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K] 거장 이우환, 다시 시작된 위작 스캔들

입력 2020.12.1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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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장 이우환에 드리운 위작의 그림자

"점과 선으로도 충분히 회화를 이룰 수 있고 회화 이상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저는 현대 회화 중에서도 점과 선이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라고 봅니다." - 이우환

'점과 선의 화가' 이우환. 2011년 현대미술의 심장부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성공적으로 연 뒤 세계 미술 시장에서 그의 인기는 치솟았다. 그 중심에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작품이 있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미술 시장의 환호가 쏟아졌지만, 그림자도 뒤따랐다. 2016년,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작품을 둘러싸고 '위작 논란'이 미술계를 뒤덮었다. 결국, 경찰 수사를 통해 위작 조직 2곳이 적발됐다.

위작범들은 위작에 사용된 재료와 제작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자백했다.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이우환 작가가 수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위작범들이 자백한 그림도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법원은 위작범들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위작품은 법이라는 둔탁한 도구가 개입하기에 앞서 미술 시장의 자율적인 시스템과 역량으로 걸러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 가지 이유로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여 피해가 속출하고 급기야 형사사건으로 비화하게 된 이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자기 최면으로 법에 의한 해결을 회피하는 것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될 수 없다. (중략) 시장이 충격을 딛고 투명성, 신뢰성을 회복하여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냉철하게 환부를 도려낼 필요가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 재판장 김동아)

이후 4년, 상처가 아물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환부는 모두 사라진 것일까.


■ 다시 시작된 위작 스캔들

한동안 잠잠했던 위작 논란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부터였다. 미술계 관계자들로부터 '진위(眞僞)'가 의심스러운 이우환 작품이 거래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4년 전과 같이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작품이었다.

그때부터 잠복 취재가 시작됐다. 은밀하게 거래되는 고가의 미술 작품인 만큼 현장에 접근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맞닥뜨린 한 장의 위작 의심작품. 구불거리는 모양의 <선으로부터>였다. 갤러리 사장은 그림값으로 8억 원을 제시했다. 작품의 출처를 묻자 이런 답변을 내놨다.

"저희가 이우환 선생님에게 직접 받은 거에요. 안도 다다오 선생님이 나오시마에 미술관 할 때 우리 집을 설계하셨거든요. 그 연관으로 이우환 선생님에게 구매한 거죠. " (갤러리 사장 A 씨)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안도 다다오는 이우환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인물이다. 일본 나오시마의 이우환 미술관을 설계하기도 했다.

취재진은 안도 다다오 측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안도 다다오는 "집을 설계하지도, 그림 판매를 소개하지도 않았다."며 모든 관련성을 부인했다. 8억 원이나 나간다는 고가의 그림 출처가 미궁에 빠진 것이다.

갤러리 사장은 작품의 진위가 의심스러우면 전문가에게 감정을 맡겨보자고 말했다. 감정위원으로 최명윤 한국미술과학연구원 이사장 이름도 언급했다. 그는 4년 전 위작 논란 당시 진위를 판단한 전문가 중 한 명이었다. 최 이사장의 감정 결과는 역시 '위작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작품이 공기에 노출되는 부분이 있고, 나무에 가려진 부분이 있어요. 그러면 노출되는 부분과 가려진 부분의 산화도가 달라야죠. 그런데 지금 이 작품은 산화도 차이가 하나도 없어요. 천을 놓고 전체적으로 칠을 해서 누렇게 만들어 놓은 다음에 천을 씌운 거죠. " - 최명윤 한국미술과학연구원 이사장

이우환 작가의 작품에서 쓰지 않는 재료인 유리 가루도 발견됐다. 4년 전 위작범들이 썼던 재료다. 당시 위작범들은 반짝이는 효과를 내기 위해 유리 가루를 썼다고 진술해, 위작 판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됐다.

또 다른 단서는 이우환 작가의 도록에서 발견됐다. 198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이우환 작가의 개인전 도록에 실린 작품 <선으로부터 80058>. 논란의 여지가 없는 작가의 진짜 그림이다. 유리 가루가 섞인 8억 원짜리 그림 역시 <선으로부터 80058>였다. 번호가 같지만 모양도 크기도 도록 속의 작품과 달랐다. 갤러리 사장은 모든 정황이 위작을 가리키자, "전혀 몰랐다. 좋은 그림이 아니라고 해서 거래를 중단하려 했다"고 말했다.

위작 의심작품의 출처를 추적하던 중 확인한 '중복 번호.' 취재진은 이 단서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기로 했다.


■ 위작 논란의 핵심 '중복 번호'

'작품번호 중복' 문제는 이우환 작가의 작품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를 둘러싼 4년 전 '위작 논란' 당시에도 핵심 쟁점이었다.

추상회화는 일반적으로 캔버스 뒷면에 작품번호를 적어놓는다. 비슷한 작품을 구별하기 위해서다. 작품 기록과 정리를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위작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이우환 작가의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작품에도 제작 연도와 함께 작품의 번호가 적혀있다. 그런데 위작 논란 당시 번호가 중복되는 작품이 여러 점 발견됐던 것이다.

이우환 작가 측은 2016년 2월 중복 번호 작품에 대한 입장을 직접 밝혔다.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일본과 한국, 프랑스에 있는 작업실들을 오가며 작업을 했기 때문에 가끔 작품의 뒷면에 일련번호나 작가 사인이 없는 것도 있고, 같은 일련번호가 두 번 이상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극히 몇 점 안 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 이우환 작가/2016년 2월

경찰의 압수품 13점을 감정한 뒤 개최한 2016년 6월 30일 기자회견. 다시 중복번호에 대한 질의가 나오자 작가는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작품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소홀했던 70년 상황을 설명하면서 "화랑에서 붙인 것도 있고 사인을 나중에 한 것도 있다. 번호가 두 번, 세 번 겹친 게 꽤 있다"고 말했다. '극히 몇 점 안 된다'에서 '꽤 있다'로, 4개월 전보다 다소 여지를 열어놓는 뉘앙스였다. 다만 위작과는 무관하다는 기존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중복번호는 단순한 실수와 착오뿐일까. KBS 탐사보도부는 위작 논란이 끊이지 않는 70년대 후반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작품 번호를 수집해 분석했다.

대상은 ▲ 크리스티, 소더비, 필립스, 본햄스, 서울옥션, 케이옥션 등 국내·외 6대 경매 회사에서 거래된 작품 ▲ 위작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작품 ▲ 그리고 각종 전시 기록과 도록에서 번호가 공개된 작품이었다.


■ '확인된' 중복 작품만 80점…둘 중 하나는 위작?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번호가 중복되는 이우환 작가의 70년대 후반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작품은 80점에 달했다. 번호가 같은데 그림 크기와 모양이 완전히 다른 중복 작품이 31쌍, 62점이었고 같은 번호의 그림이 3개 겹치는 경우도 18점이나 됐다.

"보통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다 기록을 하죠. 사인도 있고 연도도 있고. 따라서 그런 것들이 한두 개 정도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과도하게 몇십 점 정도가 같은 숫자, 날짜로 표기됐다면 그것은 위작의 의미가 그만큼 크다고 생각할 수 있죠." - 박영택/경기대학교 교수, 미술평론가

번호가 중복되는 이우환 작가의 그림은 미국, 홍콩, 일본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작품번호 <78***5>의 경우 2015년 홍콩 소더비 옥션에 나온 그림인데, 2년 뒤 도쿄 마이니치 옥션에서 번호는 동일하지만 크기와 내용이 전혀 다른 작품이 나타났다.

세계 최고의 아트페어라고 평가받는 스위스 아트바젤에 2016년 출품됐던 작품번호 <78***3>. 일본 동경의 한 화랑과 독일에서 열렸던 작가의 개인전에서 같은 번호의 작품이 확인됐다. 모두 번호는 같지만 크기와 모양이 달랐다.

전문가들은 미술작품 거래의 특성상 옥션 등 공개된 시장 밖에서 이뤄지는 거래들이 더 많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중복 번호 작품의 규모는 더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공개된 시장에서) 기존에 드러난 것만 확인했는데도 이 정도인데 만약 지금 현재 시장에서 움직이는 거래를 총체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실제로는 엄청나게 많은 위작이 거래됐을 가능성이 있겠다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이태호/명지대 초빙교수

■ 중복 작품 거래의 통로, '옥션'

이번 취재에서 경매 회사 중 가장 많은 중복 번호가 나온 곳은 국내 양대 경매 회사인 케이옥션이었다. 모두 8점의 중복번호 작품이 케이옥션 경매에 나왔다. 취재진은 중복 번호 문제에 대해 케이옥션 측에 질의했지만, 케이옥션은 구체적인 답변은 하지 않은 채, "위작 사건 이후 검증 절차를 강화했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케이옥션은 이미 지난 2017년에도 중복 번호 문제로 논란에 오른 적이 있었다. 당시 <선으로부터 78***5> 작품이 경매에 나왔다가, 뒤늦게 같은 번호의 <점으로부터 78***5>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경매 출품을 취소했던 적이 있다.

세계적인 경매 회사들도 중복 번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크리스티와 소더비 모두 중복 번호 작품을 거래한 흔적이 확인됐다. 특히 크리스티가 2015년 3월 사들였던 <선으로부터 78***2>는 위작 수사 결과 위작 조직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국내 최대 화랑인 갤러리현대는 크리스티에 해당 그림을 22억 원에 판매했다고 했다.

크리스티는 1년 후, 위작 조직에서 나온 그림과 번호는 같지만, 모양과 크기가 다른 <78***2>를 경매에 내놓았다.

취재진은 중복 번호 문제에 대한 크리스티 측 입장을 물었지만, "뉴욕·홍콩 등 다른 지역들이 얽힌 매우 복잡한 문제라 시간이 걸려 구체적인 답을 주기 어렵다"는 답변밖에 들을 수 없었다. 소더비 역시 수차례 이메일 질의를 보냈지만 답변하지 않았다.

갤러리현대는 중복 번호 문제를 알고 있었는지 묻는 취재진의 질의에 알지 못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정된 인력으로 전시와 판매를 하는 소규모 회사이기 때문에 경매회사의 모든 거래를 일일이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갤러리현대는 국내 최대 화랑이고, 케이옥션 대표는 갤러리현대 회장의 아들이다.


■ 반복되는 논란, 이어지는 침묵

“150호짜리 <점으로부터> 작품은 도중에 밥을 급히 먹는 거 빼고는 전혀 쉬지 않고 16~18시간 시작부터 끝까지 맞부딪쳐 매우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꾹 참고 견뎌야만 해요.” - 이우환 / 일본 잡지 <미즈에> 1978년 2월호 中

이우환 작가는 위작 논란이 있을 때마다 자신은 고유의 호흡으로 작품을 그려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따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작가가 작가 확인서를 발급한 작품 중에는 위작범이 위작이라고 자백한 작품도 있었다. 법원은 이를 '자기 최면'이고 '회피'라고 판단했다.

취재진은 작가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이제는 뭔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침묵했다.

"난 그런 거 몰라요. 난 그 당시에도 이런 얘기를 하는데 내가 무슨 소리인지 뭐가 뭔지 난 모르니까. 일체 노코멘트. " - 이우환 작가

끝나지 않은 거장의 위작 스캔들, 책임은 결국 누구의 몫인가.

오늘(10일) 밤 KBS1TV 뉴스9에서 자세한 취재 과정을 공개한다.

<시사기획 창> '거장과 위작 논란 - 이우환 vs. 이우환'은 12일(토) 오후 8시 5분 KBS 1TV에서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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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사K] 거장 이우환, 다시 시작된 위작 스캔들
    • 입력 2020-12-10 12:01:15
    탐사K

■ 거장 이우환에 드리운 위작의 그림자

"점과 선으로도 충분히 회화를 이룰 수 있고 회화 이상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저는 현대 회화 중에서도 점과 선이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라고 봅니다." - 이우환

'점과 선의 화가' 이우환. 2011년 현대미술의 심장부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성공적으로 연 뒤 세계 미술 시장에서 그의 인기는 치솟았다. 그 중심에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작품이 있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미술 시장의 환호가 쏟아졌지만, 그림자도 뒤따랐다. 2016년,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작품을 둘러싸고 '위작 논란'이 미술계를 뒤덮었다. 결국, 경찰 수사를 통해 위작 조직 2곳이 적발됐다.

위작범들은 위작에 사용된 재료와 제작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자백했다.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이우환 작가가 수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위작범들이 자백한 그림도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법원은 위작범들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위작품은 법이라는 둔탁한 도구가 개입하기에 앞서 미술 시장의 자율적인 시스템과 역량으로 걸러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 가지 이유로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여 피해가 속출하고 급기야 형사사건으로 비화하게 된 이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자기 최면으로 법에 의한 해결을 회피하는 것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될 수 없다. (중략) 시장이 충격을 딛고 투명성, 신뢰성을 회복하여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냉철하게 환부를 도려낼 필요가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 재판장 김동아)

이후 4년, 상처가 아물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환부는 모두 사라진 것일까.


■ 다시 시작된 위작 스캔들

한동안 잠잠했던 위작 논란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부터였다. 미술계 관계자들로부터 '진위(眞僞)'가 의심스러운 이우환 작품이 거래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4년 전과 같이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작품이었다.

그때부터 잠복 취재가 시작됐다. 은밀하게 거래되는 고가의 미술 작품인 만큼 현장에 접근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맞닥뜨린 한 장의 위작 의심작품. 구불거리는 모양의 <선으로부터>였다. 갤러리 사장은 그림값으로 8억 원을 제시했다. 작품의 출처를 묻자 이런 답변을 내놨다.

"저희가 이우환 선생님에게 직접 받은 거에요. 안도 다다오 선생님이 나오시마에 미술관 할 때 우리 집을 설계하셨거든요. 그 연관으로 이우환 선생님에게 구매한 거죠. " (갤러리 사장 A 씨)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안도 다다오는 이우환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인물이다. 일본 나오시마의 이우환 미술관을 설계하기도 했다.

취재진은 안도 다다오 측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안도 다다오는 "집을 설계하지도, 그림 판매를 소개하지도 않았다."며 모든 관련성을 부인했다. 8억 원이나 나간다는 고가의 그림 출처가 미궁에 빠진 것이다.

갤러리 사장은 작품의 진위가 의심스러우면 전문가에게 감정을 맡겨보자고 말했다. 감정위원으로 최명윤 한국미술과학연구원 이사장 이름도 언급했다. 그는 4년 전 위작 논란 당시 진위를 판단한 전문가 중 한 명이었다. 최 이사장의 감정 결과는 역시 '위작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작품이 공기에 노출되는 부분이 있고, 나무에 가려진 부분이 있어요. 그러면 노출되는 부분과 가려진 부분의 산화도가 달라야죠. 그런데 지금 이 작품은 산화도 차이가 하나도 없어요. 천을 놓고 전체적으로 칠을 해서 누렇게 만들어 놓은 다음에 천을 씌운 거죠. " - 최명윤 한국미술과학연구원 이사장

이우환 작가의 작품에서 쓰지 않는 재료인 유리 가루도 발견됐다. 4년 전 위작범들이 썼던 재료다. 당시 위작범들은 반짝이는 효과를 내기 위해 유리 가루를 썼다고 진술해, 위작 판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됐다.

또 다른 단서는 이우환 작가의 도록에서 발견됐다. 198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이우환 작가의 개인전 도록에 실린 작품 <선으로부터 80058>. 논란의 여지가 없는 작가의 진짜 그림이다. 유리 가루가 섞인 8억 원짜리 그림 역시 <선으로부터 80058>였다. 번호가 같지만 모양도 크기도 도록 속의 작품과 달랐다. 갤러리 사장은 모든 정황이 위작을 가리키자, "전혀 몰랐다. 좋은 그림이 아니라고 해서 거래를 중단하려 했다"고 말했다.

위작 의심작품의 출처를 추적하던 중 확인한 '중복 번호.' 취재진은 이 단서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기로 했다.


■ 위작 논란의 핵심 '중복 번호'

'작품번호 중복' 문제는 이우환 작가의 작품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를 둘러싼 4년 전 '위작 논란' 당시에도 핵심 쟁점이었다.

추상회화는 일반적으로 캔버스 뒷면에 작품번호를 적어놓는다. 비슷한 작품을 구별하기 위해서다. 작품 기록과 정리를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위작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이우환 작가의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작품에도 제작 연도와 함께 작품의 번호가 적혀있다. 그런데 위작 논란 당시 번호가 중복되는 작품이 여러 점 발견됐던 것이다.

이우환 작가 측은 2016년 2월 중복 번호 작품에 대한 입장을 직접 밝혔다.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일본과 한국, 프랑스에 있는 작업실들을 오가며 작업을 했기 때문에 가끔 작품의 뒷면에 일련번호나 작가 사인이 없는 것도 있고, 같은 일련번호가 두 번 이상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극히 몇 점 안 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 이우환 작가/2016년 2월

경찰의 압수품 13점을 감정한 뒤 개최한 2016년 6월 30일 기자회견. 다시 중복번호에 대한 질의가 나오자 작가는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작품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소홀했던 70년 상황을 설명하면서 "화랑에서 붙인 것도 있고 사인을 나중에 한 것도 있다. 번호가 두 번, 세 번 겹친 게 꽤 있다"고 말했다. '극히 몇 점 안 된다'에서 '꽤 있다'로, 4개월 전보다 다소 여지를 열어놓는 뉘앙스였다. 다만 위작과는 무관하다는 기존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중복번호는 단순한 실수와 착오뿐일까. KBS 탐사보도부는 위작 논란이 끊이지 않는 70년대 후반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작품 번호를 수집해 분석했다.

대상은 ▲ 크리스티, 소더비, 필립스, 본햄스, 서울옥션, 케이옥션 등 국내·외 6대 경매 회사에서 거래된 작품 ▲ 위작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작품 ▲ 그리고 각종 전시 기록과 도록에서 번호가 공개된 작품이었다.


■ '확인된' 중복 작품만 80점…둘 중 하나는 위작?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번호가 중복되는 이우환 작가의 70년대 후반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작품은 80점에 달했다. 번호가 같은데 그림 크기와 모양이 완전히 다른 중복 작품이 31쌍, 62점이었고 같은 번호의 그림이 3개 겹치는 경우도 18점이나 됐다.

"보통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다 기록을 하죠. 사인도 있고 연도도 있고. 따라서 그런 것들이 한두 개 정도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과도하게 몇십 점 정도가 같은 숫자, 날짜로 표기됐다면 그것은 위작의 의미가 그만큼 크다고 생각할 수 있죠." - 박영택/경기대학교 교수, 미술평론가

번호가 중복되는 이우환 작가의 그림은 미국, 홍콩, 일본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작품번호 <78***5>의 경우 2015년 홍콩 소더비 옥션에 나온 그림인데, 2년 뒤 도쿄 마이니치 옥션에서 번호는 동일하지만 크기와 내용이 전혀 다른 작품이 나타났다.

세계 최고의 아트페어라고 평가받는 스위스 아트바젤에 2016년 출품됐던 작품번호 <78***3>. 일본 동경의 한 화랑과 독일에서 열렸던 작가의 개인전에서 같은 번호의 작품이 확인됐다. 모두 번호는 같지만 크기와 모양이 달랐다.

전문가들은 미술작품 거래의 특성상 옥션 등 공개된 시장 밖에서 이뤄지는 거래들이 더 많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중복 번호 작품의 규모는 더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공개된 시장에서) 기존에 드러난 것만 확인했는데도 이 정도인데 만약 지금 현재 시장에서 움직이는 거래를 총체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실제로는 엄청나게 많은 위작이 거래됐을 가능성이 있겠다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이태호/명지대 초빙교수

■ 중복 작품 거래의 통로, '옥션'

이번 취재에서 경매 회사 중 가장 많은 중복 번호가 나온 곳은 국내 양대 경매 회사인 케이옥션이었다. 모두 8점의 중복번호 작품이 케이옥션 경매에 나왔다. 취재진은 중복 번호 문제에 대해 케이옥션 측에 질의했지만, 케이옥션은 구체적인 답변은 하지 않은 채, "위작 사건 이후 검증 절차를 강화했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케이옥션은 이미 지난 2017년에도 중복 번호 문제로 논란에 오른 적이 있었다. 당시 <선으로부터 78***5> 작품이 경매에 나왔다가, 뒤늦게 같은 번호의 <점으로부터 78***5>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경매 출품을 취소했던 적이 있다.

세계적인 경매 회사들도 중복 번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크리스티와 소더비 모두 중복 번호 작품을 거래한 흔적이 확인됐다. 특히 크리스티가 2015년 3월 사들였던 <선으로부터 78***2>는 위작 수사 결과 위작 조직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국내 최대 화랑인 갤러리현대는 크리스티에 해당 그림을 22억 원에 판매했다고 했다.

크리스티는 1년 후, 위작 조직에서 나온 그림과 번호는 같지만, 모양과 크기가 다른 <78***2>를 경매에 내놓았다.

취재진은 중복 번호 문제에 대한 크리스티 측 입장을 물었지만, "뉴욕·홍콩 등 다른 지역들이 얽힌 매우 복잡한 문제라 시간이 걸려 구체적인 답을 주기 어렵다"는 답변밖에 들을 수 없었다. 소더비 역시 수차례 이메일 질의를 보냈지만 답변하지 않았다.

갤러리현대는 중복 번호 문제를 알고 있었는지 묻는 취재진의 질의에 알지 못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정된 인력으로 전시와 판매를 하는 소규모 회사이기 때문에 경매회사의 모든 거래를 일일이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갤러리현대는 국내 최대 화랑이고, 케이옥션 대표는 갤러리현대 회장의 아들이다.


■ 반복되는 논란, 이어지는 침묵

“150호짜리 <점으로부터> 작품은 도중에 밥을 급히 먹는 거 빼고는 전혀 쉬지 않고 16~18시간 시작부터 끝까지 맞부딪쳐 매우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꾹 참고 견뎌야만 해요.” - 이우환 / 일본 잡지 <미즈에> 1978년 2월호 中

이우환 작가는 위작 논란이 있을 때마다 자신은 고유의 호흡으로 작품을 그려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따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작가가 작가 확인서를 발급한 작품 중에는 위작범이 위작이라고 자백한 작품도 있었다. 법원은 이를 '자기 최면'이고 '회피'라고 판단했다.

취재진은 작가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이제는 뭔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침묵했다.

"난 그런 거 몰라요. 난 그 당시에도 이런 얘기를 하는데 내가 무슨 소리인지 뭐가 뭔지 난 모르니까. 일체 노코멘트. " - 이우환 작가

끝나지 않은 거장의 위작 스캔들, 책임은 결국 누구의 몫인가.

오늘(10일) 밤 KBS1TV 뉴스9에서 자세한 취재 과정을 공개한다.

<시사기획 창> '거장과 위작 논란 - 이우환 vs. 이우환'은 12일(토) 오후 8시 5분 KBS 1TV에서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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