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적인 근대 조선의 얼굴’…경매에 나온 폴 자쿨레 판화

입력 2020.12.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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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했던 화가 폴 자쿨레(Paul Jacoulet, 1896~1960).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으로 3살 때 아버지가 일본 도쿄 외국어대학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 25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32살 때 어머니가 경성제대(서울대학교의 전신)에 재직하던 일본인 의학박사와 재혼하면서 서울로 거처를 옮김. 생애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내면서도 어머니를 만나러 수시로 서울을 다녀갔고, 그때마다 한국인들의 모습을 판화로 제작.

한국을 사랑한 화가 폴 자쿨레한국을 사랑한 화가 폴 자쿨레

이것이 폴 자쿨레라는 화가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대강의 이력입니다. 자쿨레가 한국인을 소재로 완성한 다색목판화는 지금까지 확인된 작품만 대략 40점 가까이 됩니다. 이 밖에도 100점이 넘는 수채화와 드로잉도 남겼다고 하는데요.

어머니가 서울에서 살았다는 점 말고도 한국과의 또 다른 인연이 있었습니다. 자쿨레는 1931년 당시 일본의 야간학교에 다니던 유학생 나영환을 조수로 채용합니다. 1934년에 서울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폴 자쿨레 판화전'을 열었죠. 1939년에는 조수 나영환의 동생 나용환도 조수로 채용했고, 1949년에는 나영환의 딸 나성순을 입양합니다.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각별한 인연을 맺었죠.

그래서 자쿨레의 판화에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본에서 배운 우키요에라는 다색 목판화 기법을 쓴 까닭에 표현 양식은 대단히 일본적이면서 이국적이죠.

국내에서 자쿨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은 뜻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입니다. 양아버지로부터 소유권을 물려받은 재일교포 나성순 씨가 2005년 12월 그동안 보관해오던 작품 165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기 때문이죠. 이때 기증된 작품들은 이듬해인 2006년 4월부터 6월까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아시아의 색채: 폴 자쿨레 판화>에서 공개됐습니다.

2018년 서울미술관 기획전 포스터2018년 서울미술관 기획전 포스터

이후 2018년 11월부터 2019년 4월 말까지 열린 서울미술관 신관 개관 기획전 <다색조선; 폴 자쿨레>는 자쿨레의 작품 세계에 관한 관심을 다시 깨웠습니다. 이때 공개된 자쿨레의 작품은 20여 점입니다. 목판화로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크기에 특유의 다채로운 색이 살아 있는 작품들이 깊은 인상을 남겼죠.

자쿨레의 판화 37점이 한꺼번에 경매에 나왔습니다. 자쿨레가 한국을 소재로 완성한 판화가 정확히 몇 점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경매에 나온 37점 모두 한국을 소개로 한 작품입니다. 크기는 가로로 긴 것과 세로로 긴 것 모두 30, 39cm로 같습니다. 작품 한쪽에 작가의 서명과 도장이 남아 있고, 윤곽선 바깥에 작품 제목이 적혀 있습니다. 폴 자쿨레의 한국 시리즈 전작으로 봐도 손색이 없는 듯합니다.

폴 자쿨레 〈도자기 장인 Le Maitre Potier〉 (사진제공: 서울옥션)폴 자쿨레 〈도자기 장인 Le Maitre Potier〉 (사진제공: 서울옥션)

탕건을 쓴 젊은 장인이 붓으로 표주박 모양의 도자기 표면에 유약을 바르고 있습니다. 색깔만 봐도 청자(靑瓷)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죠. 표면에 베풀어진 무늬는 모란당초문으로, 청자에 많이 등장하는 그 무늬입니다. 모양으로 보나 무늬로 보나 고려청자의 전통을 충실하게 그림에 담았군요.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김영사, 2011)이란 책을 펴낸 이충렬 작가는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근대 우리나라 도공의 청자 재현 작업을 보여주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조선의 도자기 장인이 청자를 만드는 모습을 그린 유일한 화가는 조선인이 아닌 외국인이었던 겁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그림에 보이는 작업 과정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점. 이충렬 작가의 설명입니다.

"판화에서 보이는 상태는 초벌구이 전인데, 그때는 도자기에 푸른빛이 돌지 않는다. 도자기에 푸른색이 나타나는 건 유약이 착색되는 재벌구이가 끝난 후인데, 그때는 이미 색이 나왔기 때문에 판화에서처럼 안료를 칠할 필요가 없다. 자쿨레는 아마도 청자에 고유한 비색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푸른색을 표현한 것 같다."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프랑스 태생인 건 맞지만, 평생을 동양인으로 산 자쿨레가 도자기 제작 과정을 몰랐을 리 없죠. 여러모로 흥미롭기 그지없는 그림입니다. 근대 한국의 풍경을 이토록 다채롭게 담아낸 작품이 또 있을까요.

폴 자쿨레 〈수박 Les Pasteques〉 (사진제공: 서울옥션)폴 자쿨레 〈수박 Les Pasteques〉 (사진제공: 서울옥션)

폴 자쿨레 〈싱싱한 붉은 고추 Les Bons Piments Rouges〉 (사진제공: 서울옥션)폴 자쿨레 〈싱싱한 붉은 고추 Les Bons Piments Rouges〉 (사진제공: 서울옥션)

일단 파스텔톤의 색채가 굉장히 화려하죠. 그러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을 보면 사람도, 풍경도 전통적인 우리네 모습과는 제법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국적으로 느껴지죠. 아마 보자마자 왜색이 짙다는 느낌을 받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프랑스인으로 태어나서, 일본인으로 살며, 한국을 그린 화가의 그림이라고.

한 개인 소장자가 그동안 정성껏 수집했다는 자쿨레의 판화 37점이 한꺼번에 경매에 나온 건 이례적입니다. 37점 모두 전시장에 걸려 있어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무료로 만나볼 수 있죠. 서울옥션 158회 미술품 경매는 오는 15일(화) 오후 4시부터, 경매번호 167번인 자쿨레의 <다색판화 37점 일괄>을 포함한 한국 전통 미술 경매는 오후 5시 반부터 진행됩니다.


전시장 전경 (사진제공: 손지성 서울옥션 홍보팀장)전시장 전경 (사진제공: 손지성 서울옥션 홍보팀장)

■서울옥션 제158회 미술품 경매
일시: 2020년 12월 15일 오후 4시
장소: 서울옥션 강남센터 (서울 강남구 언주로 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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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국적인 근대 조선의 얼굴’…경매에 나온 폴 자쿨레 판화
    • 입력 2020-12-12 08:00:47
    취재K
한국을 사랑했던 화가 폴 자쿨레(Paul Jacoulet, 1896~1960).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으로 3살 때 아버지가 일본 도쿄 외국어대학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 25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32살 때 어머니가 경성제대(서울대학교의 전신)에 재직하던 일본인 의학박사와 재혼하면서 서울로 거처를 옮김. 생애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내면서도 어머니를 만나러 수시로 서울을 다녀갔고, 그때마다 한국인들의 모습을 판화로 제작.

한국을 사랑한 화가 폴 자쿨레
이것이 폴 자쿨레라는 화가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대강의 이력입니다. 자쿨레가 한국인을 소재로 완성한 다색목판화는 지금까지 확인된 작품만 대략 40점 가까이 됩니다. 이 밖에도 100점이 넘는 수채화와 드로잉도 남겼다고 하는데요.

어머니가 서울에서 살았다는 점 말고도 한국과의 또 다른 인연이 있었습니다. 자쿨레는 1931년 당시 일본의 야간학교에 다니던 유학생 나영환을 조수로 채용합니다. 1934년에 서울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폴 자쿨레 판화전'을 열었죠. 1939년에는 조수 나영환의 동생 나용환도 조수로 채용했고, 1949년에는 나영환의 딸 나성순을 입양합니다.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각별한 인연을 맺었죠.

그래서 자쿨레의 판화에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본에서 배운 우키요에라는 다색 목판화 기법을 쓴 까닭에 표현 양식은 대단히 일본적이면서 이국적이죠.

국내에서 자쿨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은 뜻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입니다. 양아버지로부터 소유권을 물려받은 재일교포 나성순 씨가 2005년 12월 그동안 보관해오던 작품 165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기 때문이죠. 이때 기증된 작품들은 이듬해인 2006년 4월부터 6월까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아시아의 색채: 폴 자쿨레 판화>에서 공개됐습니다.

2018년 서울미술관 기획전 포스터
이후 2018년 11월부터 2019년 4월 말까지 열린 서울미술관 신관 개관 기획전 <다색조선; 폴 자쿨레>는 자쿨레의 작품 세계에 관한 관심을 다시 깨웠습니다. 이때 공개된 자쿨레의 작품은 20여 점입니다. 목판화로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크기에 특유의 다채로운 색이 살아 있는 작품들이 깊은 인상을 남겼죠.

자쿨레의 판화 37점이 한꺼번에 경매에 나왔습니다. 자쿨레가 한국을 소재로 완성한 판화가 정확히 몇 점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경매에 나온 37점 모두 한국을 소개로 한 작품입니다. 크기는 가로로 긴 것과 세로로 긴 것 모두 30, 39cm로 같습니다. 작품 한쪽에 작가의 서명과 도장이 남아 있고, 윤곽선 바깥에 작품 제목이 적혀 있습니다. 폴 자쿨레의 한국 시리즈 전작으로 봐도 손색이 없는 듯합니다.

폴 자쿨레 〈도자기 장인 Le Maitre Potier〉 (사진제공: 서울옥션)
탕건을 쓴 젊은 장인이 붓으로 표주박 모양의 도자기 표면에 유약을 바르고 있습니다. 색깔만 봐도 청자(靑瓷)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죠. 표면에 베풀어진 무늬는 모란당초문으로, 청자에 많이 등장하는 그 무늬입니다. 모양으로 보나 무늬로 보나 고려청자의 전통을 충실하게 그림에 담았군요.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김영사, 2011)이란 책을 펴낸 이충렬 작가는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근대 우리나라 도공의 청자 재현 작업을 보여주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조선의 도자기 장인이 청자를 만드는 모습을 그린 유일한 화가는 조선인이 아닌 외국인이었던 겁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그림에 보이는 작업 과정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점. 이충렬 작가의 설명입니다.

"판화에서 보이는 상태는 초벌구이 전인데, 그때는 도자기에 푸른빛이 돌지 않는다. 도자기에 푸른색이 나타나는 건 유약이 착색되는 재벌구이가 끝난 후인데, 그때는 이미 색이 나왔기 때문에 판화에서처럼 안료를 칠할 필요가 없다. 자쿨레는 아마도 청자에 고유한 비색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푸른색을 표현한 것 같다."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프랑스 태생인 건 맞지만, 평생을 동양인으로 산 자쿨레가 도자기 제작 과정을 몰랐을 리 없죠. 여러모로 흥미롭기 그지없는 그림입니다. 근대 한국의 풍경을 이토록 다채롭게 담아낸 작품이 또 있을까요.

폴 자쿨레 〈수박 Les Pasteques〉 (사진제공: 서울옥션)
폴 자쿨레 〈싱싱한 붉은 고추 Les Bons Piments Rouges〉 (사진제공: 서울옥션)
일단 파스텔톤의 색채가 굉장히 화려하죠. 그러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을 보면 사람도, 풍경도 전통적인 우리네 모습과는 제법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국적으로 느껴지죠. 아마 보자마자 왜색이 짙다는 느낌을 받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프랑스인으로 태어나서, 일본인으로 살며, 한국을 그린 화가의 그림이라고.

한 개인 소장자가 그동안 정성껏 수집했다는 자쿨레의 판화 37점이 한꺼번에 경매에 나온 건 이례적입니다. 37점 모두 전시장에 걸려 있어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무료로 만나볼 수 있죠. 서울옥션 158회 미술품 경매는 오는 15일(화) 오후 4시부터, 경매번호 167번인 자쿨레의 <다색판화 37점 일괄>을 포함한 한국 전통 미술 경매는 오후 5시 반부터 진행됩니다.


전시장 전경 (사진제공: 손지성 서울옥션 홍보팀장)
■서울옥션 제158회 미술품 경매
일시: 2020년 12월 15일 오후 4시
장소: 서울옥션 강남센터 (서울 강남구 언주로 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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