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너구리가 쓰레기를 가져가요” 수사 나선 경찰

입력 2020.12.09 (08:01) 수정 2020.12.0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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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과 계약을 맺은 민간 청소용역업체 트럭에 종량제 봉투에 담기지 않은 쓰레기가 놓여있다. 구청과 계약을 맺은 민간 청소용역업체 트럭에 종량제 봉투에 담기지 않은 쓰레기가 놓여있다.
'너구리'가 쓰레기를 가져간다는 고발장이 경찰에 접수됐습니다. 언뜻 장난 신고 같아 보이기도 하는 이 일에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부산 동래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구청까지 발칵 뒤집어놓았다는 이 너구리의 정체는 뭘까요?

흔히 너구리는 '식육목 개과의 포유류'인 동시에, 짜장 라면과 천상의 궁합을 자랑하여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영화 <기생충>의 걸출한 조연으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동래구를 뒤집어놓은 너구리는 알려진 것들과는 다릅니다.

■야심한 밤 쓰레기 거둬들이는 ‘너구리’들

일부 청소업계에서 너구리는 '뒷돈을 받고 쓰레기를 처리해주는 일 또는 사람'을 뜻하는 은어로 쓰입니다. 너구리가 잡식성인 동시에 야행성이란 점에 비춰본다면 어떤 연유로 만들어진 이름인지 대략 짐작이 갑니다.

너구리가 문제인 이유는 정상적으로 배출하지 않은 쓰레기를 몰래 처리해준다는 데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는 종량제 봉투나 음식물 쓰레기 배출용 칩을 사야 합니다. 반면 너구리들에게는 한달에 작게는 몇만 원에서 많게는 몇십만 원의 뒷돈만 주면 됩니다. 배출일에 맞추느라 쓰레기를 쌓아둘 수 없는 업체 중에서도 특히, 식당에게는 너구리의 제안이 그래서 매력적입니다.

그게 무슨 큰일이냐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식당 사장님들은 간편해서 좋고, 너구리들도 돈을 벌어 좋은 일인데 말이죠. 이들의 공생 관계에 대한 부담을 결국 시민들이 나누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러실 수 있습니다.

■너구리와 업주들의 불편한 공생관계…. 피해는 시민이

구청 청소용역업체 차량. 구청 청소용역업체 차량.
대부분 기초자치단체는 위탁계약을 맺은 민간업체에 쓰레기 처리를 맡깁니다. 쓰레기를 거둬간 민간업체가 처리장에 쓰레기를 넘기면 최종 처리 비용은 무게를 측정해 구청 등에서 지급해줍니다. 동래구는 음식물 쓰레기의 경우 톤당 15만 원 정도를 처리비로 지급하는데 종량제 봉투와 칩 등을 판매한 세외수입으로 비용을 충당합니다.

종량제 봉투에 담지 않은 쓰레기가 섞여 들어오면 그만큼 선량한 시민들이 낸 돈으로 부정한 쓰레기까지 처리해주는 꼴이 됩니다. 한해 동래구에서 쓰레기 처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90억 원이 넘는다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올해 초에도 한 업체가 부정한 방식으로 쓰레기 처리량을 늘렸다는 게 부산시 감사에 드러나 해당 업체가 2억 원에 가까운 돈을 환수당했습니다. 업계에서는 이게 빙산의 일각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종량제 봉투' 대신 '돈 봉투' 너구리 근절될까?

종량제 봉투에 담긴 쓰레기가 버려져있다. 종량제 봉투에 담긴 쓰레기가 버려져있다.
업체들이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번에 부정 수거가 적발된 업체 관계자는 "직원들에게 교육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지만 계속 따라다닐 수 없다 보니 근절하기가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구청 역시 "현장을 적발하지 않는 이상 적발하기가 쉽지 않다"며 쉽사리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불거지자 동래구는 사수거 행위가 적발된 업체에 위약금을 부과하고 내년부터는 계약방식을 지금의 수의계약에서 공개입찰로 전환하는 방식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은 해당 업체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회사가 부당 이득을 취한 점은 없는지 등을 살펴보고 있는 걸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 고질적인 문제가 사라질 거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취재 과정 중에 만난 업계 관계자는 "부정 수거 행위는 하루 이틀의 이야기도 아닐뿐더러 어느 한 지역만의 이야기도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백과사전은 원래 풀숲이 서식지였던 야생동물 너구리가 도시화로 주택가까지 나타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종량제 봉투보다 돈 봉투가 편했던 일부 업주들과, 관리·감독의 사각지대라는 서식환경이 이번에는 쓰레기를 가져가는 또 다른 너구리를 도심으로 끌어들인 꼴이 됐습니다. 서식환경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 너구리들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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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너구리가 쓰레기를 가져가요” 수사 나선 경찰
    • 입력 2020-12-09 08:01:35
    • 수정2020-12-09 08:01:52
    취재후·사건후
구청과 계약을 맺은 민간 청소용역업체 트럭에 종량제 봉투에 담기지 않은 쓰레기가 놓여있다. '너구리'가 쓰레기를 가져간다는 고발장이 경찰에 접수됐습니다. 언뜻 장난 신고 같아 보이기도 하는 이 일에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부산 동래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구청까지 발칵 뒤집어놓았다는 이 너구리의 정체는 뭘까요?

흔히 너구리는 '식육목 개과의 포유류'인 동시에, 짜장 라면과 천상의 궁합을 자랑하여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영화 <기생충>의 걸출한 조연으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동래구를 뒤집어놓은 너구리는 알려진 것들과는 다릅니다.

■야심한 밤 쓰레기 거둬들이는 ‘너구리’들

일부 청소업계에서 너구리는 '뒷돈을 받고 쓰레기를 처리해주는 일 또는 사람'을 뜻하는 은어로 쓰입니다. 너구리가 잡식성인 동시에 야행성이란 점에 비춰본다면 어떤 연유로 만들어진 이름인지 대략 짐작이 갑니다.

너구리가 문제인 이유는 정상적으로 배출하지 않은 쓰레기를 몰래 처리해준다는 데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는 종량제 봉투나 음식물 쓰레기 배출용 칩을 사야 합니다. 반면 너구리들에게는 한달에 작게는 몇만 원에서 많게는 몇십만 원의 뒷돈만 주면 됩니다. 배출일에 맞추느라 쓰레기를 쌓아둘 수 없는 업체 중에서도 특히, 식당에게는 너구리의 제안이 그래서 매력적입니다.

그게 무슨 큰일이냐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식당 사장님들은 간편해서 좋고, 너구리들도 돈을 벌어 좋은 일인데 말이죠. 이들의 공생 관계에 대한 부담을 결국 시민들이 나누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러실 수 있습니다.

■너구리와 업주들의 불편한 공생관계…. 피해는 시민이

구청 청소용역업체 차량. 대부분 기초자치단체는 위탁계약을 맺은 민간업체에 쓰레기 처리를 맡깁니다. 쓰레기를 거둬간 민간업체가 처리장에 쓰레기를 넘기면 최종 처리 비용은 무게를 측정해 구청 등에서 지급해줍니다. 동래구는 음식물 쓰레기의 경우 톤당 15만 원 정도를 처리비로 지급하는데 종량제 봉투와 칩 등을 판매한 세외수입으로 비용을 충당합니다.

종량제 봉투에 담지 않은 쓰레기가 섞여 들어오면 그만큼 선량한 시민들이 낸 돈으로 부정한 쓰레기까지 처리해주는 꼴이 됩니다. 한해 동래구에서 쓰레기 처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90억 원이 넘는다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올해 초에도 한 업체가 부정한 방식으로 쓰레기 처리량을 늘렸다는 게 부산시 감사에 드러나 해당 업체가 2억 원에 가까운 돈을 환수당했습니다. 업계에서는 이게 빙산의 일각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종량제 봉투' 대신 '돈 봉투' 너구리 근절될까?

종량제 봉투에 담긴 쓰레기가 버려져있다. 업체들이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번에 부정 수거가 적발된 업체 관계자는 "직원들에게 교육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지만 계속 따라다닐 수 없다 보니 근절하기가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구청 역시 "현장을 적발하지 않는 이상 적발하기가 쉽지 않다"며 쉽사리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불거지자 동래구는 사수거 행위가 적발된 업체에 위약금을 부과하고 내년부터는 계약방식을 지금의 수의계약에서 공개입찰로 전환하는 방식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은 해당 업체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회사가 부당 이득을 취한 점은 없는지 등을 살펴보고 있는 걸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 고질적인 문제가 사라질 거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취재 과정 중에 만난 업계 관계자는 "부정 수거 행위는 하루 이틀의 이야기도 아닐뿐더러 어느 한 지역만의 이야기도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백과사전은 원래 풀숲이 서식지였던 야생동물 너구리가 도시화로 주택가까지 나타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종량제 봉투보다 돈 봉투가 편했던 일부 업주들과, 관리·감독의 사각지대라는 서식환경이 이번에는 쓰레기를 가져가는 또 다른 너구리를 도심으로 끌어들인 꼴이 됐습니다. 서식환경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 너구리들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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