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빼고 다 바꿔라”…‘글로벌 삼성’ 일궈낸 이건희

입력 2020.10.25 (21:10) 수정 2020.10.26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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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금부터는 이건희 회장의 공과 과, 짚어보겠습니다.

오늘(25일) 주요 외신들은 대체로 이 회장​​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즈는 "삼성의 기술을 거침없이 끌어올렸다", AP통신은 "이 회장의 절대적인 권위가 삼성을 키웠다", 일본 NHK는 "카리스마 있는 경영자", 이렇게 보도했는데...

이런 평가의 공통점은 이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 이를 바탕으로 한 과감한 혁신이 삼성전자가 반도체와 스마트폰을 통해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겁니다.

먼저 옥유정 기자가 이건희 회장의 공을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삼성이 반도체 사업의 초석을 마련한 건 1974년.

당시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 회장이 부도 위기에 처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부텁니다.

아버지 이병철 전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을 건의했지만 자본도 기술도 없다며 경영진이 반대하자 사재까지 털어 밀어붙였습니다.

이어 1987년, 이건희 회장 체제가 출범하며 본격적으로 꽃을 피웁니다.

92년 세계최초로 64메가 D램 개발에 성공했고, 이듬해엔 메모리반도체 분야 1위를 거머쥐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이 회장은 미국의 전자매장을 둘러보다 충격을 받습니다.

[故 이건희/회장 : "우리의 땀이 밴 수출상품이 세계 시장의 진열대 위에서 먼지가 쌓여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앞서 서글픈 생각마저 듭니다."]

이런 충격은 '변화'와 '혁신'을 내건 신경영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故 이건희/회장/93년 6월 13일/프랑크푸르트 :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봐."]

그리고 이듬해인 94년, 삼성전자는 휴대전화 사업에 진출합니다.

하지만 불량률이 12%까지 치솟자 15만 대, 당시 5백억 원어치를 수거해 직원들 앞에서 불태웠습니다.

이런 충격요법을 거쳐 그해 말 국내시장에서 세계 1위 모토로라를 제쳤습니다.

취임 당시 10조 원이던 삼성전자 매출액은 230조 4천억 원으로 뛰었고, 국내 재계 3위에서 전 세계 5위의 브랜드로 급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닛산과 기술제휴로 시작한 삼성자동차가 IMF 외환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고비도 적지 않았습니다.

KBS 뉴스 옥유정입니다.

영상편집:안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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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 빼고 다 바꿔라”…‘글로벌 삼성’ 일궈낸 이건희
    • 입력 2020-10-25 21:10:02
    • 수정2020-10-26 08:04:30
    뉴스 9
[앵커]

지금부터는 이건희 회장의 공과 과, 짚어보겠습니다.

오늘(25일) 주요 외신들은 대체로 이 회장​​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즈는 "삼성의 기술을 거침없이 끌어올렸다", AP통신은 "이 회장의 절대적인 권위가 삼성을 키웠다", 일본 NHK는 "카리스마 있는 경영자", 이렇게 보도했는데...

이런 평가의 공통점은 이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 이를 바탕으로 한 과감한 혁신이 삼성전자가 반도체와 스마트폰을 통해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겁니다.

먼저 옥유정 기자가 이건희 회장의 공을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삼성이 반도체 사업의 초석을 마련한 건 1974년.

당시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 회장이 부도 위기에 처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부텁니다.

아버지 이병철 전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을 건의했지만 자본도 기술도 없다며 경영진이 반대하자 사재까지 털어 밀어붙였습니다.

이어 1987년, 이건희 회장 체제가 출범하며 본격적으로 꽃을 피웁니다.

92년 세계최초로 64메가 D램 개발에 성공했고, 이듬해엔 메모리반도체 분야 1위를 거머쥐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이 회장은 미국의 전자매장을 둘러보다 충격을 받습니다.

[故 이건희/회장 : "우리의 땀이 밴 수출상품이 세계 시장의 진열대 위에서 먼지가 쌓여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앞서 서글픈 생각마저 듭니다."]

이런 충격은 '변화'와 '혁신'을 내건 신경영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故 이건희/회장/93년 6월 13일/프랑크푸르트 :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봐."]

그리고 이듬해인 94년, 삼성전자는 휴대전화 사업에 진출합니다.

하지만 불량률이 12%까지 치솟자 15만 대, 당시 5백억 원어치를 수거해 직원들 앞에서 불태웠습니다.

이런 충격요법을 거쳐 그해 말 국내시장에서 세계 1위 모토로라를 제쳤습니다.

취임 당시 10조 원이던 삼성전자 매출액은 230조 4천억 원으로 뛰었고, 국내 재계 3위에서 전 세계 5위의 브랜드로 급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닛산과 기술제휴로 시작한 삼성자동차가 IMF 외환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고비도 적지 않았습니다.

KBS 뉴스 옥유정입니다.

영상편집:안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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