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경험 알려주겠다”…후배 강간 혐의 해군 장교 무죄, 그후 2년

입력 2020.11.1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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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로 스스로를 책망하며 참 많은 날들을 허비했습니다. 되려 피해자답지 않아 괘씸했던걸까…. 너무도 괴로웠지만 그래도 지난 2년, 켜켜이 일상을 살아내고 주어진 직무에 최선을 다하며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해군성폭력사건 유죄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피해자 서면 발언 중)

2010년, 해군 소속 여성 중위가 상관 2명과 원치 않는 성관계를 했습니다. 첫 근무지로 배치된 지 4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피해자는 이 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다 2016년 군 수사관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습니다. 2년 뒤인 2018년,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은 가해자로 지목된 두 해군 장교들에게 잇따라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연관 기사] ‘부하 여군 성폭행 혐의’ 해군 장교 2심서 잇따라 무죄(2018.11.20. KBS1TV)

올해는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가해자들이 무죄를 선고받은 지는 2년째 되는 해입니다. 피해자를 지원하고 정확한 사건 규명을 촉구하겠다는 취지로 결성된 '해군 상관에 의한 성 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오늘(19일) 오전 서울 서초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이 부당한 판결을 바로잡아달라며 호소했습니다.

■ "남자 경험 알려주겠다"…10년 전 무슨 일이

10년 전, 해군 1함대 중위로 갓 임관한 피해자는 직속상관인 박 모 소령과 의례적인 신상면담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박 소령에게 자신이 성 소수자임을 고백했습니다. 성소수자로서 겪게 될 불합리한 처우를 예상했지만, 떳떳하게 '나 자신으로서' 복무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고백했다고 피해자는 주장합니다.

이후 박 소령은 후배인 피해자에게 '남자랑 관계를 안 해 봐서 그런 것이다', '남자 경험을 알려주겠다'며 성폭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일로 피해자는 임신하게 됐고, 중절수술을 받았습니다. 피해자는 수술 사실을 또 다른 상관인 김 모 대령에게 알렸고, 이후 김 대령은 '위로를 해주겠다'는 취지로 피해자를 불러 또다시 성폭행을 가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2018년 5월, 해군본부 보통군사법원은 박 소령에게 징역 10년형, 김 대령에게는 징역 8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여섯 달 뒤 항소심을 맡은 고등군사법원은 원심을 뒤집고 이들에게 각각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대법원으로 넘겨진 사건은, 2년째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2018.11.20 KBS1TV 뉴스광장 2018.11.20 KBS1TV 뉴스광장

■ 성관계 사실 인정하지만 무죄?…"위력은 그 자체로 폭행"

그렇다면 2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재판부는 상관들과 피해자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다는 건 인정하면서도,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남성인 가해자가 저녁에 독신 숙소로 불렀을 때 여성인 피해자가 이에 응했다면 찾아갈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피해자의 '성적지향'은 물론 군대 조직의 '상명하복' 문화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장교 양성 교육을 마친 뒤 처음으로 근무하게 된 피해자가 상사에게 쉽게 저항할 수 없을뿐더러, 한번 항해하면 20일 이상을 바다 위 좁은 함장 안에서 직속상관과 함께 있어야 하는 근무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박지영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상관의 명령이 불가침인 군대에서 위력은 그 자체로 폭행 협박과 같다"며 "대법원은 가해자들과 피해자의 명백한 권력관계, 피해자가 성 소수자였던 점, 피해자가 최고 책임자였던 함장(김 대령)에게 직속상관에 의한 피해 사실을 고발했으나 다시 피해를 보게 된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죄 판결 뒤, 가해자인 박 소령과 김 대령은 즉각 해군에 복직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군은 이들을 기소 휴직 처리해 군 신분을 유지해 둔 상태입니다. 고등군사법원의 무죄 판결을 규탄하고 대법원의 원심 파기 결단을 촉구하는 탄원서에는 13일 기준, 만 3천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오늘(19일) 오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해군 성폭력 사건 유죄 판결을 위한 기자회견’오늘(19일) 오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해군 성폭력 사건 유죄 판결을 위한 기자회견’

■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멈춰버린 군대의 시간

군 조직 안에서 피해자가 쉽게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9년 국방부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 중 성폭력 피해를 기관에 신고한 비율은 32.7%였습니다. 보고하지 않은 이유로 응답자의 44%가 ‘아무 조치도 취해질 것 같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실제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송기헌 의원실에서 지난달 발표한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성폭력 관련 범죄로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909명 중 장교 신분으로 재판을 받은 사람은 119명입니다. 이중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단 9명에 그쳤습니다.

김은경 젊은여군포럼 대표는 "이번 사건 피해자도 상관들이 진급 등 인사상 불이익을 줄 것을 우려해 7년이라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신고한 경우"라면서 "피해자가 겪는 험난한 진술 과정과 대법원 판결까지 오래 기다리는 상황을 보며 ‘신고해서 법정 싸움까지 가기보다는 조용히 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여군 사이에서 번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피해자는 현재 해군이 아닌 다른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성폭력 혐의 해군 장교 무죄 2년'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는 서면으로 발언문을 보내왔습니다. 발언문 말미, 피해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관심 병사로 분류되고, 약한 고리로 취급받으며 조직을 떠나야 했던 피해 생존자들이 기꺼이 군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희망과 역량껏 일할 수 있길, 피 끓는 마음을 혼자 삭이거나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언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고, 함께 이겨내는 생존자로 살아갈 수 있길, 국민에게 신뢰받는 자랑스러운 군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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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자 경험 알려주겠다”…후배 강간 혐의 해군 장교 무죄, 그후 2년
    • 입력 2020-11-19 14:48:36
    취재K

“고소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로 스스로를 책망하며 참 많은 날들을 허비했습니다. 되려 피해자답지 않아 괘씸했던걸까…. 너무도 괴로웠지만 그래도 지난 2년, 켜켜이 일상을 살아내고 주어진 직무에 최선을 다하며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해군성폭력사건 유죄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피해자 서면 발언 중)

2010년, 해군 소속 여성 중위가 상관 2명과 원치 않는 성관계를 했습니다. 첫 근무지로 배치된 지 4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피해자는 이 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다 2016년 군 수사관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습니다. 2년 뒤인 2018년,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은 가해자로 지목된 두 해군 장교들에게 잇따라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연관 기사] ‘부하 여군 성폭행 혐의’ 해군 장교 2심서 잇따라 무죄(2018.11.20. KBS1TV)

올해는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가해자들이 무죄를 선고받은 지는 2년째 되는 해입니다. 피해자를 지원하고 정확한 사건 규명을 촉구하겠다는 취지로 결성된 '해군 상관에 의한 성 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오늘(19일) 오전 서울 서초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이 부당한 판결을 바로잡아달라며 호소했습니다.

■ "남자 경험 알려주겠다"…10년 전 무슨 일이

10년 전, 해군 1함대 중위로 갓 임관한 피해자는 직속상관인 박 모 소령과 의례적인 신상면담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박 소령에게 자신이 성 소수자임을 고백했습니다. 성소수자로서 겪게 될 불합리한 처우를 예상했지만, 떳떳하게 '나 자신으로서' 복무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고백했다고 피해자는 주장합니다.

이후 박 소령은 후배인 피해자에게 '남자랑 관계를 안 해 봐서 그런 것이다', '남자 경험을 알려주겠다'며 성폭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일로 피해자는 임신하게 됐고, 중절수술을 받았습니다. 피해자는 수술 사실을 또 다른 상관인 김 모 대령에게 알렸고, 이후 김 대령은 '위로를 해주겠다'는 취지로 피해자를 불러 또다시 성폭행을 가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2018년 5월, 해군본부 보통군사법원은 박 소령에게 징역 10년형, 김 대령에게는 징역 8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여섯 달 뒤 항소심을 맡은 고등군사법원은 원심을 뒤집고 이들에게 각각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대법원으로 넘겨진 사건은, 2년째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2018.11.20 KBS1TV 뉴스광장
■ 성관계 사실 인정하지만 무죄?…"위력은 그 자체로 폭행"

그렇다면 2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재판부는 상관들과 피해자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다는 건 인정하면서도,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남성인 가해자가 저녁에 독신 숙소로 불렀을 때 여성인 피해자가 이에 응했다면 찾아갈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피해자의 '성적지향'은 물론 군대 조직의 '상명하복' 문화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장교 양성 교육을 마친 뒤 처음으로 근무하게 된 피해자가 상사에게 쉽게 저항할 수 없을뿐더러, 한번 항해하면 20일 이상을 바다 위 좁은 함장 안에서 직속상관과 함께 있어야 하는 근무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박지영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상관의 명령이 불가침인 군대에서 위력은 그 자체로 폭행 협박과 같다"며 "대법원은 가해자들과 피해자의 명백한 권력관계, 피해자가 성 소수자였던 점, 피해자가 최고 책임자였던 함장(김 대령)에게 직속상관에 의한 피해 사실을 고발했으나 다시 피해를 보게 된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죄 판결 뒤, 가해자인 박 소령과 김 대령은 즉각 해군에 복직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군은 이들을 기소 휴직 처리해 군 신분을 유지해 둔 상태입니다. 고등군사법원의 무죄 판결을 규탄하고 대법원의 원심 파기 결단을 촉구하는 탄원서에는 13일 기준, 만 3천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오늘(19일) 오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해군 성폭력 사건 유죄 판결을 위한 기자회견’
■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멈춰버린 군대의 시간

군 조직 안에서 피해자가 쉽게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9년 국방부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 중 성폭력 피해를 기관에 신고한 비율은 32.7%였습니다. 보고하지 않은 이유로 응답자의 44%가 ‘아무 조치도 취해질 것 같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실제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송기헌 의원실에서 지난달 발표한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성폭력 관련 범죄로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909명 중 장교 신분으로 재판을 받은 사람은 119명입니다. 이중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단 9명에 그쳤습니다.

김은경 젊은여군포럼 대표는 "이번 사건 피해자도 상관들이 진급 등 인사상 불이익을 줄 것을 우려해 7년이라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신고한 경우"라면서 "피해자가 겪는 험난한 진술 과정과 대법원 판결까지 오래 기다리는 상황을 보며 ‘신고해서 법정 싸움까지 가기보다는 조용히 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여군 사이에서 번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피해자는 현재 해군이 아닌 다른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성폭력 혐의 해군 장교 무죄 2년'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는 서면으로 발언문을 보내왔습니다. 발언문 말미, 피해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관심 병사로 분류되고, 약한 고리로 취급받으며 조직을 떠나야 했던 피해 생존자들이 기꺼이 군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희망과 역량껏 일할 수 있길, 피 끓는 마음을 혼자 삭이거나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언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고, 함께 이겨내는 생존자로 살아갈 수 있길, 국민에게 신뢰받는 자랑스러운 군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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