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속 방치된 아이들…우리 곁의 ‘방임 학대’

입력 2020.12.02 (17:23)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전남 여수의 한 가정집 내부 사진.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전남 여수의 한 가정집 내부 사진.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
아이들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사진 몇 장뿐이었습니다.

미닫이문 너머 보이는 집 안은 여백이 없이 빽빽합니다. 굴러다니는 과자 봉지, 탄산음료 캔·페트병과 커피 병, 뭔지 알 수 없는 잡동사니들, 묶여 있는 종량제 봉투. 집을 가득 메운 물건들은 누가 봐도 '쓰레기'입니다. 쌓인 높이가 TV 거치대까지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양이 많은지 짐작할 만합니다.

■ 쓰레기로 뒤덮인 집…냉동실에는 아기 시신

또 다른 사진을 볼까요. 이번에는 방 안입니다. 먼저 보이는 것은 돌돌 말려 있는 아기 기저귀입니다. 옷가지와 수건으로 보이는 물체도 나뒹굽니다. 여기에도 과자며 간식 봉지가 있습니다. 쓰레기로 덮여 있는 가구는 아마 침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같은 집에서 촬영된 사진. 온통 쓰레기로 덮여 있습니다. 같은 집에서 촬영된 사진. 온통 쓰레기로 덮여 있습니다.
이 집에서 살던 사람은 세 명이었습니다. 40대 어머니는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쓰레기 집'을 지킨 건 올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맏아들과 3살 딸이었습니다. 주(住)가 이 모양인데, 의(衣)와 식(食)이라고 온전했을 리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습니다. 이웃집에서 밥을 먹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아이들이 사는 곳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던 집 안에는, 실제로 살아 있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3살 딸의 쌍둥이였던 다른 아들은 생후 2개월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숨진 갓난아기는 땅속에 묻히지조차 못했습니다.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집의 냉동실 속에 2년 동안 보관돼 있었던 겁니다.

코를 찌르는 쓰레기 냄새. 제대로 못 먹고 지내는 아이들. 수상쩍음을 느낀 이웃의 신고로 사건은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지난달 27일 이 집에서 아기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어머니는 시신 유기와 아동학대 혐의 등으로 구속됐습니다.

■ 도처에 존재하는 '쓰레기 속 아이들'…'방임 학대' 피해

쓰레기 더미 속에 방치된 아이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2015년, 수원에서는 10대 자녀가 쓰레기 더미에 방치되었던가 하면, 또 다른 자녀가 인분까지 널려 있는 불결한 환경에서 생활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2017년, 경남 창원에서는 형제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아온 사실이 화재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지난해 7월 제주의 10살 초등학생, 지난 1월 부산의 18개월 아기, 지난 3월 창원의 초등학생 여자아이들, 지난 7월 서울의 3살 여자아이…모두 쓰레기 속에서 어렵게 삶을 이어 온 아동들입니다.

아이들이 방치돼 있던 한 주택. 아이들이 방치돼 있던 한 주택.
집도, 자녀도 돌보지 않는 이들. 단순히 무책임한 보호자에 불과할까요? 폭행을 하거나 욕설을 하는 것만 아동 학대가 아닙니다. 아동복지법은 폭력이나 가혹행위뿐 아니라 유기나 방임도 아동학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쓰레기 속에 아이들을 살게 한 행위는 '방임에 의한 아동 학대'에 해당합니다.

의식주뿐 아니라 신체적·정서적 돌봄도 제공받지 못한 아이들은 제대로 자라나기 어렵습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방임도 아동을 숨지거나 다치게 할 수 있는 학대 행위"라며 "아이들에게 굉장히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습니다.

■ '방임 학대' 연간 2800여 건…"경각심 일깨워야"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이런 방임에 의한 아동학대는 확인된 것만 2800여 건 발생했습니다. 전체 아동학대 사건의 10분의 1 가량을 차지합니다. 신체 학대보다 알아차리기 어려운 방임 학대의 특성상, 실제 피해 사례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지난 9월 인천 '라면 형제'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방임 학대가 발생할 가능성은 더 커졌습니다.

이번 여수 사건을 계기로 '방임'도 아동 학대라는 경각심을 재차 일깨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정익중 교수는 "여러 차례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방임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낮은 수준의 아동학대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이고, 이는 '방임'에 대한 '사회적 방임'에 해당한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아동이 방치된 또 다른 주택.아동이 방치된 또 다른 주택.
■ "주변 살펴보는 관심이 최고의 예방책"

지금도 수많은 아이들이 제대로 양육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동전문보호기관에 강제 조사권을 부여하는 방안이나, 사각지대에 놓인 가정을 신속히 찾아낼 수 있도록 사회복지 안전망을 강화하는 방안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바꾼다고 해결될 일은 아닐 겁니다. 분명한 점은 이상 징후를 알아차릴 수 있는 주변의 관심이 가장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혹시 내버려진 아이들이 있지는 않은지 세심히 살펴보는 시선이야말로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입니다. 여수 한 아파트에 갓난아기 시신과 아이들이 방치돼 있음을 밝혀낸 건 바로 이웃의 신고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남 여수의 한 가정집 쓰레기 더미 속에 있던 장난감.전남 여수의 한 가정집 쓰레기 더미 속에 있던 장난감.
쓰레기로 뒤덮인 집 안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잡동사니 속 특별한 물건 하나가 눈에 띕니다. 노란색과 분홍색으로 칠한 자동차 모양 장난감입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장난감을 갖고 놀았을 것만 같습니다.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운 형태의 삶이지만, 아이에게는 분명 나름대로의 기쁨과 희망이 있었을 겁니다. 살아갈 날, 경험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는 아이들이 더 이상의 '방임 학대'를 당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쓰레기 속 방치된 아이들…우리 곁의 ‘방임 학대’
    • 입력 2020-12-02 17:23:39
    취재K
전남 여수의 한 가정집 내부 사진.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아이들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사진 몇 장뿐이었습니다.

미닫이문 너머 보이는 집 안은 여백이 없이 빽빽합니다. 굴러다니는 과자 봉지, 탄산음료 캔·페트병과 커피 병, 뭔지 알 수 없는 잡동사니들, 묶여 있는 종량제 봉투. 집을 가득 메운 물건들은 누가 봐도 '쓰레기'입니다. 쌓인 높이가 TV 거치대까지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양이 많은지 짐작할 만합니다.

■ 쓰레기로 뒤덮인 집…냉동실에는 아기 시신

또 다른 사진을 볼까요. 이번에는 방 안입니다. 먼저 보이는 것은 돌돌 말려 있는 아기 기저귀입니다. 옷가지와 수건으로 보이는 물체도 나뒹굽니다. 여기에도 과자며 간식 봉지가 있습니다. 쓰레기로 덮여 있는 가구는 아마 침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같은 집에서 촬영된 사진. 온통 쓰레기로 덮여 있습니다. 이 집에서 살던 사람은 세 명이었습니다. 40대 어머니는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쓰레기 집'을 지킨 건 올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맏아들과 3살 딸이었습니다. 주(住)가 이 모양인데, 의(衣)와 식(食)이라고 온전했을 리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습니다. 이웃집에서 밥을 먹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아이들이 사는 곳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던 집 안에는, 실제로 살아 있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3살 딸의 쌍둥이였던 다른 아들은 생후 2개월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숨진 갓난아기는 땅속에 묻히지조차 못했습니다.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집의 냉동실 속에 2년 동안 보관돼 있었던 겁니다.

코를 찌르는 쓰레기 냄새. 제대로 못 먹고 지내는 아이들. 수상쩍음을 느낀 이웃의 신고로 사건은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지난달 27일 이 집에서 아기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어머니는 시신 유기와 아동학대 혐의 등으로 구속됐습니다.

■ 도처에 존재하는 '쓰레기 속 아이들'…'방임 학대' 피해

쓰레기 더미 속에 방치된 아이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2015년, 수원에서는 10대 자녀가 쓰레기 더미에 방치되었던가 하면, 또 다른 자녀가 인분까지 널려 있는 불결한 환경에서 생활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2017년, 경남 창원에서는 형제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아온 사실이 화재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지난해 7월 제주의 10살 초등학생, 지난 1월 부산의 18개월 아기, 지난 3월 창원의 초등학생 여자아이들, 지난 7월 서울의 3살 여자아이…모두 쓰레기 속에서 어렵게 삶을 이어 온 아동들입니다.

아이들이 방치돼 있던 한 주택. 집도, 자녀도 돌보지 않는 이들. 단순히 무책임한 보호자에 불과할까요? 폭행을 하거나 욕설을 하는 것만 아동 학대가 아닙니다. 아동복지법은 폭력이나 가혹행위뿐 아니라 유기나 방임도 아동학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쓰레기 속에 아이들을 살게 한 행위는 '방임에 의한 아동 학대'에 해당합니다.

의식주뿐 아니라 신체적·정서적 돌봄도 제공받지 못한 아이들은 제대로 자라나기 어렵습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방임도 아동을 숨지거나 다치게 할 수 있는 학대 행위"라며 "아이들에게 굉장히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습니다.

■ '방임 학대' 연간 2800여 건…"경각심 일깨워야"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이런 방임에 의한 아동학대는 확인된 것만 2800여 건 발생했습니다. 전체 아동학대 사건의 10분의 1 가량을 차지합니다. 신체 학대보다 알아차리기 어려운 방임 학대의 특성상, 실제 피해 사례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지난 9월 인천 '라면 형제'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방임 학대가 발생할 가능성은 더 커졌습니다.

이번 여수 사건을 계기로 '방임'도 아동 학대라는 경각심을 재차 일깨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정익중 교수는 "여러 차례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방임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낮은 수준의 아동학대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이고, 이는 '방임'에 대한 '사회적 방임'에 해당한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아동이 방치된 또 다른 주택. ■ "주변 살펴보는 관심이 최고의 예방책"

지금도 수많은 아이들이 제대로 양육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동전문보호기관에 강제 조사권을 부여하는 방안이나, 사각지대에 놓인 가정을 신속히 찾아낼 수 있도록 사회복지 안전망을 강화하는 방안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바꾼다고 해결될 일은 아닐 겁니다. 분명한 점은 이상 징후를 알아차릴 수 있는 주변의 관심이 가장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혹시 내버려진 아이들이 있지는 않은지 세심히 살펴보는 시선이야말로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입니다. 여수 한 아파트에 갓난아기 시신과 아이들이 방치돼 있음을 밝혀낸 건 바로 이웃의 신고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남 여수의 한 가정집 쓰레기 더미 속에 있던 장난감.쓰레기로 뒤덮인 집 안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잡동사니 속 특별한 물건 하나가 눈에 띕니다. 노란색과 분홍색으로 칠한 자동차 모양 장난감입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장난감을 갖고 놀았을 것만 같습니다.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운 형태의 삶이지만, 아이에게는 분명 나름대로의 기쁨과 희망이 있었을 겁니다. 살아갈 날, 경험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는 아이들이 더 이상의 '방임 학대'를 당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