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자식은 무슨 죄?…‘동반자살’ 아닌 ‘살해’

입력 2020.11.12 (14:35) 수정 2020.11.1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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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입니다.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가정마다 그 가정만의 사연과 아픔이 있다는 말이죠. 출간 140년이 흐른 지금, 이 명제가 대한민국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뼈아픈 뉴스들을 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생활고 비관한 가족 동반 자살", "두 딸 데리고 극단적 선택한 엄마", "채무 견디다 못한 일가 참변". 이런 일련의 제목들, 안타깝게도 점차 눈에 익어가고 있죠.

지난 6일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북 익산의 한 아파트에서 참변을 당한 채 발견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숨진 사람은 3명. 초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 그리고 이들의 어머니입니다.


당일 오후 5시 30분쯤. 소방 구급대원들이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했을 때 집 안에는 숨진 3명 외에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참변을 당한 가족의 가장인 43살 A 씨. 당시 의식을 잃은 채 한쪽에 쓰러져있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몸 곳곳에 상흔을 입은 채 출혈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실제 소방 구급대원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A 씨의 호흡과 맥박을 확인했는데, 심정지 상태로 판단하고 경찰에 넘겼습니다.


1시간 뒤 현장에 도착한 전북경찰청 과학수사대는 A 씨의 신체를 감식한 결과 중태로 판단하고 구급대원을 재차 호출해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맥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던 A 씨. 차츰 건강을 회복해 경찰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앞서 익산경찰서는 숨진 가족들이 발견된 아파트에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없고 현장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유서가 나온 점 등을 토대로 수사를 벌여왔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A 씨가 가족들을 숨지게 한 뒤 이어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것에 무게를 뒀습니다.

하지만 A 씨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쳤기 때문에 실제 범행이 이뤄졌는지는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사건 발생 나흘째인 지난 10일. 의식을 찾은 A 씨는 범행을 모두 시인했습니다.

수년째 채무 등에 시달리다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기로 아내와 합의했다는 겁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그동안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A 씨와 함께 아내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결국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다 못한 가장이 직접 어린 자녀들을 살해한 뒤 아내를 숨지게 하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한 겁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가족의 극단적 선택을 비롯한 참변은 '동반자살'로 수식됐습니다. 사건이 터진 당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시각은 좀 다릅니다. 이는 부모들의 극단적 선택에 자녀들의 목숨까지 빼앗는 '살해 후 자살', 명백한 범죄라는 지적입니다.

이상열 전북정신건강복지센터장(원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이러한 '자녀 살해' 범행의 추정 동기를 크게 3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이상열 전북정신건강복지센터장(원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이상열 전북정신건강복지센터장(원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첫째는 기본적으로 부모가 자녀를 주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 혹은 부속물로 여겨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왜곡된 인지' 인데요, 이는 부모가 자신의 비관적인 상황만을 인지해 이를 자녀의 미래에도 투영하는 겁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자녀의 미래를 자신과 비슷하게 부정적이거나 혹은 더 암담할 것으로 예상하는 건 비뚤어진 시각입니다.

이 센터장은 마지막으로 부모에게 내재된 극단적 충동을 언급했습니다. 평소 잘 드러나지 않는 정신병질적 성향이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자녀에 대한 가해로 이어진다는 설명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자녀들의 목숨을 빼앗을 권한은 누구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동반자살'로 가장해 무고한 생명을 박탈하는 건 부모의 역할도, 권리도 아닙니다. '범죄'라는 단어 외에는 달리 수식할 말이 없습니다.

톨스토이가 말한 건 불행한 가정마다 다양한 사연을 지녔다는 거였죠.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감당 못할 불행이 닥친다 하더라도 자녀까지 살해하는 극단적 선택이 용납될 순 없습니다.

제 손으로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숨지게 한 혐의를 인정한 40대 가장은 호흡, 맥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심정지 상태였다가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합당한 죗값을 치르는 것일 겁니다.

[연관 기사] 익산 일가족 사건, 명백한 ‘자녀 살해’…수사 이뤄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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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자식은 무슨 죄?…‘동반자살’ 아닌 ‘살해’
    • 입력 2020-11-12 14:35:29
    • 수정2020-11-12 14:36:43
    취재후·사건후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입니다.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가정마다 그 가정만의 사연과 아픔이 있다는 말이죠. 출간 140년이 흐른 지금, 이 명제가 대한민국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뼈아픈 뉴스들을 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생활고 비관한 가족 동반 자살", "두 딸 데리고 극단적 선택한 엄마", "채무 견디다 못한 일가 참변". 이런 일련의 제목들, 안타깝게도 점차 눈에 익어가고 있죠.

지난 6일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북 익산의 한 아파트에서 참변을 당한 채 발견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숨진 사람은 3명. 초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 그리고 이들의 어머니입니다.


당일 오후 5시 30분쯤. 소방 구급대원들이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했을 때 집 안에는 숨진 3명 외에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참변을 당한 가족의 가장인 43살 A 씨. 당시 의식을 잃은 채 한쪽에 쓰러져있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몸 곳곳에 상흔을 입은 채 출혈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실제 소방 구급대원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A 씨의 호흡과 맥박을 확인했는데, 심정지 상태로 판단하고 경찰에 넘겼습니다.


1시간 뒤 현장에 도착한 전북경찰청 과학수사대는 A 씨의 신체를 감식한 결과 중태로 판단하고 구급대원을 재차 호출해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맥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던 A 씨. 차츰 건강을 회복해 경찰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앞서 익산경찰서는 숨진 가족들이 발견된 아파트에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없고 현장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유서가 나온 점 등을 토대로 수사를 벌여왔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A 씨가 가족들을 숨지게 한 뒤 이어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것에 무게를 뒀습니다.

하지만 A 씨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쳤기 때문에 실제 범행이 이뤄졌는지는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사건 발생 나흘째인 지난 10일. 의식을 찾은 A 씨는 범행을 모두 시인했습니다.

수년째 채무 등에 시달리다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기로 아내와 합의했다는 겁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그동안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A 씨와 함께 아내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결국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다 못한 가장이 직접 어린 자녀들을 살해한 뒤 아내를 숨지게 하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한 겁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가족의 극단적 선택을 비롯한 참변은 '동반자살'로 수식됐습니다. 사건이 터진 당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시각은 좀 다릅니다. 이는 부모들의 극단적 선택에 자녀들의 목숨까지 빼앗는 '살해 후 자살', 명백한 범죄라는 지적입니다.

이상열 전북정신건강복지센터장(원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이러한 '자녀 살해' 범행의 추정 동기를 크게 3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이상열 전북정신건강복지센터장(원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첫째는 기본적으로 부모가 자녀를 주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 혹은 부속물로 여겨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왜곡된 인지' 인데요, 이는 부모가 자신의 비관적인 상황만을 인지해 이를 자녀의 미래에도 투영하는 겁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자녀의 미래를 자신과 비슷하게 부정적이거나 혹은 더 암담할 것으로 예상하는 건 비뚤어진 시각입니다.

이 센터장은 마지막으로 부모에게 내재된 극단적 충동을 언급했습니다. 평소 잘 드러나지 않는 정신병질적 성향이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자녀에 대한 가해로 이어진다는 설명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자녀들의 목숨을 빼앗을 권한은 누구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동반자살'로 가장해 무고한 생명을 박탈하는 건 부모의 역할도, 권리도 아닙니다. '범죄'라는 단어 외에는 달리 수식할 말이 없습니다.

톨스토이가 말한 건 불행한 가정마다 다양한 사연을 지녔다는 거였죠.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감당 못할 불행이 닥친다 하더라도 자녀까지 살해하는 극단적 선택이 용납될 순 없습니다.

제 손으로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숨지게 한 혐의를 인정한 40대 가장은 호흡, 맥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심정지 상태였다가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합당한 죗값을 치르는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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