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법농단’ 최초 거부자”…증언대 선 그때 그 판사

입력 2020.12.16 (06:03) 수정 2020.12.16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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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한 판사의 사직서 제출을 계기로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한국 사법부의 내부고발자로 주목 받았던 그 판사는, 그로부터 4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은 더 이상 법원에 있지 않습니다. 지난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 이야기입니다. 사법농단 사건의 시작점에 서 있는 인물인 그가 어제(15일) 처음으로 관련 사건 재판 증언대에 섰습니다. 사건의 핵심 인물로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된 겁니다.

이 의원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 증언 의무를 충실히 다하기 위해 증인으로 출석했다”며 “오늘 공개된 법정에서 증언하는 만큼, 제가 ‘사법농단을 최초로 폭로한 판사’가 아니라 ‘사법농단을 최초로 거부했던 판사’라는 점도 앞으로 정확하게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증인신문에 임하는 소감을 밝혔는데요. 3시간가량 진행된 어제의 주요 증언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 공지글의 이면

우선 증언의 배경이 되는 내용을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2017년 2월 13일, 법원 내부의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기관인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법원 내부망에 “중복가입된 전문분야연구회 탈퇴 등에 관한 안내 말씀”이라는 공지글을 게시했습니다. 법원 내 연구회 여러 곳에 중복으로 가입한 판사들은, 가장 관심있는 연구회 1곳만 남기고 나머지 연구회에서 모두 탈퇴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연구회 중복가입을 금지한 기존 법원 예규가 있음에도, 중복가입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함이라는 취지의 부연 설명도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당시 판사들 사이에서는 이 공지의 배경에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확산됐습니다. 15개의 연구회 중 하나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약화를 노린 조치라는 겁니다. 2011년 8월 만들어진 국제인권법연구회는 2016년 3월 기준 431명의 판사가 가입돼 있었고, 규모로 치면 연구회 중 세 번째로 컸습니다. 젊은 판사들이 많이 가입돼 있어 세미나와 소모임 등 그 어떤 연구회보다 활발히 활동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연구회 소속 판사들의 소모임인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은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을 견제하는 활동을 하면서,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이 추진하던 상고법원 설립을 두고 끝장 토론회까지 열었던 이력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법원행정처 간부들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껄끄러워했고, 중복가입 상태 해소를 위해 판사들이 연구회를 탈퇴하도록 해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회원 규모를 줄이고 세를 약화시키려 했다는 게 사법농단 수사팀의 결론입니다. 실제로 유사한 검토 내용이 담긴 법원행정처 내부 문건이 수사 과정에서 다수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탄희 당시 판사도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으로서 연구회 기획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2016년 3월 법원행정처에서 생산된 ‘전문분야 연구회 개선방안(대외비)’ 문건 중 17쪽 발췌2016년 3월 법원행정처에서 생산된 ‘전문분야 연구회 개선방안(대외비)’ 문건 중 17쪽 발췌

■ 법원행정처의 ‘직권남용죄’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소속 판사였던 이탄희 의원은 2017년 2월 9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인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10년 동안 재판만 하던 판사가 갑자기 행정부와 국회 등 외부기관을 상대하는 사법행정 업무를 수행하게 된 겁니다.

인사 발령 나흘 뒤 올라온 법원행정처의 이른바 ‘중복가입 해소’ 공지글에 대해, 이 의원의 선임이었던 임효량 판사(심의관)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고 합니다. “중복가입 해소 조치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겨냥한 것”이고, “블랙리스트 프레임에 들어가면 다 끝장”이라는 취지의 얘기였습니다. 이 의원은 이 말을 듣고 법원행정처가 불법 소지가 있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 검사: 증인은 임효량 심의관의 “블랙리스트 프레임” 발언을 당시 어떻게 이해하셨나요?
- 이탄희: 특별히 제가 어떻게 해석했다는 기억은 없고요. 즉각적 판단이라기보다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더 고민을 하면서, 지금 법원행정처 내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대상으로 해서 적대적으로 펼치고 있는 이런 정책의 내용이, 집행되고 실행되고 있는 이 정책의 내용이, 법적인 본질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똑같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 해당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 그런 판단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의원은 “중복가입 해소 조치를 강제해서 (판사들로 하여금) 국제인권법연구회를 탈퇴하게 하게 만든다는 그런 의미에서,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에게 의무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생각했다고도 설명했습니다. 또 중복가입 해소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연구회 판사들에게 전달해달라는 법원행정처 간부(이규진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지시를 거부한 것은, “(이같은) 불법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판단해 하지 않은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법원행정처 조치의 위법성을 인식하게 된 이 의원은, 판사로서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다음날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직서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철회됐지만, 2년 뒤 이 의원은 또 다시 법원에 사직서를 내고 법원을 떠났습니다.)

■ 왜 이탄희인가

검찰은 이 의원이 이 시기에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배치된 것 역시, 국제인권법연구회 약화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이 의원을 비롯해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핵심 회원인 판사들을 법원행정처로 포섭해, 연구회에 대한 개입·통제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의원은 “당시 인사의 경위를 어떻게 본다고 특별히 주장한 바는 없다”고 했지만, 본인의 행정처 발령 등과 관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슷한 의심을 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가 이른바 ‘일석이조’ 사건입니다.

이 의원은 사직서를 제출한 당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통화를 했습니다. 대법원 진상조사와 검찰 조사에서 이 의원이 한 진술에 따르면 당시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 이탄희: 중복가입 탈퇴 조치(해소 조치)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타게팅(targeting)한 정책 결정이었다고 임효량 심의관님 통해서 들었습니다.
- 임종헌: (잠시 말이 없다가) 그 부분 내 책임 50% 인정할게요.
- 이탄희: 이규진 실장님이 국제인권법연구회에 개입하는 지시들을 했습니다.
- 임종헌: 그건 내 책임이 아닙니다.
[…]
- 이탄희: 저를 데려오실 때부터 연구회 관련 부수적인 목적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일석이조?
- 임종헌: 그래! 일석이조.

이 의원은 어제 법정에서도 “제가 (인사 배경에 대해) 의심이 가서 따져 물었는데 피고인(임종헌 전 차장)이 부수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취지로 답했다. 저를 달래는 취지가 아니라 그냥 솔직히 인정하겠다는 뉘앙스였다”면서, 그에 대해 큰 모욕감을 느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에 대해 임 전 차장은 자신은 “일석이조”라는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이 의원과의 통화 당시 당황한 상태였고, 이 의원의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대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그래그래”라고 수긍하는 취지로 반응했다고도 했습니다. 임 전 차장의 변호인은 당시 이 의원이 밤샘 고민 끝에 사직서를 제출한 직후라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며, 기억이 부정확할 수 있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임 전 차장은 특히 어제 법정에서 이 의원의 법원행정처 발령 경위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 의원은 어느 한 사람의 추천이 아니라 법원행정처 인사실에서 자체 판단하에 심의관 1순위 후보로 올린 판사였고, 업무 능력과 자세가 매우 훌륭하다는 평판 조회 후 심의관에 최종 임명됐다는 것이 인사권자였던 본인의 기억이라는 겁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 같은 사건, 다른 기억

이 의원과 임 전 차장의 기억은 다른 쟁점에서도 엇갈립니다.

이 의원은 당시 통화에서 “왜 법원행정처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려 하느냐”라고 따졌고, 그러자 임 전 차장이 “국제인권법연구회가 법원행정처를 와해시키려고 한다”면서 자신의 말을 거꾸로 맞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반면 임 전 차장은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직접 이 의원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 임종헌: “법원행정처는 국회, 행정부, 언론 등 대외관계에서 법원의 입장을 대변하고 기관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본 역할이다. 법원행정처 전체 업무 중 전문분야연구회 관련 부분은 업무 비중이 극히 미약하다. 증인이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해보면 오해가 해소될 것이다”라고 당시 증인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본인이 쓴 경위서에) 기재돼 있는데 이런 말 들은 기억이 있으신가요?
- 이탄희: 없고요. 그 당시 대화 상황이 차분하게 대화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 임종헌: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는 게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사 없어져도 그와 유사한 단체가 필연적으로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데... 없어지는 과정에서 내부 반발 등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되는데 어떻게 그걸 무릅쓰고 없애겠냐라고 당시 증인에게 설명한 것 같은데, 그건요?
- 이탄희: 기억 안 납니다.

■ "법원은 판사들의 것이 아닌 국민의 것"

증언을 마친 이 의원에게, 재판장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했습니다.

이 의원은 “오랜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며 “법원에서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1차 조사를 할 때 피고인(임종헌)을 포함해 다른 조사받았던 판사들께서 사실대로만 이야기해줬으면, 그때 어려웠다고 하면 2차 조사나 3차 조사할 때만이라도 있는 그대로 이야기만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저도 이제 2017년 2월의 제가 아니고, 직업도 바뀌었고 이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도 옛날하고는 많이 바뀐 거 같다”면서 “당시 저는 제 개인의 양심을 지키는 일에 집중했던 것인데, 지금은 법원 전체가 이 일을 겪고 나서 직업윤리가 확립됐으면, 그래서 이런 일이 다시 안 벌어질 거라는 믿음을 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의원은 그러나 밖에서 법원을 바라보면 무엇이 변했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며 “개인적으로 많은 사건을 겪고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며 3~4년을 보냈는데, 이건 그냥 물을 가르고 온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좀 힘들 때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의원은 또 임 전 차장이 과거 사석에서 “법원은 판사들의 것이고, 우리는 법원을 위해서 일하는 거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이어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는 동의할 수 없다. 법원은 국민들의 것이고 판사들은 법원을 빌려쓰는 것”이라며 “직업윤리를 다시 세우려고 하면 국민들 입장에서 바라볼 때 판사들에게 요구되는 수준이 무엇인가, 거기에 맞춰서 생각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어제 재판에서는 이탄희 의원과 함께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을 했고 특히 소모임 인사모에도 속해 있었던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전 판사)도 증언했습니다.

이수진 의원은 대법원 재판연구관 근무 기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2년 만인 2017년 2월 대전지방법원으로 전보된 이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수진 의원은 자신이 ‘법관 인사제도’에 관한 국제인권법연구회의 2017년 3월 학술대회 개최를 막아달라는 법원행정처 간부(이규진 실장)의 요구를 받았고,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인사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고 여러 차례 증언했습니다. 또 국제인권법연구회가 학술대회를 그대로 3월에 개최한다면, 법원행정처에서는 제재 조치로 ‘중복가입 해소 조치’ 등을 검토하고 있다는 말을 이규진 실장에게 들었다고도 말했습니다.

아울러 이수진 의원은 본인이 재판연구관으로서 업무능력에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대법관들에게 보고서를 잘썼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으며, 쉬운 사건 보다는 접수된 지 오래된 어려운 사건을 성의껏 해결하려다 보니 다른 재판연구관들에 비해 보고서 작성을 적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법원행정처 간부들에게 이수진 의원이 인사모 내부 정보를 몰래 알려줬던 것 아니냐는 의심에 대해서는, 당시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이자 행정처 간부이던 이규진 실장과 많은 교류가 있었지만 오해할 만한 일은 없었고 이같은 상황을 인사모 판사들에게 숨기려고 한 적도 없다며 부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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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사법농단’ 최초 거부자”…증언대 선 그때 그 판사
    • 입력 2020-12-16 06:03:24
    • 수정2020-12-16 10:21:49
    취재K

2017년 2월, 한 판사의 사직서 제출을 계기로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한국 사법부의 내부고발자로 주목 받았던 그 판사는, 그로부터 4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은 더 이상 법원에 있지 않습니다. 지난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 이야기입니다. 사법농단 사건의 시작점에 서 있는 인물인 그가 어제(15일) 처음으로 관련 사건 재판 증언대에 섰습니다. 사건의 핵심 인물로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된 겁니다.

이 의원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 증언 의무를 충실히 다하기 위해 증인으로 출석했다”며 “오늘 공개된 법정에서 증언하는 만큼, 제가 ‘사법농단을 최초로 폭로한 판사’가 아니라 ‘사법농단을 최초로 거부했던 판사’라는 점도 앞으로 정확하게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증인신문에 임하는 소감을 밝혔는데요. 3시간가량 진행된 어제의 주요 증언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 공지글의 이면

우선 증언의 배경이 되는 내용을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2017년 2월 13일, 법원 내부의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기관인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법원 내부망에 “중복가입된 전문분야연구회 탈퇴 등에 관한 안내 말씀”이라는 공지글을 게시했습니다. 법원 내 연구회 여러 곳에 중복으로 가입한 판사들은, 가장 관심있는 연구회 1곳만 남기고 나머지 연구회에서 모두 탈퇴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연구회 중복가입을 금지한 기존 법원 예규가 있음에도, 중복가입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함이라는 취지의 부연 설명도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당시 판사들 사이에서는 이 공지의 배경에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확산됐습니다. 15개의 연구회 중 하나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약화를 노린 조치라는 겁니다. 2011년 8월 만들어진 국제인권법연구회는 2016년 3월 기준 431명의 판사가 가입돼 있었고, 규모로 치면 연구회 중 세 번째로 컸습니다. 젊은 판사들이 많이 가입돼 있어 세미나와 소모임 등 그 어떤 연구회보다 활발히 활동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연구회 소속 판사들의 소모임인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은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을 견제하는 활동을 하면서,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이 추진하던 상고법원 설립을 두고 끝장 토론회까지 열었던 이력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법원행정처 간부들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껄끄러워했고, 중복가입 상태 해소를 위해 판사들이 연구회를 탈퇴하도록 해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회원 규모를 줄이고 세를 약화시키려 했다는 게 사법농단 수사팀의 결론입니다. 실제로 유사한 검토 내용이 담긴 법원행정처 내부 문건이 수사 과정에서 다수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탄희 당시 판사도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으로서 연구회 기획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2016년 3월 법원행정처에서 생산된 ‘전문분야 연구회 개선방안(대외비)’ 문건 중 17쪽 발췌
■ 법원행정처의 ‘직권남용죄’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소속 판사였던 이탄희 의원은 2017년 2월 9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인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10년 동안 재판만 하던 판사가 갑자기 행정부와 국회 등 외부기관을 상대하는 사법행정 업무를 수행하게 된 겁니다.

인사 발령 나흘 뒤 올라온 법원행정처의 이른바 ‘중복가입 해소’ 공지글에 대해, 이 의원의 선임이었던 임효량 판사(심의관)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고 합니다. “중복가입 해소 조치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겨냥한 것”이고, “블랙리스트 프레임에 들어가면 다 끝장”이라는 취지의 얘기였습니다. 이 의원은 이 말을 듣고 법원행정처가 불법 소지가 있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 검사: 증인은 임효량 심의관의 “블랙리스트 프레임” 발언을 당시 어떻게 이해하셨나요?
- 이탄희: 특별히 제가 어떻게 해석했다는 기억은 없고요. 즉각적 판단이라기보다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더 고민을 하면서, 지금 법원행정처 내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대상으로 해서 적대적으로 펼치고 있는 이런 정책의 내용이, 집행되고 실행되고 있는 이 정책의 내용이, 법적인 본질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똑같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 해당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 그런 판단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의원은 “중복가입 해소 조치를 강제해서 (판사들로 하여금) 국제인권법연구회를 탈퇴하게 하게 만든다는 그런 의미에서,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에게 의무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생각했다고도 설명했습니다. 또 중복가입 해소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연구회 판사들에게 전달해달라는 법원행정처 간부(이규진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지시를 거부한 것은, “(이같은) 불법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판단해 하지 않은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법원행정처 조치의 위법성을 인식하게 된 이 의원은, 판사로서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다음날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직서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철회됐지만, 2년 뒤 이 의원은 또 다시 법원에 사직서를 내고 법원을 떠났습니다.)

■ 왜 이탄희인가

검찰은 이 의원이 이 시기에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배치된 것 역시, 국제인권법연구회 약화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이 의원을 비롯해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핵심 회원인 판사들을 법원행정처로 포섭해, 연구회에 대한 개입·통제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의원은 “당시 인사의 경위를 어떻게 본다고 특별히 주장한 바는 없다”고 했지만, 본인의 행정처 발령 등과 관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슷한 의심을 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가 이른바 ‘일석이조’ 사건입니다.

이 의원은 사직서를 제출한 당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통화를 했습니다. 대법원 진상조사와 검찰 조사에서 이 의원이 한 진술에 따르면 당시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 이탄희: 중복가입 탈퇴 조치(해소 조치)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타게팅(targeting)한 정책 결정이었다고 임효량 심의관님 통해서 들었습니다.
- 임종헌: (잠시 말이 없다가) 그 부분 내 책임 50% 인정할게요.
- 이탄희: 이규진 실장님이 국제인권법연구회에 개입하는 지시들을 했습니다.
- 임종헌: 그건 내 책임이 아닙니다.
[…]
- 이탄희: 저를 데려오실 때부터 연구회 관련 부수적인 목적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일석이조?
- 임종헌: 그래! 일석이조.

이 의원은 어제 법정에서도 “제가 (인사 배경에 대해) 의심이 가서 따져 물었는데 피고인(임종헌 전 차장)이 부수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취지로 답했다. 저를 달래는 취지가 아니라 그냥 솔직히 인정하겠다는 뉘앙스였다”면서, 그에 대해 큰 모욕감을 느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에 대해 임 전 차장은 자신은 “일석이조”라는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이 의원과의 통화 당시 당황한 상태였고, 이 의원의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대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그래그래”라고 수긍하는 취지로 반응했다고도 했습니다. 임 전 차장의 변호인은 당시 이 의원이 밤샘 고민 끝에 사직서를 제출한 직후라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며, 기억이 부정확할 수 있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임 전 차장은 특히 어제 법정에서 이 의원의 법원행정처 발령 경위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 의원은 어느 한 사람의 추천이 아니라 법원행정처 인사실에서 자체 판단하에 심의관 1순위 후보로 올린 판사였고, 업무 능력과 자세가 매우 훌륭하다는 평판 조회 후 심의관에 최종 임명됐다는 것이 인사권자였던 본인의 기억이라는 겁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 같은 사건, 다른 기억

이 의원과 임 전 차장의 기억은 다른 쟁점에서도 엇갈립니다.

이 의원은 당시 통화에서 “왜 법원행정처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려 하느냐”라고 따졌고, 그러자 임 전 차장이 “국제인권법연구회가 법원행정처를 와해시키려고 한다”면서 자신의 말을 거꾸로 맞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반면 임 전 차장은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직접 이 의원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 임종헌: “법원행정처는 국회, 행정부, 언론 등 대외관계에서 법원의 입장을 대변하고 기관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본 역할이다. 법원행정처 전체 업무 중 전문분야연구회 관련 부분은 업무 비중이 극히 미약하다. 증인이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해보면 오해가 해소될 것이다”라고 당시 증인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본인이 쓴 경위서에) 기재돼 있는데 이런 말 들은 기억이 있으신가요?
- 이탄희: 없고요. 그 당시 대화 상황이 차분하게 대화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 임종헌: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는 게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사 없어져도 그와 유사한 단체가 필연적으로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데... 없어지는 과정에서 내부 반발 등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되는데 어떻게 그걸 무릅쓰고 없애겠냐라고 당시 증인에게 설명한 것 같은데, 그건요?
- 이탄희: 기억 안 납니다.

■ "법원은 판사들의 것이 아닌 국민의 것"

증언을 마친 이 의원에게, 재판장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했습니다.

이 의원은 “오랜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며 “법원에서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1차 조사를 할 때 피고인(임종헌)을 포함해 다른 조사받았던 판사들께서 사실대로만 이야기해줬으면, 그때 어려웠다고 하면 2차 조사나 3차 조사할 때만이라도 있는 그대로 이야기만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저도 이제 2017년 2월의 제가 아니고, 직업도 바뀌었고 이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도 옛날하고는 많이 바뀐 거 같다”면서 “당시 저는 제 개인의 양심을 지키는 일에 집중했던 것인데, 지금은 법원 전체가 이 일을 겪고 나서 직업윤리가 확립됐으면, 그래서 이런 일이 다시 안 벌어질 거라는 믿음을 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의원은 그러나 밖에서 법원을 바라보면 무엇이 변했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며 “개인적으로 많은 사건을 겪고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며 3~4년을 보냈는데, 이건 그냥 물을 가르고 온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좀 힘들 때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의원은 또 임 전 차장이 과거 사석에서 “법원은 판사들의 것이고, 우리는 법원을 위해서 일하는 거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이어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는 동의할 수 없다. 법원은 국민들의 것이고 판사들은 법원을 빌려쓰는 것”이라며 “직업윤리를 다시 세우려고 하면 국민들 입장에서 바라볼 때 판사들에게 요구되는 수준이 무엇인가, 거기에 맞춰서 생각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어제 재판에서는 이탄희 의원과 함께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을 했고 특히 소모임 인사모에도 속해 있었던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전 판사)도 증언했습니다.

이수진 의원은 대법원 재판연구관 근무 기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2년 만인 2017년 2월 대전지방법원으로 전보된 이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수진 의원은 자신이 ‘법관 인사제도’에 관한 국제인권법연구회의 2017년 3월 학술대회 개최를 막아달라는 법원행정처 간부(이규진 실장)의 요구를 받았고,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인사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고 여러 차례 증언했습니다. 또 국제인권법연구회가 학술대회를 그대로 3월에 개최한다면, 법원행정처에서는 제재 조치로 ‘중복가입 해소 조치’ 등을 검토하고 있다는 말을 이규진 실장에게 들었다고도 말했습니다.

아울러 이수진 의원은 본인이 재판연구관으로서 업무능력에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대법관들에게 보고서를 잘썼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으며, 쉬운 사건 보다는 접수된 지 오래된 어려운 사건을 성의껏 해결하려다 보니 다른 재판연구관들에 비해 보고서 작성을 적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법원행정처 간부들에게 이수진 의원이 인사모 내부 정보를 몰래 알려줬던 것 아니냐는 의심에 대해서는, 당시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이자 행정처 간부이던 이규진 실장과 많은 교류가 있었지만 오해할 만한 일은 없었고 이같은 상황을 인사모 판사들에게 숨기려고 한 적도 없다며 부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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