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 현대중공업도 꼼짝 못하게 만든 ‘수퍼갑’ 선주의 힘?

입력 2020.11.0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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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방어진의 현대중공업 정문에 서면 건너편에 '현대호텔'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닷가라고 해도 보이는 건 조선소와 주택가뿐인데 호텔을 지은 이유는 선주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척에 수백억 원에서 1천억 원이 넘기도 하는 선박을 주문한 선주는 계약이나 인도 때 조선소를 찾는데, 회사 차원에서는 호텔을 직접 짓고 운영할 정도로 중요한 고객입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이 선주를 극진하게 모시기 위해 법까지 어긴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선주 요구로 특정 납품업체에 30년 넘게 거래하던 업체의 기술도면을 넘겨준 것입니다.


현대중공업이 또 기술유용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았습니다. 올해만 두 번째입니다. 공정위는 하도급업체의 기술자료를 유용한 현대중공업에 시정명령과 과징금 2억4천600만 원을 부과한다고 오늘(1일) 밝혔습니다.

앞서 현대중공업은 선박 엔진의 피스톤 단가 인하를 위해 협력업체인 삼영기계의 기술을 빼앗고 거래를 끊었다가 지난 7월 공정위로부터 기술유용 혐의로는 역대 최대인 9억7천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습니다. 이번에는 배 위에 설치하는 조명기구가 문제였습니다.

■선주 요구에 30년 거래한 협력업체 도면 넘겨

폴라리스쉬핑의  초대형광석운반선(VLOC) (폴라리스쉬핑 홍보영상)폴라리스쉬핑의 초대형광석운반선(VLOC) (폴라리스쉬핑 홍보영상)

현대중공업은 2017년 벌크선을 발주한 폴라리스쉬핑으로부터 "B사에서 선박용 조명을 납품받으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선박용 조명을 한 번도 생산한 적이 없는 신규업체였습니다.

선박용 조명은 엔진의 진동과 풍랑, 해수와 같은 혹독한 환경에 노출돼 일반적 조명기구와 달리 폭발을 방지하기 위한 구조, 높은 조도, 우수한 전기적 안전성이 필요한 부품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중공업은 30년 넘게 A사에서만 납품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에게 선주의 요구는 30년 거래 관계보다 우선순위에 있었습니다. 선박용 조명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B사에 A사의 제작도면을 전달해 조명기구를 제작할 수 있도록 도운 것입니다.

■도면 넘어간 것도 억울한데 단가도 인하

험한 환경에 노출되는 선박 조명은 일반 조명과 달리 고도의 제작기술이 필요하다 (사진 : 현대중공업)험한 환경에 노출되는 선박 조명은 일반 조명과 달리 고도의 제작기술이 필요하다 (사진 : 현대중공업)

A사 입장에서는 국내 유일의 생산기술이 넘어간 것도 억울한 일인데 단가인하를 요구받기도 했습니다. 현대중공업은 한 업체가 독점으로 납품하는 분야보다 경쟁 관계가 형성된 분야에서 단가 인하 목표를 더 높게 잡는데, 자신들이 기술을 넘겨줘 신규업체가 생긴 것을 경쟁 관계가 만들어졌다고 간주한 것입니다.
공정위 조사 결과 현대중공업 내부문건에서 B사가 하도급업체로 등록되기 전 A사에 대한 단가 인하 목표치는 3%였다가 B사 진입 이후에는 5%로 계획을 바꾼 것이 확인됐습니다. 실제로 A사는 B사의 납품 이후 납품단가를 7% 내렸습니다.

현대중공업은 공정위 심의 과정에서 선주의 요청을 받아주려다 발생한 실수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거절하기 힘든 요청이 있었더라도 하도급업체 기술자료를 넘긴 행위가 위법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공정위는 판단했습니다.

■사전 협의 없이 제출받은 기술자료만 293건

선주의 요구로 부당하게 기술자료를 요구한 사례도 적발됐습니다. 현대중공업은 2015년 6월부터 2018년 1월까지 80개 하도급업체에 293건의 기술자료를 요구하면서 법으로 정한 기술자료 요구 서면은 발급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중공업은 자신들이 제작을 승인한 도면(승인도)을 선주에게 전달한 것일 뿐이어서 법적으로 서면을 내줄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공정위는 승인도는 고유 기술이 포함된 자료로 선주에게 전달하기 위해 요구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사전에 서면을 내줘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입찰시스템에 참고하라며 기존 업체 도면 올리기도

'실수'로 저지른 기술유용 행위는 더 있었습니다. 2016년 6월부터 2년여간 선박용 엔진에 들어가는 부품 5개 품목을 입찰하면서 내부 데이터베이스에 갖고 있던 기존 하도급업체의 도면을 발주시스템에 그대로 올린 것입니다. 그 결과 업계 경쟁사들이 기존 업체의 기술과 도면정보를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고, 일부는 기존 하도급업체의 자리를 뺏고 새로 납품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지난달 8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한영석 현대중공업 사장(왼쪽) [연합] 지난달 8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한영석 현대중공업 사장(왼쪽) [연합]

현대중공업은 공정위 조사 과정에서 하도급업체 기술자료 보호를 위해 서면발부 시스템과 입찰 시스템을 개선했습니다. 하지만 공정위의 제재에 대해서는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공정위의 삼영기계 기술탈취 제재 이후 현대중공업 '독자기술 힘센엔진지키기 노동자 모임'에서는 삼영기계를 비난하는 문건을 작성하고 국회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지난달 2년 연속 국회 국정감사에 불려 나온 한영석 현대중공업 사장은 "기술자료라는 정의에 대해 사법부의 판단을 받아보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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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 현대중공업도 꼼짝 못하게 만든 ‘수퍼갑’ 선주의 힘?
    • 입력 2020-11-01 12:01:13
    취재K


울산 방어진의 현대중공업 정문에 서면 건너편에 '현대호텔'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닷가라고 해도 보이는 건 조선소와 주택가뿐인데 호텔을 지은 이유는 선주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척에 수백억 원에서 1천억 원이 넘기도 하는 선박을 주문한 선주는 계약이나 인도 때 조선소를 찾는데, 회사 차원에서는 호텔을 직접 짓고 운영할 정도로 중요한 고객입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이 선주를 극진하게 모시기 위해 법까지 어긴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선주 요구로 특정 납품업체에 30년 넘게 거래하던 업체의 기술도면을 넘겨준 것입니다.


현대중공업이 또 기술유용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았습니다. 올해만 두 번째입니다. 공정위는 하도급업체의 기술자료를 유용한 현대중공업에 시정명령과 과징금 2억4천600만 원을 부과한다고 오늘(1일) 밝혔습니다.

앞서 현대중공업은 선박 엔진의 피스톤 단가 인하를 위해 협력업체인 삼영기계의 기술을 빼앗고 거래를 끊었다가 지난 7월 공정위로부터 기술유용 혐의로는 역대 최대인 9억7천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습니다. 이번에는 배 위에 설치하는 조명기구가 문제였습니다.

■선주 요구에 30년 거래한 협력업체 도면 넘겨

폴라리스쉬핑의  초대형광석운반선(VLOC) (폴라리스쉬핑 홍보영상)
현대중공업은 2017년 벌크선을 발주한 폴라리스쉬핑으로부터 "B사에서 선박용 조명을 납품받으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선박용 조명을 한 번도 생산한 적이 없는 신규업체였습니다.

선박용 조명은 엔진의 진동과 풍랑, 해수와 같은 혹독한 환경에 노출돼 일반적 조명기구와 달리 폭발을 방지하기 위한 구조, 높은 조도, 우수한 전기적 안전성이 필요한 부품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중공업은 30년 넘게 A사에서만 납품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에게 선주의 요구는 30년 거래 관계보다 우선순위에 있었습니다. 선박용 조명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B사에 A사의 제작도면을 전달해 조명기구를 제작할 수 있도록 도운 것입니다.

■도면 넘어간 것도 억울한데 단가도 인하

험한 환경에 노출되는 선박 조명은 일반 조명과 달리 고도의 제작기술이 필요하다 (사진 : 현대중공업)
A사 입장에서는 국내 유일의 생산기술이 넘어간 것도 억울한 일인데 단가인하를 요구받기도 했습니다. 현대중공업은 한 업체가 독점으로 납품하는 분야보다 경쟁 관계가 형성된 분야에서 단가 인하 목표를 더 높게 잡는데, 자신들이 기술을 넘겨줘 신규업체가 생긴 것을 경쟁 관계가 만들어졌다고 간주한 것입니다.
공정위 조사 결과 현대중공업 내부문건에서 B사가 하도급업체로 등록되기 전 A사에 대한 단가 인하 목표치는 3%였다가 B사 진입 이후에는 5%로 계획을 바꾼 것이 확인됐습니다. 실제로 A사는 B사의 납품 이후 납품단가를 7% 내렸습니다.

현대중공업은 공정위 심의 과정에서 선주의 요청을 받아주려다 발생한 실수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거절하기 힘든 요청이 있었더라도 하도급업체 기술자료를 넘긴 행위가 위법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공정위는 판단했습니다.

■사전 협의 없이 제출받은 기술자료만 293건

선주의 요구로 부당하게 기술자료를 요구한 사례도 적발됐습니다. 현대중공업은 2015년 6월부터 2018년 1월까지 80개 하도급업체에 293건의 기술자료를 요구하면서 법으로 정한 기술자료 요구 서면은 발급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중공업은 자신들이 제작을 승인한 도면(승인도)을 선주에게 전달한 것일 뿐이어서 법적으로 서면을 내줄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공정위는 승인도는 고유 기술이 포함된 자료로 선주에게 전달하기 위해 요구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사전에 서면을 내줘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입찰시스템에 참고하라며 기존 업체 도면 올리기도

'실수'로 저지른 기술유용 행위는 더 있었습니다. 2016년 6월부터 2년여간 선박용 엔진에 들어가는 부품 5개 품목을 입찰하면서 내부 데이터베이스에 갖고 있던 기존 하도급업체의 도면을 발주시스템에 그대로 올린 것입니다. 그 결과 업계 경쟁사들이 기존 업체의 기술과 도면정보를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고, 일부는 기존 하도급업체의 자리를 뺏고 새로 납품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지난달 8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한영석 현대중공업 사장(왼쪽) [연합]
현대중공업은 공정위 조사 과정에서 하도급업체 기술자료 보호를 위해 서면발부 시스템과 입찰 시스템을 개선했습니다. 하지만 공정위의 제재에 대해서는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공정위의 삼영기계 기술탈취 제재 이후 현대중공업 '독자기술 힘센엔진지키기 노동자 모임'에서는 삼영기계를 비난하는 문건을 작성하고 국회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지난달 2년 연속 국회 국정감사에 불려 나온 한영석 현대중공업 사장은 "기술자료라는 정의에 대해 사법부의 판단을 받아보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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