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키오’ 약속 日 군함도 “역사왜곡 여전”

입력 2020.12.04 (17:10) 수정 2020.12.04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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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측이 제출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해석 전략 보고서>가 지난 1일 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에 실렸습니다. 보고서 공개 사흘만인 오늘(4일), 한국 외교부는 일본 정부가 강제노역 희생자를 기리는 조치를 하지 않은 데 대해 유감을 표했습니다.

일본은 군함도 등에서 착취 당하다 희생된 조선인 강제노역 희생자를 기리기는커녕 강제노역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의 약속 위반과 거짓 주장이 반복되면서 세계유산 지정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옵니다.

■ '강제노역' 인정하고 희생자 기리겠다더니..

배경을 이해하려면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2015년 일본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 23곳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습니다. 유네스코는 등재 결정과 함께,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 전략을 마련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여기서 '전체 역사'라는 대목에 유의해야 합니다. 등재 논의 과정에서 한국은 군함도 탄광 등 조선인 강제노역 시설 7곳이 후보지에 포함돼 있다고 지적하고 등재에 반대했습니다. 한국의 주장을 들은 세계유산위원회는 등재는 하되 전체 역사, 그러니까 어두운 과거사까지 모두 담으라고 권고한 겁니다.

당시 일본 대표는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 노역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해석 전략에 포함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 사라진 약속..."강제 징용 아닌 자발적 취업" 주장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등재 이후 일본은 태도를 바꿔 "한반도 출신 노동자가 일본 산업화 노력을 지원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강제 노역이 아니라 '자발적 취업'이었다는 구도를 만든 겁니다. 이번 보고서 역시 산업유산의 가치, 일본 산업화와 근대화라는 눈부신 업적을 어떻게 기록하고 홍보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습니다.

노동자 관련 정보 수집 항목을 보면 '한반도 등 출신의 전 민간인 노동자'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일본 노동자들과 한반도 및 다른 지역 출신의 노동자들이 똑같이 가혹한 환경 하에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 전시'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일본인 임금 노동자와 강제 노역을 같은 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정보센터는 '산업유산 인식 제고 및 지역 활성화 기여 목적'을 갖는다고 돼 있습니다. 강제노역 피해자 추모 목적은 적시되지 않았습니다. 징용과 관련한 항목은 '징용정책 관련 법령 전시' '대만인 징용자의 월급 봉투 전시' 등이 전부입니다. 실제로 6월에 도쿄에 문을 연 산업유산 정보센터 전시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력이 없습니다.

■ 피해 당사국 한국을 쏙 빼놓고...

일본은 '전체 역사 업데이트를 위해 국제 전문가의 해석 감사를 실시했다'고 적었지만 한국 전문가는 제외됐습니다. 호주와 영국 등의 전문가가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을 뿐입니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유네스코는 당사국 간 지속적 대화를 권장했지만 일본은 주요 피해 당사국인 한국과의 대화는 배제됐다"고 말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당국간 대화마저 여의치 않습니다. "일본 정부에도 협의를 제안하고 있지만 응하지 않고 있다"는 게 외교부 당국자 설명입니다.

한국은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세계유산 등재 취소 주장도 여전히 나오지만, 정부는 '등재 취소를 주장할 근거 규정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합리적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라고 요구하는 게 최선'이라는 겁니다. 국제적으로 큰 논란이 될 이슈가 아니고 국제기구 논의로는 별다른 강제 수단도 없습니다. 결국은 일본 정부의 전향적 태도를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 "성취 기리되 희생 기억하라"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남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입니다. 섬의 모양이 군함을 닮아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습니다. 19세기 초에 석탄이 발견되면서 광산 개발이 시작되었고, 1940년대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을 한 곳입니다. 동원된 조선인은 500~800명 가량으로 추산됩니다. 이들 대부분은 고된 강제노동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숨졌습니다.

일본의 산업화라는 빛나는 성취를 기리되, 동시에 강제 노역 희생자들을 기억하라는 요구는 너무 당연해서 덧붙일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한일 갈등이라는 비좁은 구도로 볼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더구나 일본의 근대유산을 인류가 함께 보존할 가치가 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으려면 보편적 가치를 외면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코로나19 여파로 올해는 열리지 못했고, 내년 6월에 중국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일본은 분명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강제 노역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해석 전략에 포함시키겠다"고 말이죠. 과거의 잘못을 돌아보고 인정할 때 자신들의 성취가 더욱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일본이 깨달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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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노키오’ 약속 日 군함도 “역사왜곡 여전”
    • 입력 2020-12-04 17:10:24
    • 수정2020-12-04 18:34:29
    취재K

일본 측이 제출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해석 전략 보고서>가 지난 1일 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에 실렸습니다. 보고서 공개 사흘만인 오늘(4일), 한국 외교부는 일본 정부가 강제노역 희생자를 기리는 조치를 하지 않은 데 대해 유감을 표했습니다.

일본은 군함도 등에서 착취 당하다 희생된 조선인 강제노역 희생자를 기리기는커녕 강제노역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의 약속 위반과 거짓 주장이 반복되면서 세계유산 지정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옵니다.

■ '강제노역' 인정하고 희생자 기리겠다더니..

배경을 이해하려면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2015년 일본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 23곳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습니다. 유네스코는 등재 결정과 함께,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 전략을 마련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여기서 '전체 역사'라는 대목에 유의해야 합니다. 등재 논의 과정에서 한국은 군함도 탄광 등 조선인 강제노역 시설 7곳이 후보지에 포함돼 있다고 지적하고 등재에 반대했습니다. 한국의 주장을 들은 세계유산위원회는 등재는 하되 전체 역사, 그러니까 어두운 과거사까지 모두 담으라고 권고한 겁니다.

당시 일본 대표는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 노역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해석 전략에 포함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 사라진 약속..."강제 징용 아닌 자발적 취업" 주장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등재 이후 일본은 태도를 바꿔 "한반도 출신 노동자가 일본 산업화 노력을 지원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강제 노역이 아니라 '자발적 취업'이었다는 구도를 만든 겁니다. 이번 보고서 역시 산업유산의 가치, 일본 산업화와 근대화라는 눈부신 업적을 어떻게 기록하고 홍보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습니다.

노동자 관련 정보 수집 항목을 보면 '한반도 등 출신의 전 민간인 노동자'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일본 노동자들과 한반도 및 다른 지역 출신의 노동자들이 똑같이 가혹한 환경 하에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 전시'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일본인 임금 노동자와 강제 노역을 같은 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정보센터는 '산업유산 인식 제고 및 지역 활성화 기여 목적'을 갖는다고 돼 있습니다. 강제노역 피해자 추모 목적은 적시되지 않았습니다. 징용과 관련한 항목은 '징용정책 관련 법령 전시' '대만인 징용자의 월급 봉투 전시' 등이 전부입니다. 실제로 6월에 도쿄에 문을 연 산업유산 정보센터 전시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력이 없습니다.

■ 피해 당사국 한국을 쏙 빼놓고...

일본은 '전체 역사 업데이트를 위해 국제 전문가의 해석 감사를 실시했다'고 적었지만 한국 전문가는 제외됐습니다. 호주와 영국 등의 전문가가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을 뿐입니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유네스코는 당사국 간 지속적 대화를 권장했지만 일본은 주요 피해 당사국인 한국과의 대화는 배제됐다"고 말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당국간 대화마저 여의치 않습니다. "일본 정부에도 협의를 제안하고 있지만 응하지 않고 있다"는 게 외교부 당국자 설명입니다.

한국은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세계유산 등재 취소 주장도 여전히 나오지만, 정부는 '등재 취소를 주장할 근거 규정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합리적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라고 요구하는 게 최선'이라는 겁니다. 국제적으로 큰 논란이 될 이슈가 아니고 국제기구 논의로는 별다른 강제 수단도 없습니다. 결국은 일본 정부의 전향적 태도를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 "성취 기리되 희생 기억하라"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남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입니다. 섬의 모양이 군함을 닮아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습니다. 19세기 초에 석탄이 발견되면서 광산 개발이 시작되었고, 1940년대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을 한 곳입니다. 동원된 조선인은 500~800명 가량으로 추산됩니다. 이들 대부분은 고된 강제노동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숨졌습니다.

일본의 산업화라는 빛나는 성취를 기리되, 동시에 강제 노역 희생자들을 기억하라는 요구는 너무 당연해서 덧붙일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한일 갈등이라는 비좁은 구도로 볼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더구나 일본의 근대유산을 인류가 함께 보존할 가치가 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으려면 보편적 가치를 외면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코로나19 여파로 올해는 열리지 못했고, 내년 6월에 중국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일본은 분명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강제 노역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해석 전략에 포함시키겠다"고 말이죠. 과거의 잘못을 돌아보고 인정할 때 자신들의 성취가 더욱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일본이 깨달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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