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에 대한 사랑”…지금 ‘전태일 정신’이 필요한 이유

입력 2020.11.13 (09:08) 수정 2020.11.1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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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3일)은 전태일 열사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을 한 지 딱 50년 되는 날입니다. 당시 전 열사의 나이는 22살.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 씨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전 씨는 그날 다른 곳에서 일하다 집에 돌아와서야 오빠의 소식을 들었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땐 오빠는 이미 영안실에 안치된 상태였습니다. 동네 주민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병원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오빠가 사고가 났을 때, 병원에 죽어서 영안실에 있고 그럴 때 안기부나 경찰이 우리 동네에 굉장히 많이 왔어요. 그리고 동네 사람들한테 "요동하지 말고 가지 마라" 했는데 전태일은 옛날에 말하자면 "깡패들처럼 몰려 다니다 일도 안하다가 죽었다" 그러니까, (동네 주민들은) 그전에 오빠가 이야기 하는 걸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아 평화시장에서 이런 일 때문에 태일이가 그렇게 됐구나' 그래서 엄마 친구들,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저씨들이 병원을 다 갔어요. 가지 말라고 하는데도..
-전순옥 인터뷰 中-

어떤 사람들은 전태일 열사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전 씨에게 오빠는 '인생을 즐기는 멋쟁이'였습니다. 어쩌다 한 번 쉬는 날이면 동생들을 이끌고 한강이나 뚝섬에 나갔고, 노래도 불러주고 책도 읽어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동생들에게 책을 사다 주고, 본인이 읽은 책을 동생들에게 이야기해주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전 씨도 오빠가 일하는 평화시장에서 일해본 적이 있습니다. 오전 8시에 일을 시작해서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고된 노동, 누군가 잠깐 움직이기만 해도 휘날리는 먼지들,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작업실. 그곳에서 만난 동료는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사장에게 건강 상태를 숨겨가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 씨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심부름을 나왔다가 집으로 도망가버린 적도 있습니다.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 씨.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 씨.

아버지에게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걸 듣게 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를 설득해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우리에게도 법적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실태조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오빠가 공부를 하면서 바보회도 만들었고, 삼동친목회도 만들었고, 그러면서 친구들에게 "노동법이 있대. 우리는 8시간을 일해야 하고, 월급을 얼마 받아야 하고, 8시간 더 일하게 되면 사용주하고 협의를 해야 하고 시간 외 노동하는 것은 거기에 대한 특근 수당을 줘야하고.."

이런 게 있다는 걸 오빠들 친구에게 말한 거예요. 오빠 친구들은 '그런 게 있나' 오빠 말 듣고 우리 노동시간하고는 어떻게 다른가 전체 설문조사를 했죠. 거기서 뽑아서 보니까 (노동자) 99%가 병을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여러 가지 병을.

설문조사 한 걸 정리해서 노동청에도 가져갔는데, 노동청에서는 완전히 잡상인 취급을 한 거죠. 라디오 방송국에도 찾아가고, 근로감독관에도 편지를 쓰고, 대통령에도 편지를 쓰고 이런 식으로 다 했는데 잘 들어주는 데가 없었어요.
-전순옥 인터뷰 中-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의 삶도 180도 달라졌습니다. 빨리 장례를 치르게 하고 사태를 수습하려던 정부의 요구를 거절한 탓에 끊임없는 감시가 시작됐습니다.

이소선 여사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동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갔습니다. 그러다 경찰서 유치장과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희생은 한국 노동운동의 불꽃이 됐습니다. 시민사회와 노동계를 중심으로 전태일 열사의 뜻을 잇기 위한 투쟁이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1970년대에만 2천 5백여 개의 노동조합이 설립됐습니다.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지만, 내 가족의 희생이어야만 했을까. 전순옥 씨는 "오빠와 같이 살았다면 참 좋았겠다"면서도 "누군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답했습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게 아닌가 생각이 들고, 그렇지만 자식하고 엄마의 관계는 또 다르잖아요.

저희 어머니는 그 이후로 40년 동안 오빠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 우리 앞에서도 울지 않으셨어요. 눈물을 절대 안보이시고, 울고 싶으면 혼자 나가서 우시고.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설 때는 울지 않고, 40년 동안 거리에서 그렇게 투쟁을 하시고 390번이나 경찰서에 잡혀가서 구류로 살고 감옥에는 세 번이나 가서 살고, 그렇게 평생을 그렇게 하신게 내가 죽어서 우리 아들을 만났을 때 "그래도 엄마가 약속을 지켰다. 최선을 다했다" 그런 얘기를 하고 싶으셨던 거 같아요.
-전순옥 인터뷰 中-

전태일 열사 분신 50주기를 앞두고 전태일이 또다시 소환되고 있습니다. 전 씨는 이런 상황에 대해 "지금도 하루에도 7명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다"면서 "오빠가 개선하려고 했던 노동 조건.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는 권리가 아직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노동 문제가 해결되는 날, 전태일의 이름도 잊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 앞에서 취재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전태일 열사의 동료 임현재 씨. 서울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 앞에서 취재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전태일 열사의 동료 임현재 씨.

■"태일이를 만나고 '근로기준법'을 알았습니다"

지난 10일, 전태일 열사의 동료 임현재 씨와 서울 평화시장 앞 전태일다리를 찾았습니다. 자주 이곳을 찾는다는 임 씨는 평소처럼 전태일 열사 동상을 한참 동안 바라봤습니다. 50주기를 앞두고 전태일 열사 동상을 찾은 시민들이 놓고 간 국화도 가지런히 정리했습니다.

임 씨는 1967년 여름 평화시장에서 재단보조 일을 시작했습니다.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힘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지가 가득한 열악한 환경, 생각보다 적은 월급이었지만 '시키는 대로 하고 주는 대로 받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재단사가 되기 위해 공짜로 일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쯤은 참아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작업 시간이 너무 길고, 또 쉬는 날이 하루도 없다시피 하고, 겨울철로 접어들면 옷겹이 두꺼워지기 때문에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수량이 적어지는 만큼 작업시간이 늘어나게 돼요. 그럴 때는 거의 일주일, 열흘, 보름씩 집에도 가지도 못하고 공장에서 자고, 또 일하고 자고. 잠깐 자는거죠. 그렇게 일을 할 때는 정말 힘들었죠.
-임현재 인터뷰 中-

임 씨가 이런 공장 상황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 건 전태일 열사를 만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법으로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보장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보니, 너무나 어린 노동자들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버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이 문제를 개선해 보기로 했습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에 대한 실태 조사 결과가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전태일 열사와 동료들을 감시하는 눈도 많아졌습니다. 잠시나마 노동 환경 개선을 약속했던 사업주와 노동청의 약속이 거짓말이었다는 게 밝혀지자, 전태일 열사와 친구들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준비했습니다.

임 씨는 전태일 열사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임 씨와 동료들은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가기로 다짐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우리한테 남긴 메시지는 유언에 분명하게 나와 있거든요. '내가 굴리다 못굴린 덩이를 자네들이 굴려주게' 그런 그 메시지로. 그에 대한 책임을 엄청 느꼈고, 우리는 어떻게든지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된다.

전태일이 그렇게 사랑했던 시다(보조)들이나 미싱사들이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운동을 해야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때부터 노조를 만들고 그 노조를 육성하고 그 노조 깃발 아래 단결해서 지켜나가도록 하는 일을 했죠.
-임현재 인터뷰 中-


전태일기념관에 전시된 전태일 열사의 사진들전태일기념관에 전시된 전태일 열사의 사진들

■지금 다시, 전태일…2020년 '전태일 정신'이란?

자신의 몸에 불을 당겨가며 부당한 현실을 알린 전태일 열사가 남기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전순옥 씨는 "우리 주변의 아파하는 사람들,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관심"이라면서 "지금은 옆에서 싸우고 누가 매를 맞아도 그냥 지나치고 그러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돌아볼 수 있어야 하는 게 전태일 정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임현재 씨도 전태일 정신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임 씨는 "(전태일 열사는) 나 아닌 다른 사람, 나보다 더 나약한 사람, 약자를 굉장히 사랑했고 거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생각한다"면서 전태일 열사의 풀빵 나눔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시다(보조)들이 점심을 좀 못 먹었더라도 자기 차비를 털어서 풀빵을 사주기는 어렵지 않냐"면서 "사랑이 없으면 못했을 일이었고,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의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처럼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는 주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자신보다 약자인 사람들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던져 가며 열악한 노동 현실을 바꾸고자 했던 그의 죽음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아직도 바뀌지 않은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합니다.

[연관기사][영상] “누구보다 약자를 사랑한 사람”…그들이 기억하는 전태일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47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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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자에 대한 사랑”…지금 ‘전태일 정신’이 필요한 이유
    • 입력 2020-11-13 09:08:33
    • 수정2020-11-13 09:18:21
    취재K

오늘(13일)은 전태일 열사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을 한 지 딱 50년 되는 날입니다. 당시 전 열사의 나이는 22살.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 씨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전 씨는 그날 다른 곳에서 일하다 집에 돌아와서야 오빠의 소식을 들었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땐 오빠는 이미 영안실에 안치된 상태였습니다. 동네 주민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병원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오빠가 사고가 났을 때, 병원에 죽어서 영안실에 있고 그럴 때 안기부나 경찰이 우리 동네에 굉장히 많이 왔어요. 그리고 동네 사람들한테 "요동하지 말고 가지 마라" 했는데 전태일은 옛날에 말하자면 "깡패들처럼 몰려 다니다 일도 안하다가 죽었다" 그러니까, (동네 주민들은) 그전에 오빠가 이야기 하는 걸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아 평화시장에서 이런 일 때문에 태일이가 그렇게 됐구나' 그래서 엄마 친구들,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저씨들이 병원을 다 갔어요. 가지 말라고 하는데도..
-전순옥 인터뷰 中-

어떤 사람들은 전태일 열사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전 씨에게 오빠는 '인생을 즐기는 멋쟁이'였습니다. 어쩌다 한 번 쉬는 날이면 동생들을 이끌고 한강이나 뚝섬에 나갔고, 노래도 불러주고 책도 읽어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동생들에게 책을 사다 주고, 본인이 읽은 책을 동생들에게 이야기해주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전 씨도 오빠가 일하는 평화시장에서 일해본 적이 있습니다. 오전 8시에 일을 시작해서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고된 노동, 누군가 잠깐 움직이기만 해도 휘날리는 먼지들,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작업실. 그곳에서 만난 동료는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사장에게 건강 상태를 숨겨가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 씨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심부름을 나왔다가 집으로 도망가버린 적도 있습니다.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 씨.
아버지에게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걸 듣게 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를 설득해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우리에게도 법적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실태조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오빠가 공부를 하면서 바보회도 만들었고, 삼동친목회도 만들었고, 그러면서 친구들에게 "노동법이 있대. 우리는 8시간을 일해야 하고, 월급을 얼마 받아야 하고, 8시간 더 일하게 되면 사용주하고 협의를 해야 하고 시간 외 노동하는 것은 거기에 대한 특근 수당을 줘야하고.."

이런 게 있다는 걸 오빠들 친구에게 말한 거예요. 오빠 친구들은 '그런 게 있나' 오빠 말 듣고 우리 노동시간하고는 어떻게 다른가 전체 설문조사를 했죠. 거기서 뽑아서 보니까 (노동자) 99%가 병을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여러 가지 병을.

설문조사 한 걸 정리해서 노동청에도 가져갔는데, 노동청에서는 완전히 잡상인 취급을 한 거죠. 라디오 방송국에도 찾아가고, 근로감독관에도 편지를 쓰고, 대통령에도 편지를 쓰고 이런 식으로 다 했는데 잘 들어주는 데가 없었어요.
-전순옥 인터뷰 中-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의 삶도 180도 달라졌습니다. 빨리 장례를 치르게 하고 사태를 수습하려던 정부의 요구를 거절한 탓에 끊임없는 감시가 시작됐습니다.

이소선 여사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동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갔습니다. 그러다 경찰서 유치장과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희생은 한국 노동운동의 불꽃이 됐습니다. 시민사회와 노동계를 중심으로 전태일 열사의 뜻을 잇기 위한 투쟁이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1970년대에만 2천 5백여 개의 노동조합이 설립됐습니다.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지만, 내 가족의 희생이어야만 했을까. 전순옥 씨는 "오빠와 같이 살았다면 참 좋았겠다"면서도 "누군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답했습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게 아닌가 생각이 들고, 그렇지만 자식하고 엄마의 관계는 또 다르잖아요.

저희 어머니는 그 이후로 40년 동안 오빠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 우리 앞에서도 울지 않으셨어요. 눈물을 절대 안보이시고, 울고 싶으면 혼자 나가서 우시고.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설 때는 울지 않고, 40년 동안 거리에서 그렇게 투쟁을 하시고 390번이나 경찰서에 잡혀가서 구류로 살고 감옥에는 세 번이나 가서 살고, 그렇게 평생을 그렇게 하신게 내가 죽어서 우리 아들을 만났을 때 "그래도 엄마가 약속을 지켰다. 최선을 다했다" 그런 얘기를 하고 싶으셨던 거 같아요.
-전순옥 인터뷰 中-

전태일 열사 분신 50주기를 앞두고 전태일이 또다시 소환되고 있습니다. 전 씨는 이런 상황에 대해 "지금도 하루에도 7명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다"면서 "오빠가 개선하려고 했던 노동 조건.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는 권리가 아직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노동 문제가 해결되는 날, 전태일의 이름도 잊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 앞에서 취재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전태일 열사의 동료 임현재 씨.
■"태일이를 만나고 '근로기준법'을 알았습니다"

지난 10일, 전태일 열사의 동료 임현재 씨와 서울 평화시장 앞 전태일다리를 찾았습니다. 자주 이곳을 찾는다는 임 씨는 평소처럼 전태일 열사 동상을 한참 동안 바라봤습니다. 50주기를 앞두고 전태일 열사 동상을 찾은 시민들이 놓고 간 국화도 가지런히 정리했습니다.

임 씨는 1967년 여름 평화시장에서 재단보조 일을 시작했습니다.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힘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지가 가득한 열악한 환경, 생각보다 적은 월급이었지만 '시키는 대로 하고 주는 대로 받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재단사가 되기 위해 공짜로 일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쯤은 참아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작업 시간이 너무 길고, 또 쉬는 날이 하루도 없다시피 하고, 겨울철로 접어들면 옷겹이 두꺼워지기 때문에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수량이 적어지는 만큼 작업시간이 늘어나게 돼요. 그럴 때는 거의 일주일, 열흘, 보름씩 집에도 가지도 못하고 공장에서 자고, 또 일하고 자고. 잠깐 자는거죠. 그렇게 일을 할 때는 정말 힘들었죠.
-임현재 인터뷰 中-

임 씨가 이런 공장 상황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 건 전태일 열사를 만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법으로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보장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보니, 너무나 어린 노동자들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버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이 문제를 개선해 보기로 했습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에 대한 실태 조사 결과가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전태일 열사와 동료들을 감시하는 눈도 많아졌습니다. 잠시나마 노동 환경 개선을 약속했던 사업주와 노동청의 약속이 거짓말이었다는 게 밝혀지자, 전태일 열사와 친구들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준비했습니다.

임 씨는 전태일 열사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임 씨와 동료들은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가기로 다짐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우리한테 남긴 메시지는 유언에 분명하게 나와 있거든요. '내가 굴리다 못굴린 덩이를 자네들이 굴려주게' 그런 그 메시지로. 그에 대한 책임을 엄청 느꼈고, 우리는 어떻게든지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된다.

전태일이 그렇게 사랑했던 시다(보조)들이나 미싱사들이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운동을 해야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때부터 노조를 만들고 그 노조를 육성하고 그 노조 깃발 아래 단결해서 지켜나가도록 하는 일을 했죠.
-임현재 인터뷰 中-


전태일기념관에 전시된 전태일 열사의 사진들
■지금 다시, 전태일…2020년 '전태일 정신'이란?

자신의 몸에 불을 당겨가며 부당한 현실을 알린 전태일 열사가 남기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전순옥 씨는 "우리 주변의 아파하는 사람들,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관심"이라면서 "지금은 옆에서 싸우고 누가 매를 맞아도 그냥 지나치고 그러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돌아볼 수 있어야 하는 게 전태일 정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임현재 씨도 전태일 정신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임 씨는 "(전태일 열사는) 나 아닌 다른 사람, 나보다 더 나약한 사람, 약자를 굉장히 사랑했고 거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생각한다"면서 전태일 열사의 풀빵 나눔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시다(보조)들이 점심을 좀 못 먹었더라도 자기 차비를 털어서 풀빵을 사주기는 어렵지 않냐"면서 "사랑이 없으면 못했을 일이었고,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의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처럼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는 주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자신보다 약자인 사람들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던져 가며 열악한 노동 현실을 바꾸고자 했던 그의 죽음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아직도 바뀌지 않은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합니다.

[연관기사][영상] “누구보다 약자를 사랑한 사람”…그들이 기억하는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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