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킥보드, 시각장애인에겐 지뢰입니다”

입력 2020.11.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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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문제다

인도와 지하철역 주변, 정류장 인근과 건널목 앞, 심지어 골목 곳곳까지…. 요즘 어디서나 눈에 띄는 물건, 바로 '전동킥보드'입니다. 앱을 이용해 전동킥보드를 쉽게 빌리고 반납할 수 있다 보니, 일단 이용한 뒤 여기저기에 킥보드를 세워놓고 가버리는 경우가 많아진 겁니다.

이 때문에 인도를 걷던 시민들이 길 한가운데 세워진 전동킥보드를 피해 다니는 불편한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겐, 이렇게 아무 데나 세워진 전동킥보드가 단순히 불편함을 넘어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라는 시각장애인의 얘기, 함께 거리를 걸으며 들어봤습니다.

■성인 발목 높이 '전동킥보드', 걸리면 대부분 넘어져

중증 시각장애인 이차용 씨는 두 달 전 길을 걷다 넘어져 치아가 깨졌습니다. 평소 지팡이로 점자블록(유도블록)을 짚으며 길을 찾곤 하는데, 그날도 평소처럼 걷다 점자블록 위에 주차된 전동킥보드에 걸려 넘어진 겁니다. 실제로 이 씨와 한 시간 동안 서울 광진구 일대를 걷는 동안 점자블록 위에 세워진 킥보드를 석 대나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씨는 "점자블록에 전동킥보드가 있다는 것 자체를 상상 못 했다"면서 "물체가 앞에 있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앞으로 쏠려 크게 넘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허리 높이까지 오는 자전거와 달리, 전동킥보드는 딱 성인 발목만큼의 높이입니다. 누구라도 발목에 걸리는 순간, 부딪치는 것에 끝나지 않고 대부분 넘어지게 되는 겁니다.

워낙 낮은 높이 탓에 몸체를 지팡이로 구분하기도 힘듭니다. 이 씨는 "자전거나 오토바이처럼 높은 물체는 지팡이 끝 부분이 중간에 걸리는데, 킥보드처럼 낮은 것들은 지팡이로 건드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최근에는 역 주변이나 건널목 뿐 아니라 점자블록 위까지 킥보드가 주차돼있어 집 나설 때마다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라고 호소했습니다.

이차용 씨가 취재진에게 점자블록 위에 세워진 전동킥보드를 잘 인지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차용 씨가 취재진에게 점자블록 위에 세워진 전동킥보드를 잘 인지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소리 없이 빠르게 달려와…"못 알아챈다"

조용한 맹수처럼, 소리 없이 빠르게 다가온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은 걸을 때 지팡이로 느껴지는 촉각과 귀로 들리는 소리에 신경을 집중합니다. 자동차나 자전거, 오토바이의 경우엔 소리로 금방 알아채고 피할 수 있는데, 전기 충전식으로 움직이는 전동킥보드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중증 시각장애인인 오병철 동서울자립센터 소장은 "킥보드 탄 사람들이 지나가게 되면 대처하기가 힘들어서 부딪힐 뻔한 적이 많다"고 호소했습니다. 이 같은 민원에 국가기술표준원도 지난해 말 생활용품 안전 기준 개정안을 발표하며, 앞으로는 전동킥보드에 경적을 의무화하라고 알렸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 또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쓰는 공유형 전동킥보드 특성상, 경적이 고장 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데다 이용자들이 경적을 울리지 않고 빠르게 달리는 경우가 많은 탓입니다. 이 때문에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손해보험사가 2017년부터 집계한 전동킥보드 관련 사고는 총 2,227건, 올해는 상반기에만 466건입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주차 금지구역에 전동킥보드 여러대가 주차돼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주차 금지구역에 전동킥보드 여러대가 주차돼있다.
■현실은 앞서가는데…못 따라잡는 규제

한국교통연구원은 2019년 3월 기준 3만 7천여 명이던 전동킥보드 이용자가 1년 만에 21만 4천여 명으로 다섯 배 이상 많아졌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장 다음 달 10일부터는 이용 가능 연령이 13세 이상으로 낮아지고, 면허가 없는 사람도 전동킥보드를 탈 수 있어 이용자는 더 많아질 전망입니다.

이처럼 전동킥보드 이용자 수는 급속도로 느는데, 제도는 더디게 변하고 있습니다. 아무 데나 세워진 전동킥보드로 인한 지적이 늘자 지자체와 공유업체는 뒤늦게 주차 제한 구역을 지정했습니다. 서울시가 정한 주차 제한 구역은 점자블록 위와 건널목, 지하철역 인근, 버스 정류장 10m 이내 등입니다.

하지만 지침을 만들어 놨을 뿐, 이를 강제하는 규정이 없어 현실에선 여전히 곳곳에 주차된 전동킥보드가 시각장애인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내년부터 주차 금지구역에 세워진 전동킥보드 업체에 견인비를 물리도록 조례를 마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국회엔 전동킥보드 속도 기준을 25km에서 20km로 낮추는 법안이 계류돼 있습니다.

규제뿐 아니라 전동킥보드 이용자들의 협조와 인식 변화도 필요하단 지적이 나옵니다. 오병철 소장은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노약자가 킥보드 존재를 잘 알아채게 경적을 울리고, 대중교통 출입구나 점자블록 위에 킥보드를 세우지 않는 등 이용자들의 인식변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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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동킥보드, 시각장애인에겐 지뢰입니다”
    • 입력 2020-11-23 06:00:09
    취재K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문제다

인도와 지하철역 주변, 정류장 인근과 건널목 앞, 심지어 골목 곳곳까지…. 요즘 어디서나 눈에 띄는 물건, 바로 '전동킥보드'입니다. 앱을 이용해 전동킥보드를 쉽게 빌리고 반납할 수 있다 보니, 일단 이용한 뒤 여기저기에 킥보드를 세워놓고 가버리는 경우가 많아진 겁니다.

이 때문에 인도를 걷던 시민들이 길 한가운데 세워진 전동킥보드를 피해 다니는 불편한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겐, 이렇게 아무 데나 세워진 전동킥보드가 단순히 불편함을 넘어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라는 시각장애인의 얘기, 함께 거리를 걸으며 들어봤습니다.

■성인 발목 높이 '전동킥보드', 걸리면 대부분 넘어져

중증 시각장애인 이차용 씨는 두 달 전 길을 걷다 넘어져 치아가 깨졌습니다. 평소 지팡이로 점자블록(유도블록)을 짚으며 길을 찾곤 하는데, 그날도 평소처럼 걷다 점자블록 위에 주차된 전동킥보드에 걸려 넘어진 겁니다. 실제로 이 씨와 한 시간 동안 서울 광진구 일대를 걷는 동안 점자블록 위에 세워진 킥보드를 석 대나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씨는 "점자블록에 전동킥보드가 있다는 것 자체를 상상 못 했다"면서 "물체가 앞에 있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앞으로 쏠려 크게 넘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허리 높이까지 오는 자전거와 달리, 전동킥보드는 딱 성인 발목만큼의 높이입니다. 누구라도 발목에 걸리는 순간, 부딪치는 것에 끝나지 않고 대부분 넘어지게 되는 겁니다.

워낙 낮은 높이 탓에 몸체를 지팡이로 구분하기도 힘듭니다. 이 씨는 "자전거나 오토바이처럼 높은 물체는 지팡이 끝 부분이 중간에 걸리는데, 킥보드처럼 낮은 것들은 지팡이로 건드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최근에는 역 주변이나 건널목 뿐 아니라 점자블록 위까지 킥보드가 주차돼있어 집 나설 때마다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라고 호소했습니다.

이차용 씨가 취재진에게 점자블록 위에 세워진 전동킥보드를 잘 인지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소리 없이 빠르게 달려와…"못 알아챈다"

조용한 맹수처럼, 소리 없이 빠르게 다가온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은 걸을 때 지팡이로 느껴지는 촉각과 귀로 들리는 소리에 신경을 집중합니다. 자동차나 자전거, 오토바이의 경우엔 소리로 금방 알아채고 피할 수 있는데, 전기 충전식으로 움직이는 전동킥보드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중증 시각장애인인 오병철 동서울자립센터 소장은 "킥보드 탄 사람들이 지나가게 되면 대처하기가 힘들어서 부딪힐 뻔한 적이 많다"고 호소했습니다. 이 같은 민원에 국가기술표준원도 지난해 말 생활용품 안전 기준 개정안을 발표하며, 앞으로는 전동킥보드에 경적을 의무화하라고 알렸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 또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쓰는 공유형 전동킥보드 특성상, 경적이 고장 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데다 이용자들이 경적을 울리지 않고 빠르게 달리는 경우가 많은 탓입니다. 이 때문에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손해보험사가 2017년부터 집계한 전동킥보드 관련 사고는 총 2,227건, 올해는 상반기에만 466건입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주차 금지구역에 전동킥보드 여러대가 주차돼있다. ■현실은 앞서가는데…못 따라잡는 규제

한국교통연구원은 2019년 3월 기준 3만 7천여 명이던 전동킥보드 이용자가 1년 만에 21만 4천여 명으로 다섯 배 이상 많아졌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장 다음 달 10일부터는 이용 가능 연령이 13세 이상으로 낮아지고, 면허가 없는 사람도 전동킥보드를 탈 수 있어 이용자는 더 많아질 전망입니다.

이처럼 전동킥보드 이용자 수는 급속도로 느는데, 제도는 더디게 변하고 있습니다. 아무 데나 세워진 전동킥보드로 인한 지적이 늘자 지자체와 공유업체는 뒤늦게 주차 제한 구역을 지정했습니다. 서울시가 정한 주차 제한 구역은 점자블록 위와 건널목, 지하철역 인근, 버스 정류장 10m 이내 등입니다.

하지만 지침을 만들어 놨을 뿐, 이를 강제하는 규정이 없어 현실에선 여전히 곳곳에 주차된 전동킥보드가 시각장애인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내년부터 주차 금지구역에 세워진 전동킥보드 업체에 견인비를 물리도록 조례를 마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국회엔 전동킥보드 속도 기준을 25km에서 20km로 낮추는 법안이 계류돼 있습니다.

규제뿐 아니라 전동킥보드 이용자들의 협조와 인식 변화도 필요하단 지적이 나옵니다. 오병철 소장은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노약자가 킥보드 존재를 잘 알아채게 경적을 울리고, 대중교통 출입구나 점자블록 위에 킥보드를 세우지 않는 등 이용자들의 인식변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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