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1905년 가을과 겨울, 워싱턴에선 무슨 일이?

입력 2020.11.1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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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년 전 1905년 10월 21일. 미국인 헐버트는 서울에서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습니다.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건 20여 일 뒤인 11월 12일. 다음날 곧바로 미국 수도 워싱턴행 기차를 탄 헐버트가 워싱턴에 도착한 건 11월 17일. 우리 땅에서 치욕스러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있던 바로 그 날입니다.

헐버트는 왜 1분 1초의 시간을 다투며 워싱턴으로 갔을까요? 1905년 그해 가을과 겨울, 워싱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을사늑약' 공표 전까지 전달되지 못한 고종 '친서'

헐버트는 워싱턴 도착 이틀 뒤 백악관을 찾습니다. 그의 손에는 고종 황제가 쓴 친서가 있었습니다. 친서에는 일본의 계략을 눈치챈 고종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이를 막아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악관은 어찌 된 일인지 무조건 친서를 받을 수 없다며 면담을 거부합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루프와의 면담 역시 수차례 거부됐습니다.

결국, 친서가 미국 국무부를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된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1월 25일. 백악관과 국무부가 일본이 을사늑약을 공표할 때까지 친서 전달을 고의로 지연시키면서 시간을 끌었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헐버트의 미국행을 알고 을사늑약 처리를 서둘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종의 전보…미국 정부의 냉대

좌절에 빠져있던 헐버트는 12월 11일 고종 황제로부터 한 통의 전보를 받습니다. 전보에는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내용과 미국과 협의해 조약의 무효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곧장 미국 국무부에 전보를 전달하지만, 국무부 차관인 베이컨은 '모든 상황이 끝났다. 단지 파일만 해놓겠다'고 잘라 말하며 더는 대화를 거부합니다.

여론전 돌입…뉴욕타임스 12월 13일 자 기사

미국 정부로부터 싸늘한 박대만 받은 헐버트는 이제 언론을 통한 여론전으로 계획을 전환합니다. 다음은 <대한제국, 조약을 부인하다>는 제목의 1905년 12월 13일 자 <뉴욕타임스> 기사입니다.

뉴욕타임스 1905년 12월 13일 자 기사 (제공: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뉴욕타임스 1905년 12월 13일 자 기사 (제공: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기사는 "대한제국 황제의 특별사절인 미국인 헐버트는 대한제국 황제가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 무력에 의해 맺어졌기에 무효라고 선언했다는 전보를 받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어 "대한제국 황제는 지금의 조약 문구로는 앞으로 절대 서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라고 소개합니다. 을사늑약이 무력에 의한 것으로, 고종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사는 또, 헐버트와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해 "대한제국 황제는 몇 주 동안 사실상 감금 상태에 있었다. 일본은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조약이 우호적 분위기에서 맺어졌다고 거짓 성명을 발표했지만 이제 일본의 성명이 거짓임이 드러난 것 아닌가. 조약은 협박과 총칼로 위협해 맺어졌다"고 밝힙니다. 대한제국 황제의 처지와 을사늑약을 둘러싼 진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기사는 이어 "대한제국 황제가 일본의 배신적 행위를 예견하고 이를 미연에 막아보고자 본인(헐버트)을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호소하고자 했지만, 서울에서 일본의 쿠데타는 본인(헐버트)이 워싱턴에 도착하던 바로 그 날 전격적으로 감행됐다"고 말합니다.


미국 정부 노골적 비판…뉴욕타임스 12월 14일 자 기사

헐버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인 뉴욕타임스와 또 한 차례 인터뷰를 합니다. 뉴욕타임스는 12월 14일 자 신문에서 전날보다 지면을 더 할애해 장문의 기사로 이를 소개합니다.

제목은 <한국 황제를 위한 미국 국민에 대한 호소>입니다.

뉴욕타임스 1905년 12월 14일 자 기사 (제공: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뉴욕타임스 1905년 12월 14일 자 기사 (제공: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헐버트는 뉴욕타임스와 두 번째 인터뷰에서는 미국 정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합니다. 기사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인(헐버트)은 1905년 11월 20일(월요일) 백악관을 찾아가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백악관은 본인에게 대통령에 대한 호소는 국무부를 통하라고 했다. 국무부를 방문했지만, 모욕적인 대접만을 받았다. 국무장관을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국무부 주변에서 이틀 동안이나 빈둥댈 수밖에 없었다.

참다못해 본인은 국무부 관리들에게 대한제국 황제의 특사를 하인 대하듯 기다리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본인이 국무장관을 만날 수 있는지 없는지 분명한 답변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금요일에 면담 약속이 잡혔다.

국무장관은, 미국 정부는 대한제국 황제와 일본의 전권대사 간에 맺어진 조약에 대한 본인의 항의 제기에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다고 통고했다. 이러한 통고는 미국 대통령과 국무부의 개입을 요구하는 본인의 방문 목적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당시 미국 정부가 고종의 특사인 헐버트를 박대한 상황이 고스란히 기술돼 있습니다. 헐버트는 이 기사에서 대한제국이 독립적 주권국가라는 점과 미국이 을사늑약 무효화를 위해 왜 나서야 하는지도 논리적으로 따져 묻습니다.

"본인(헐버트)이 워싱턴에 도착할 때까지 대한제국과 일본은 미국 정부에 대해 똑같은 외교적 위치에 있었다. 두 나라는 각각 독립적 주권국가였으며, 각각 공식적으로 임명돼 신임장을 교환한 외교 공사가 주재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대한제국 공사관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본의 성명만 믿고 서울의 미국 공사관을 도쿄로 옮겨버렸다. 세상천지에 주권국가가 이렇게 모욕적인 대접을 받은 적이 있단 말인가? 대한제국은 약자다. 공평한 거래는 강한 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대한제국과 미국 간의 조약에 따르면 미국은 어느 강대국이 대한제국을 부당하게 간섭한다면 미국이 대한제국을 위해 개입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미국은 지금 이 조항을 이행하고 있는가?"

기사는 헐버트의 말을 인용해, 민영환이 대한제국 주권 상실에 대한 분노로 자결한 사건과 일본이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한 사실, 을사늑약이 날조됐고, 조약에 찍힌 어새도 도둑맞은 사실 등도 담고 있습니다.

또 헐버트가 고종에게 답신 전보를 친 내용도 소개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나(헐버트)는 오늘 대한제국 황제에게 한일 간의 조약과 관련해 미국의 개입에 대한 희망은 미국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길밖에 없으며, 본인(헐버트)은 미국에 도착한 이래 지금까지 대한제국의 현실에 대한 발표를 유보해왔으나 이제 그 유보를 깨겠다."

미국 정부를 더는 신뢰할 수 없으니, 미국 국민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이를 무효화하기 위한 여론전을 본격적으로 펼치겠다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기사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헐버트 특사에 따르면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지배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일본에 종속된 존재로 여겨, 한국인들에게는 어떠한 인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두 건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당시 대한제국에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상황과 헐버트의 비밀 임무, 또 을사늑약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고종의 고민, 이를 미국 현지에서 발로 뛰며 실행에 옮기려 한 헐버트의 눈물겨운 노력이 담긴 귀중한 자료들입니다.

특히 12월 14일 자 기사의 전문이 언론에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헐버트는 누구?

그 누구보다 한국의 독립을 염원한 헐버트. 그는 조선 말기인 1886년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파견된 영어교사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쓴 교육학자이자 한글학자, 언어학자로도 알려졌습니다. 사민필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한글로 쓸 만큼 한글에 대한 사랑이 커,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기고문을 미국 <뉴욕 트리뷴> 신문에 쓰기도 했습니다.

숨겨진 4번째 헤이그 특사로도 알려졌으며, 1907년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났지만, 미국에서도 38년을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1949년 40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은 헐버트는 도착 1주일 만에 한국 땅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유언대로 마포나루 양화진에 잠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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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욕의 1905년 가을과 겨울, 워싱턴에선 무슨 일이?
    • 입력 2020-11-16 13:38:16
    취재K
115년 전 1905년 10월 21일. 미국인 헐버트는 서울에서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습니다.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건 20여 일 뒤인 11월 12일. 다음날 곧바로 미국 수도 워싱턴행 기차를 탄 헐버트가 워싱턴에 도착한 건 11월 17일. 우리 땅에서 치욕스러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있던 바로 그 날입니다.

헐버트는 왜 1분 1초의 시간을 다투며 워싱턴으로 갔을까요? 1905년 그해 가을과 겨울, 워싱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을사늑약' 공표 전까지 전달되지 못한 고종 '친서'

헐버트는 워싱턴 도착 이틀 뒤 백악관을 찾습니다. 그의 손에는 고종 황제가 쓴 친서가 있었습니다. 친서에는 일본의 계략을 눈치챈 고종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이를 막아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악관은 어찌 된 일인지 무조건 친서를 받을 수 없다며 면담을 거부합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루프와의 면담 역시 수차례 거부됐습니다.

결국, 친서가 미국 국무부를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된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1월 25일. 백악관과 국무부가 일본이 을사늑약을 공표할 때까지 친서 전달을 고의로 지연시키면서 시간을 끌었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헐버트의 미국행을 알고 을사늑약 처리를 서둘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종의 전보…미국 정부의 냉대

좌절에 빠져있던 헐버트는 12월 11일 고종 황제로부터 한 통의 전보를 받습니다. 전보에는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내용과 미국과 협의해 조약의 무효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곧장 미국 국무부에 전보를 전달하지만, 국무부 차관인 베이컨은 '모든 상황이 끝났다. 단지 파일만 해놓겠다'고 잘라 말하며 더는 대화를 거부합니다.

여론전 돌입…뉴욕타임스 12월 13일 자 기사

미국 정부로부터 싸늘한 박대만 받은 헐버트는 이제 언론을 통한 여론전으로 계획을 전환합니다. 다음은 <대한제국, 조약을 부인하다>는 제목의 1905년 12월 13일 자 <뉴욕타임스> 기사입니다.

뉴욕타임스 1905년 12월 13일 자 기사 (제공: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기사는 "대한제국 황제의 특별사절인 미국인 헐버트는 대한제국 황제가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 무력에 의해 맺어졌기에 무효라고 선언했다는 전보를 받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어 "대한제국 황제는 지금의 조약 문구로는 앞으로 절대 서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라고 소개합니다. 을사늑약이 무력에 의한 것으로, 고종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사는 또, 헐버트와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해 "대한제국 황제는 몇 주 동안 사실상 감금 상태에 있었다. 일본은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조약이 우호적 분위기에서 맺어졌다고 거짓 성명을 발표했지만 이제 일본의 성명이 거짓임이 드러난 것 아닌가. 조약은 협박과 총칼로 위협해 맺어졌다"고 밝힙니다. 대한제국 황제의 처지와 을사늑약을 둘러싼 진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기사는 이어 "대한제국 황제가 일본의 배신적 행위를 예견하고 이를 미연에 막아보고자 본인(헐버트)을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호소하고자 했지만, 서울에서 일본의 쿠데타는 본인(헐버트)이 워싱턴에 도착하던 바로 그 날 전격적으로 감행됐다"고 말합니다.


미국 정부 노골적 비판…뉴욕타임스 12월 14일 자 기사

헐버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인 뉴욕타임스와 또 한 차례 인터뷰를 합니다. 뉴욕타임스는 12월 14일 자 신문에서 전날보다 지면을 더 할애해 장문의 기사로 이를 소개합니다.

제목은 <한국 황제를 위한 미국 국민에 대한 호소>입니다.

뉴욕타임스 1905년 12월 14일 자 기사 (제공: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헐버트는 뉴욕타임스와 두 번째 인터뷰에서는 미국 정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합니다. 기사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인(헐버트)은 1905년 11월 20일(월요일) 백악관을 찾아가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백악관은 본인에게 대통령에 대한 호소는 국무부를 통하라고 했다. 국무부를 방문했지만, 모욕적인 대접만을 받았다. 국무장관을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국무부 주변에서 이틀 동안이나 빈둥댈 수밖에 없었다.

참다못해 본인은 국무부 관리들에게 대한제국 황제의 특사를 하인 대하듯 기다리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본인이 국무장관을 만날 수 있는지 없는지 분명한 답변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금요일에 면담 약속이 잡혔다.

국무장관은, 미국 정부는 대한제국 황제와 일본의 전권대사 간에 맺어진 조약에 대한 본인의 항의 제기에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다고 통고했다. 이러한 통고는 미국 대통령과 국무부의 개입을 요구하는 본인의 방문 목적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당시 미국 정부가 고종의 특사인 헐버트를 박대한 상황이 고스란히 기술돼 있습니다. 헐버트는 이 기사에서 대한제국이 독립적 주권국가라는 점과 미국이 을사늑약 무효화를 위해 왜 나서야 하는지도 논리적으로 따져 묻습니다.

"본인(헐버트)이 워싱턴에 도착할 때까지 대한제국과 일본은 미국 정부에 대해 똑같은 외교적 위치에 있었다. 두 나라는 각각 독립적 주권국가였으며, 각각 공식적으로 임명돼 신임장을 교환한 외교 공사가 주재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대한제국 공사관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본의 성명만 믿고 서울의 미국 공사관을 도쿄로 옮겨버렸다. 세상천지에 주권국가가 이렇게 모욕적인 대접을 받은 적이 있단 말인가? 대한제국은 약자다. 공평한 거래는 강한 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대한제국과 미국 간의 조약에 따르면 미국은 어느 강대국이 대한제국을 부당하게 간섭한다면 미국이 대한제국을 위해 개입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미국은 지금 이 조항을 이행하고 있는가?"

기사는 헐버트의 말을 인용해, 민영환이 대한제국 주권 상실에 대한 분노로 자결한 사건과 일본이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한 사실, 을사늑약이 날조됐고, 조약에 찍힌 어새도 도둑맞은 사실 등도 담고 있습니다.

또 헐버트가 고종에게 답신 전보를 친 내용도 소개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나(헐버트)는 오늘 대한제국 황제에게 한일 간의 조약과 관련해 미국의 개입에 대한 희망은 미국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길밖에 없으며, 본인(헐버트)은 미국에 도착한 이래 지금까지 대한제국의 현실에 대한 발표를 유보해왔으나 이제 그 유보를 깨겠다."

미국 정부를 더는 신뢰할 수 없으니, 미국 국민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이를 무효화하기 위한 여론전을 본격적으로 펼치겠다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기사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헐버트 특사에 따르면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지배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일본에 종속된 존재로 여겨, 한국인들에게는 어떠한 인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두 건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당시 대한제국에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상황과 헐버트의 비밀 임무, 또 을사늑약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고종의 고민, 이를 미국 현지에서 발로 뛰며 실행에 옮기려 한 헐버트의 눈물겨운 노력이 담긴 귀중한 자료들입니다.

특히 12월 14일 자 기사의 전문이 언론에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헐버트는 누구?

그 누구보다 한국의 독립을 염원한 헐버트. 그는 조선 말기인 1886년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파견된 영어교사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쓴 교육학자이자 한글학자, 언어학자로도 알려졌습니다. 사민필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한글로 쓸 만큼 한글에 대한 사랑이 커,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기고문을 미국 <뉴욕 트리뷴> 신문에 쓰기도 했습니다.

숨겨진 4번째 헤이그 특사로도 알려졌으며, 1907년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났지만, 미국에서도 38년을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1949년 40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은 헐버트는 도착 1주일 만에 한국 땅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유언대로 마포나루 양화진에 잠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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