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베일에 싸여 있던 ‘사행기록화’ 희귀본 최초 공개

입력 2020.12.1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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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 무사 귀환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림을 그려 남겼습니다. 이걸 '사행기록화'라고 합니다. 사신 행차를 기록하는 그림이라는 뜻이죠. 조선 초기 사신단은 주로 육로로 중국을 방문했는데, 조선 중기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인 17세기 초, 후금이 요동지역을 점령하면서 기존 육로가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바닷길을 통한 사행이 일반적이었는데, 당연히 여정은 더 길고 험했습니다.

바닷길을 통한 '해로 사행'은 1624년 죽천 이덕형 사행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데요. 정사 이덕형과 부사 오숙, 서장관 홍익한으로 이뤄진 사신단은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에 있는 선사포에서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넌 뒤 육로로 북경까지 갔습니다. 왕복 5천km에 달하는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었죠.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세 사람은 이를 기념해 중국행 여정을 25폭의 그림에 담은 화첩 세 본을 만들어 나눠 가집니다. 조선시대 '해로사행기록화'로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세 개의 원본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베껴 만든 '모사본
<항해조천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 무렵 모사한 것으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항해조천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 무렵 모사한 것으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옛 기록에는 이덕형 본은 병자호란 때 소실됐고, 오숙 본도 사라졌다고 돼 있습니다. 홍익한 본은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존재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그 이후 행방은 묘연합니다.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모두 원본을 베껴 만든 이른바 '모사본'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립중앙박물관, 육군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고, 개인 소장품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품인 <연행도폭>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항해조천도>와 <조천도>, 개인 소장품인 <제항승람도>는 원본과 같이 25폭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반면 육군박물관이 소장 중인 <항해조천도>는 18폭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또 <연행도폭>은 화풍을 볼 때 17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전문가 의견이 있지만,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18세기 후반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항해조천도> 중 선사포 출항 장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항해조천도> 중 선사포 출항 장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천도>  『항해조천도』의 모사본으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조천도> 『항해조천도』의 모사본으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희귀본 최초 공개

 <제항승람첩> 두 권으로 이뤄진 화첩. 이덕형의 후손이 최근까지 소장 <제항승람첩> 두 권으로 이뤄진 화첩. 이덕형의 후손이 최근까지 소장
그런데 최근 사신단의 정사였던 이덕형의 후손에게 대대로 전해오던 화첩이 최초로 KBS에 공개됐습니다. 학계에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희귀본입니다. 화첩은 두 권으로 이뤄져 있고, 표지에 <제항승람>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습니다. 그림은 배를 타고 출발하는 날부터 중국의 여러 도시를 거쳐 수도 북경에 이르는 여정, 그리고 출발지였던 평안북도 선사포에 다시 도착하는 장면까지가 그림 25폭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림 수준도 다른 모사본보다 뛰어나다는 평가입니다. 바닷길을 묘사한 장면들을 보면, 항해 초반 잔잔히 일렁이던 파도와 깊은 바다로 갈수록 거칠어지는 파도가 대조적으로 잘 표현돼 있습니다. 특히 망망대해의 파도를 주먹 쥔 사람의 손처럼 표현한 것은 조선 중기 큰 파도를 그리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라고, 황정수 미술사가는 설명했습니다. 또 뱃멀미가 심해지면서 물이 회오리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헛것'이 보이는 상황을 '용오름'으로 표현한 장면도 있는데요. 다른 모사본들에 비해 용을 그린 솜씨가 굉장히 뛰어나, 당시 도화서(조선 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관청)에 소속된 궁중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황정수 미술사가는 추정했습니다.
 <제항승람첩> 중 망망대해를 묘사한 부분. 마치 주먹 쥔 손처럼 파도를 표현한 부분이 눈에 띈다 <제항승람첩> 중 망망대해를 묘사한 부분. 마치 주먹 쥔 손처럼 파도를 표현한 부분이 눈에 띈다
 <제항승람첩> 중 바닷길 묘사 부분. 악천후를 만난 상황을 '용오름'으로 표현한 부분이 눈에 띈다. <제항승람첩> 중 바닷길 묘사 부분. 악천후를 만난 상황을 '용오름'으로 표현한 부분이 눈에 띈다.
■ "가장 이른 원본일 가능성 크다"

이미지 캡션<제항승람첩> 첫 장에 있는 이덕형 선생의 글이미지 캡션<제항승람첩> 첫 장에 있는 이덕형 선생의 글
뛰어난 그림 수준 외에도 이 화첩에는 유독 눈에 띄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첫 장에 있는 이덕형 선생의 글입니다. 한문으로 돼 있는 글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듬해인 갑자년(1624)에 내가 외람되게 사은·주청(謝恩奏請)의 명을 받아 부사(副使) 오숙(吳䎘)공, 서장관(書狀官) 홍습(洪霫, 홍익한)공과 함께 험난한 바닷길을 건너 제(齊, 산동성)나라 조(趙, 하북성)나라를 경유했는데 왕래한 거리가 만여 리였다. 경유하며 본 섬들과 명승지 등을 그림으로 그려 장대한 유람을 떠올리고 훗날 사신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는 이들에게 참고하게 하려 한다. (추신. 홍공(洪公)은 뒤에 흉인(凶人)의 이름과 겹친 것을 회피해 익한(翼漢)으로 개명했다.)

이는 이덕형 선생이 사행을 다녀온 감상과 함께 이 그림을 제작하게 된 이유를 담은 서문입니다. 현존하는 모사본 중에도 서문이 남아 있는 본이 있지만, 필체가 다소 변형됐고 글씨도 작습니다. 반면 이번에 확인된 화첩에 담긴 서문은 화첩에 꽉 찰 만큼 글씨가 크고, 이덕형 선생의 필체와도 상당히 비슷하다는 게 전문가 설명입니다. 적어도 원본에 가장 가까운 화첩일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입니다.

이미지 캡션<제항승람첩> 맨 뒷장 이덕형 선생 외증손자(남취명 1661~1741년)의 감상문 이미지 캡션<제항승람첩> 맨 뒷장 이덕형 선생 외증손자(남취명 1661~1741년)의 감상문
두 번째 특징은 화첩 맨 마지막 장에 있는 이덕형 선생 외증손자 남취명( 1661~1741년)
의 발문(감상문)입니다. 글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그림은 바로 나의 (외)증조부 죽천공(이덕형)께서 수로를 통해 조천(朝天, 명나라 찾아감)하셨을 때 그려진 것이다. 파도가 일렁이는 먼 길, 용이 움켜쥐고 고래가 삼키려는 곳에 목숨을 맡기면서도 바다 위 섬들을 하나하나 나열하고, 거리 수치와 등주(登州)와 래주(萊州)에 도착하는 장면, 연도에 보이는 곳들을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빠짐없이 기록했으니 이는 단지 완상의 자료에만 그치지 않는다.
내가 정유년(1717)에 북쪽으로 가며(정사正使로 청나라에 감) 돌아올 때 산해관(山海關) 망해정(望海亭)에 올랐는데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의 큰 바다가 저 멀리 눈앞에 펼쳐졌다. 북쪽으로 가는 길은 이 길과 견주면 지척일 뿐인데도 이 길을 가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있기도 하니 아! 아! 이 그림이 후대에 보여주려는 간곡한 뜻은 깊고도 절실하다 할 수 있으며, 이에 느낀 바가 있어 이와 같이 적는다.
이정(梨亭, 남취명南就明) 적음."

주목되는 부분은 바로 첫 문장입니다. 외증조부인 이덕형 선생이 바닷길을 통해 명나라에 갔을 때 그려진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발문(감상문)을 통해 작품의 내력을 기록한 건 이 화첩이 유일합니다. 물론 이 그림 또한 원본을 모사하고, 외증손자인 남취명이 감상문만 덧붙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누구의 작품을 빌려와서 베껴 그린 것'이라고 기록하는 게 당시의 풍습이었다는데,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결국, 이덕형 선생의 글 서문과 외증손자의 글 발문에 비춰볼 때, 이 화첩이 어쩌면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이덕형 원본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원본이라면 조선 미술사는 물론 한-중 교류사 연구에 획기적인 사료가 될 것으로 보여, 국보급으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입니다.

■ "모사본이라 해도 문화재적 가치 매우 커"

이미지 캡션<제항승람첩> 중 북경을 묘사한 부분. 전체 25폭 중 유달리 손때가 많이 묻어 있다.이미지 캡션<제항승람첩> 중 북경을 묘사한 부분. 전체 25폭 중 유달리 손때가 많이 묻어 있다.
여러 정황이 원본일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지만, 만약 이 화첩 또한 모사본에 불과하다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없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렸듯이 그림 자체의 수준이 뛰어나 미술사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또 발문을 남긴 이덕형 외증손자 남취명이 1741년까지 살았던 점에 미뤄 적어도 이 화첩은 18세기 초 무렵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 18세기 후반 이후로 추정되는 다른 모사본보다 먼저 제작됐다는 뜻입니다.

 <제항승람첩> 중 명나라의 도시를 묘사한 부분. 17세기 중국의 산과 강 풍경이 잘 나타나 있다. <제항승람첩> 중 명나라의 도시를 묘사한 부분. 17세기 중국의 산과 강 풍경이 잘 나타나 있다.
<제항승람첩> 중 중국 명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부분<제항승람첩> 중 중국 명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부분
아울러 원본과 같이 25폭이 그대로 남아있고 서문과 발문도 있어서, 그 시대의 사행기록화를 연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당시의 회화사에서 산과 바다와 강, 도시 풍경, 또는 인물 기록화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물론 원본으로 판명 난다면 그 가치는 더할 나위 없이 커지겠죠. 이는 앞으로 학계가 연구해서 밝혀야 할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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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 베일에 싸여 있던 ‘사행기록화’ 희귀본 최초 공개
    • 입력 2020-12-12 16:55:18
    취재K

조선 시대에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 무사 귀환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림을 그려 남겼습니다. 이걸 '사행기록화'라고 합니다. 사신 행차를 기록하는 그림이라는 뜻이죠. 조선 초기 사신단은 주로 육로로 중국을 방문했는데, 조선 중기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인 17세기 초, 후금이 요동지역을 점령하면서 기존 육로가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바닷길을 통한 사행이 일반적이었는데, 당연히 여정은 더 길고 험했습니다.

바닷길을 통한 '해로 사행'은 1624년 죽천 이덕형 사행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데요. 정사 이덕형과 부사 오숙, 서장관 홍익한으로 이뤄진 사신단은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에 있는 선사포에서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넌 뒤 육로로 북경까지 갔습니다. 왕복 5천km에 달하는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었죠.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세 사람은 이를 기념해 중국행 여정을 25폭의 그림에 담은 화첩 세 본을 만들어 나눠 가집니다. 조선시대 '해로사행기록화'로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세 개의 원본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베껴 만든 '모사본
<항해조천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 무렵 모사한 것으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옛 기록에는 이덕형 본은 병자호란 때 소실됐고, 오숙 본도 사라졌다고 돼 있습니다. 홍익한 본은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존재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그 이후 행방은 묘연합니다.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모두 원본을 베껴 만든 이른바 '모사본'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립중앙박물관, 육군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고, 개인 소장품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품인 <연행도폭>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항해조천도>와 <조천도>, 개인 소장품인 <제항승람도>는 원본과 같이 25폭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반면 육군박물관이 소장 중인 <항해조천도>는 18폭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또 <연행도폭>은 화풍을 볼 때 17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전문가 의견이 있지만,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18세기 후반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항해조천도> 중 선사포 출항 장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천도>  『항해조천도』의 모사본으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희귀본 최초 공개

 <제항승람첩> 두 권으로 이뤄진 화첩. 이덕형의 후손이 최근까지 소장
그런데 최근 사신단의 정사였던 이덕형의 후손에게 대대로 전해오던 화첩이 최초로 KBS에 공개됐습니다. 학계에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희귀본입니다. 화첩은 두 권으로 이뤄져 있고, 표지에 <제항승람>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습니다. 그림은 배를 타고 출발하는 날부터 중국의 여러 도시를 거쳐 수도 북경에 이르는 여정, 그리고 출발지였던 평안북도 선사포에 다시 도착하는 장면까지가 그림 25폭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림 수준도 다른 모사본보다 뛰어나다는 평가입니다. 바닷길을 묘사한 장면들을 보면, 항해 초반 잔잔히 일렁이던 파도와 깊은 바다로 갈수록 거칠어지는 파도가 대조적으로 잘 표현돼 있습니다. 특히 망망대해의 파도를 주먹 쥔 사람의 손처럼 표현한 것은 조선 중기 큰 파도를 그리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라고, 황정수 미술사가는 설명했습니다. 또 뱃멀미가 심해지면서 물이 회오리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헛것'이 보이는 상황을 '용오름'으로 표현한 장면도 있는데요. 다른 모사본들에 비해 용을 그린 솜씨가 굉장히 뛰어나, 당시 도화서(조선 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관청)에 소속된 궁중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황정수 미술사가는 추정했습니다.
 <제항승람첩> 중 망망대해를 묘사한 부분. 마치 주먹 쥔 손처럼 파도를 표현한 부분이 눈에 띈다  <제항승람첩> 중 바닷길 묘사 부분. 악천후를 만난 상황을 '용오름'으로 표현한 부분이 눈에 띈다. ■ "가장 이른 원본일 가능성 크다"

이미지 캡션<제항승람첩> 첫 장에 있는 이덕형 선생의 글뛰어난 그림 수준 외에도 이 화첩에는 유독 눈에 띄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첫 장에 있는 이덕형 선생의 글입니다. 한문으로 돼 있는 글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듬해인 갑자년(1624)에 내가 외람되게 사은·주청(謝恩奏請)의 명을 받아 부사(副使) 오숙(吳䎘)공, 서장관(書狀官) 홍습(洪霫, 홍익한)공과 함께 험난한 바닷길을 건너 제(齊, 산동성)나라 조(趙, 하북성)나라를 경유했는데 왕래한 거리가 만여 리였다. 경유하며 본 섬들과 명승지 등을 그림으로 그려 장대한 유람을 떠올리고 훗날 사신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는 이들에게 참고하게 하려 한다. (추신. 홍공(洪公)은 뒤에 흉인(凶人)의 이름과 겹친 것을 회피해 익한(翼漢)으로 개명했다.)

이는 이덕형 선생이 사행을 다녀온 감상과 함께 이 그림을 제작하게 된 이유를 담은 서문입니다. 현존하는 모사본 중에도 서문이 남아 있는 본이 있지만, 필체가 다소 변형됐고 글씨도 작습니다. 반면 이번에 확인된 화첩에 담긴 서문은 화첩에 꽉 찰 만큼 글씨가 크고, 이덕형 선생의 필체와도 상당히 비슷하다는 게 전문가 설명입니다. 적어도 원본에 가장 가까운 화첩일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입니다.

이미지 캡션<제항승람첩> 맨 뒷장 이덕형 선생 외증손자(남취명 1661~1741년)의 감상문 두 번째 특징은 화첩 맨 마지막 장에 있는 이덕형 선생 외증손자 남취명( 1661~1741년)
의 발문(감상문)입니다. 글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그림은 바로 나의 (외)증조부 죽천공(이덕형)께서 수로를 통해 조천(朝天, 명나라 찾아감)하셨을 때 그려진 것이다. 파도가 일렁이는 먼 길, 용이 움켜쥐고 고래가 삼키려는 곳에 목숨을 맡기면서도 바다 위 섬들을 하나하나 나열하고, 거리 수치와 등주(登州)와 래주(萊州)에 도착하는 장면, 연도에 보이는 곳들을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빠짐없이 기록했으니 이는 단지 완상의 자료에만 그치지 않는다.
내가 정유년(1717)에 북쪽으로 가며(정사正使로 청나라에 감) 돌아올 때 산해관(山海關) 망해정(望海亭)에 올랐는데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의 큰 바다가 저 멀리 눈앞에 펼쳐졌다. 북쪽으로 가는 길은 이 길과 견주면 지척일 뿐인데도 이 길을 가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있기도 하니 아! 아! 이 그림이 후대에 보여주려는 간곡한 뜻은 깊고도 절실하다 할 수 있으며, 이에 느낀 바가 있어 이와 같이 적는다.
이정(梨亭, 남취명南就明) 적음."

주목되는 부분은 바로 첫 문장입니다. 외증조부인 이덕형 선생이 바닷길을 통해 명나라에 갔을 때 그려진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발문(감상문)을 통해 작품의 내력을 기록한 건 이 화첩이 유일합니다. 물론 이 그림 또한 원본을 모사하고, 외증손자인 남취명이 감상문만 덧붙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누구의 작품을 빌려와서 베껴 그린 것'이라고 기록하는 게 당시의 풍습이었다는데,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결국, 이덕형 선생의 글 서문과 외증손자의 글 발문에 비춰볼 때, 이 화첩이 어쩌면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이덕형 원본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원본이라면 조선 미술사는 물론 한-중 교류사 연구에 획기적인 사료가 될 것으로 보여, 국보급으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입니다.

■ "모사본이라 해도 문화재적 가치 매우 커"

이미지 캡션<제항승람첩> 중 북경을 묘사한 부분. 전체 25폭 중 유달리 손때가 많이 묻어 있다.여러 정황이 원본일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지만, 만약 이 화첩 또한 모사본에 불과하다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없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렸듯이 그림 자체의 수준이 뛰어나 미술사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또 발문을 남긴 이덕형 외증손자 남취명이 1741년까지 살았던 점에 미뤄 적어도 이 화첩은 18세기 초 무렵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 18세기 후반 이후로 추정되는 다른 모사본보다 먼저 제작됐다는 뜻입니다.

 <제항승람첩> 중 명나라의 도시를 묘사한 부분. 17세기 중국의 산과 강 풍경이 잘 나타나 있다. <제항승람첩> 중 중국 명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부분아울러 원본과 같이 25폭이 그대로 남아있고 서문과 발문도 있어서, 그 시대의 사행기록화를 연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당시의 회화사에서 산과 바다와 강, 도시 풍경, 또는 인물 기록화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물론 원본으로 판명 난다면 그 가치는 더할 나위 없이 커지겠죠. 이는 앞으로 학계가 연구해서 밝혀야 할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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