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4천억 문 유류 공급 담합, 한국이라면 과징금 얼마 나왔을까

입력 2020.12.17 (20:00) 수정 2020.12.17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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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에너지,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S-OIL(에쓰오일). 국내 4대 정유회사가 주한미군 유류공급 입찰에서 담합했다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습니다. 담합으로 올린 매출만 7천5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과징금과 검찰 고발은 면했습니다. 이들 정유업체가 이미 미국에서 4천억 원에 이르는 벌금과 배상금을 물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미국 법무부는 지난해 11월과 올해 3월 이들 정유회사가 주한미군 유류 납품 과정에서 담합한 것을 적발해 벌금과 배상금을 내는 조건으로 민·형사 소송을 해결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습니다. 벌금만 우리 돈으로 천750억 원이 넘고, 민사배상금이 2천300억 원 수준입니다.

업체별로는 SK에너지와 GS칼텍스의 벌금과 배상금을 합한 금액은 각각 천391억 원, 천163억 원으로 천억 원이 넘었습니다. 다음으로 현대오일뱅크 930억 원, 에쓰오일 486억 원, 에쓰오일의 납품을 대행한 한진 85억 원, 현대오일뱅크의 납품 대행사 지어신코리아 22억 원 순입니다.


■한국에서 7,500억 입찰 담합하면 과징금은 얼마?

관련 매출의 절반 이상을 대가로 치른 셈인데, 이들 회사가 한국 정부 입찰에서 담합했다면 과징금을 얼마나 물었을까? 공정위가 아무리 많이 부과하려고 해도 6개사 합계 750억 원을 넘기는 어렵습니다. 공정거래법에서 담합 과징금 한도를 관련 매출의 10%로 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정위가 과징금을 산정할 때 먼저 행위의 중대성을 판단해 점수를 매기고 이에 따라 부과기준율을 정하는데 한도는 10%이지만 3~5% 수준에서 정해지는 게 일반적입니다. 중대성은 담합에 따른 피해 범위와 부당이득의 크기, 전후 사정 등을 따지는데 5%를 초과하는 사례가 흔하진 않습니다.

미국에서 벌금만 천700억 원이 넘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나는 가장 큰 이유는 법체계가 달라서입니다.

미국은 담합 사건의 형벌을 '플리바게닝'으로 합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사건에서도 셔먼법에 따라 6개사 모두 합의 형태로 처벌 수준을 결정했습니다. 판결이 아닌 합의 형식이어서 부과기준에 대해 명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결정되는 벌금은 담합으로 올린 매출의 20%를 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제재의 형태도 한국은 1심 기능을 하는 공정위에서 행정적 제재인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이지만, 미국은 법무부에서 직접 기소를 하고 형벌의 형태인 벌금으로 물린다는 차이도 있습니다. 미국은 현재 담합 사건을 법무부가 직접 수사, 기소하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칼자루 쥔 美 법무부에서 배상금까지 합의

다음으로 민사적 구제 수단의 차이입니다. 관습법 체계인 미국은 알려진 것처럼 소송이 빈번한데 법무부가 반독점 혐의로 형사소송을 시작하면 담합 피해자도 바로 민사소송에 들어갑니다. 소비자나 입찰 발주자가 담합에 따른 손실을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번 담합의 피해자는 주한미군, 미국 정부였습니다. 형벌의 칼자루를 쥔 미 법무부가 민사소송까지 대리하게 된 것입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이번 사건의 배상금 수준이 전에 없이 크게 책정됐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정유사들이 담합을 통해 공급한 휘발유와 경유는 10억ℓ 규모인데 낙찰가와 원가를 고려하면 이익금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배상금으로 토해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입찰담합의 경우 거의 모든 발주기관에서 민사소송에 나서고 승소하는 사례도 늘고 있지만, 반독점 행위의 손해배상 한도를 3배까지 가능하게 한 클레이튼법에 비해서는 배상 한도가 적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제야 담합 과징금 한도 2배 높여‥매출 20%까지 부과 가능

담합으로 얻는 이익보다 처벌이 더 무거우면 담합을 할 이유는 사라집니다. 담합 행위를 하다 걸리면 회사에 더 큰 손실을 입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현재 우리의 담합 처벌수준은 행위로 발생한 이익을 넘어선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걸리지 않는 담합'까지 고려한다면 기대 이익은 훨씬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체계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한국의 과징금 부과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런 지적이 반영돼 지난주 국회를 통과한 공정거래법에는 과징금 부과 한도를 2배로 늘리는 방안이 포함됐습니다. 이제는 담합 관련 매출의 20%까지 과징금을 물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현재 과징금 부과 수준을 고려하면 관련 매출의 6~10% 정도는 나올 거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담합으로 손해를 봤을 때 민사소송으로 구제받을 길도 넓어졌습니다. 담합 등 공정거래법을 위반한 기업에 자료제출명령을 내릴 수 있어 담합으로 인한 손해를 입증할 수단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담합으로 적발된 기업이 제재와 손해배상 책임을 동시에 져야 한다면 담합에 나설 유인은 더 줄어들 수 있습니다.

■담합 처벌로 이대로 괜찮을까?

공정거래법의 전속고발제를 폐지했다면 담합 기업에 지금보다 무거운 처벌을 내릴 수 있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두 기관이 경쟁하듯 법 집행에 나선다면 처벌을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담합을 형사처벌하는 것이 효과적인가에 대한 논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담합에 가담한 정유사 임직원들에 대한 미국 법원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고, 과거 다른 국내기업 임직원도 담합으로 미국에서 징역을 선고받은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공정거래법에서는 개인을 고발하는 사례가 적고 대부분 벌금형이어서 과징금을 높이는 게 효과적이라는 의견도 나옵니다.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은 어제(16일) 공정경제3법 관련 합동브리핑에서 "형사적 집행이 부족하지 않도록 담합을 포함한 불공정행위에 대해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속고발제 폐지 논의에 불을 붙인 건 4대강 공사에서 담합한 건설사에 대한 공정위의 솜방망이 제재(2012년)이었습니다. 공정위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미국과 동등한 수준의 처벌은 불가능하더라도 담합 등 불공정행위 제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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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에서 4천억 문 유류 공급 담합, 한국이라면 과징금 얼마 나왔을까
    • 입력 2020-12-17 20:00:52
    • 수정2020-12-17 21:04:59
    취재K
SK에너지,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S-OIL(에쓰오일). 국내 4대 정유회사가 주한미군 유류공급 입찰에서 담합했다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습니다. 담합으로 올린 매출만 7천5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과징금과 검찰 고발은 면했습니다. 이들 정유업체가 이미 미국에서 4천억 원에 이르는 벌금과 배상금을 물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미국 법무부는 지난해 11월과 올해 3월 이들 정유회사가 주한미군 유류 납품 과정에서 담합한 것을 적발해 벌금과 배상금을 내는 조건으로 민·형사 소송을 해결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습니다. 벌금만 우리 돈으로 천750억 원이 넘고, 민사배상금이 2천300억 원 수준입니다.

업체별로는 SK에너지와 GS칼텍스의 벌금과 배상금을 합한 금액은 각각 천391억 원, 천163억 원으로 천억 원이 넘었습니다. 다음으로 현대오일뱅크 930억 원, 에쓰오일 486억 원, 에쓰오일의 납품을 대행한 한진 85억 원, 현대오일뱅크의 납품 대행사 지어신코리아 22억 원 순입니다.


■한국에서 7,500억 입찰 담합하면 과징금은 얼마?

관련 매출의 절반 이상을 대가로 치른 셈인데, 이들 회사가 한국 정부 입찰에서 담합했다면 과징금을 얼마나 물었을까? 공정위가 아무리 많이 부과하려고 해도 6개사 합계 750억 원을 넘기는 어렵습니다. 공정거래법에서 담합 과징금 한도를 관련 매출의 10%로 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정위가 과징금을 산정할 때 먼저 행위의 중대성을 판단해 점수를 매기고 이에 따라 부과기준율을 정하는데 한도는 10%이지만 3~5% 수준에서 정해지는 게 일반적입니다. 중대성은 담합에 따른 피해 범위와 부당이득의 크기, 전후 사정 등을 따지는데 5%를 초과하는 사례가 흔하진 않습니다.

미국에서 벌금만 천700억 원이 넘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나는 가장 큰 이유는 법체계가 달라서입니다.

미국은 담합 사건의 형벌을 '플리바게닝'으로 합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사건에서도 셔먼법에 따라 6개사 모두 합의 형태로 처벌 수준을 결정했습니다. 판결이 아닌 합의 형식이어서 부과기준에 대해 명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결정되는 벌금은 담합으로 올린 매출의 20%를 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제재의 형태도 한국은 1심 기능을 하는 공정위에서 행정적 제재인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이지만, 미국은 법무부에서 직접 기소를 하고 형벌의 형태인 벌금으로 물린다는 차이도 있습니다. 미국은 현재 담합 사건을 법무부가 직접 수사, 기소하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칼자루 쥔 美 법무부에서 배상금까지 합의

다음으로 민사적 구제 수단의 차이입니다. 관습법 체계인 미국은 알려진 것처럼 소송이 빈번한데 법무부가 반독점 혐의로 형사소송을 시작하면 담합 피해자도 바로 민사소송에 들어갑니다. 소비자나 입찰 발주자가 담합에 따른 손실을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번 담합의 피해자는 주한미군, 미국 정부였습니다. 형벌의 칼자루를 쥔 미 법무부가 민사소송까지 대리하게 된 것입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이번 사건의 배상금 수준이 전에 없이 크게 책정됐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정유사들이 담합을 통해 공급한 휘발유와 경유는 10억ℓ 규모인데 낙찰가와 원가를 고려하면 이익금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배상금으로 토해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입찰담합의 경우 거의 모든 발주기관에서 민사소송에 나서고 승소하는 사례도 늘고 있지만, 반독점 행위의 손해배상 한도를 3배까지 가능하게 한 클레이튼법에 비해서는 배상 한도가 적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제야 담합 과징금 한도 2배 높여‥매출 20%까지 부과 가능

담합으로 얻는 이익보다 처벌이 더 무거우면 담합을 할 이유는 사라집니다. 담합 행위를 하다 걸리면 회사에 더 큰 손실을 입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현재 우리의 담합 처벌수준은 행위로 발생한 이익을 넘어선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걸리지 않는 담합'까지 고려한다면 기대 이익은 훨씬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체계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한국의 과징금 부과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런 지적이 반영돼 지난주 국회를 통과한 공정거래법에는 과징금 부과 한도를 2배로 늘리는 방안이 포함됐습니다. 이제는 담합 관련 매출의 20%까지 과징금을 물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현재 과징금 부과 수준을 고려하면 관련 매출의 6~10% 정도는 나올 거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담합으로 손해를 봤을 때 민사소송으로 구제받을 길도 넓어졌습니다. 담합 등 공정거래법을 위반한 기업에 자료제출명령을 내릴 수 있어 담합으로 인한 손해를 입증할 수단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담합으로 적발된 기업이 제재와 손해배상 책임을 동시에 져야 한다면 담합에 나설 유인은 더 줄어들 수 있습니다.

■담합 처벌로 이대로 괜찮을까?

공정거래법의 전속고발제를 폐지했다면 담합 기업에 지금보다 무거운 처벌을 내릴 수 있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두 기관이 경쟁하듯 법 집행에 나선다면 처벌을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담합을 형사처벌하는 것이 효과적인가에 대한 논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담합에 가담한 정유사 임직원들에 대한 미국 법원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고, 과거 다른 국내기업 임직원도 담합으로 미국에서 징역을 선고받은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공정거래법에서는 개인을 고발하는 사례가 적고 대부분 벌금형이어서 과징금을 높이는 게 효과적이라는 의견도 나옵니다.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은 어제(16일) 공정경제3법 관련 합동브리핑에서 "형사적 집행이 부족하지 않도록 담합을 포함한 불공정행위에 대해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속고발제 폐지 논의에 불을 붙인 건 4대강 공사에서 담합한 건설사에 대한 공정위의 솜방망이 제재(2012년)이었습니다. 공정위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미국과 동등한 수준의 처벌은 불가능하더라도 담합 등 불공정행위 제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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