머니가 집에 몰래 켜둔 녹음기에 그대로 담겼고, 부모는 아동학대 혐의를 주장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무죄를 내렸습니다. 제삼자가 타인의 대화를 몰래 녹음한 파일을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뒤집힙니다. 당시 아동 돌보미가 한 말은 일방적으로 쏟아낸 욕설이고, 10개월 아기와 의사소통을 주고받은 정상적 대화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입니다. 녹음 파일은 증거로 채택됐습니다.

2018년 일도 있습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3학년 학생 부모가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학교를 보냈다가 교사의 학대를 발견했습니다. 교사는 위법한 증거라고 계속 주장했지만, 이 사건 역시
재판부는 유죄를 냈습니다. 3학년 아이가 스스로 법적 이익을 방어할 능력이 없고, 아동학대가 중대 범죄이기 때문에 증거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고 재판부가 인정한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번 고창 사건은 논란의 여지 자체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이걸 눌러" 이렇게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녹음을 박 군이 스스로 했기 때문입니다. 녹음 행위자가 피해 아동이기 때문에, 녹취는 타인 간의 대화가 아닌 직접 대화에 대한 기록이 됩니다. 처음부터 통신비밀보호법 위배를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 학대 '사각지대' 내몰린 시골 마을 아이들

전라북도 아동보호전문기관 현황이번 사건은 전북 고창 시골 마을에서 발생했지요. 전라북도의 아동보호전문기관 현황입니다. 각 지역의 숨은 학대를 찾아내고 다친 아이를 치료하는 일을 이곳에서 합니다. 전북에는 4곳이 있는데, 모두 도시에 있습니다. 그럼 나머지 지역에서 난 학대와 피해는 누가 감시하고 보살필까요?

'전북 광역사례관리센터'에서 모아서 합니다. 이곳 직원 17명이 나머지 10개 지역을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적은 인원이 많은 지역을 담당하다 보니, 드러난 사건에 대응하기도 버겁습니다. 학대 사례를 찾아내는 건 당연히 더 어렵습니다. 이처럼 도시에 기관이 몰리고 시골이 소외되는 건 전형적으로 '양'의 논리에 배경을 둔 구조입니다. '아이들이 많은 곳=학대 잦은 곳'으로 계산한 편의주의적 발상인 셈이지요. 아이 100명 사이에서 발생한 10건의 학대와 10명 사이에서 발생한 1건의 학대는 '무게'가 같습니다.

치료를 받는 것도 시골 마을 아이들에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번 고창 사건을 예로 들겠습니다. 사건 직후인 당장은 교육청 지원으로 상담사가 박 군이 사는 시골 마을 집으로 방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례를 분석한 전문가들은 폭언 내용이 잔혹하고 상습성도 의심되는 만큼 장기간의 치료의 필요성을 한목소리로 진단하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상담사의 발길이 끊긴 이후 계속 제대로 된 심리 치료를 받으려면, 박 군은 직접 관련 기관들이 모여있는 도시로 먼 걸음을 해야만 합니다.

이상희 전북아동보호전문기관 팀장은 "물리적 거리와 인프라 때문에 학대 관리가 늦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고백하면서 "시골 마을에도 기본적인 아동학대 사례 관리를 할 수 있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도시 아이도 시골 아이도 학대는 똑같이 아픕니다. 교육 기회를 두고 지리적 불평등이 생긴 지는 오래지만, 적어도 폭력에서 구제받을 기회만큼은 모든 아이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연관기사]
“애비 전화번호 뭐냐고!”…초등학생에게 폭언한 교사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24511

8살배기 손에 쥐여준 녹음기와 ‘그 선생 목소리’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25289

‘교사가 8살 학생에 폭언’…경찰 수사 착수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25522

전문가들 “심각한 수준의 학대, 진심 어린 사과·화해 필요”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29667

손 안 댔으니 괜찮다?…트라우마 큰 ‘언어 폭력’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30648

[심층K] 학대 ‘사각지대’ 내몰린 시골 마을 아이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3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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