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남] “내가 대한민국의 대리인”…명의 도용 소송의 결과는?

입력 2020.12.19 (09:0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가끔 법원엔 문재인 대통령이나 각부 장관들 같은 중량감(?) 있는 인사들의 명의로 소송이 접수됩니다. 물론, 이런 인물들이 직접 소송을 내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이들을 대리한다며 이름을 도용해 소송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이런 소송, 제대로 된 소송 결과를 받아볼 순 있을까요?

■ 대한민국, "대법원 해산·재결사 막아달라" 청구…정말로?

앞서 지난 7월 서울중앙지법 제18민사부엔 원고 '대한민국' 명의로 소송이 제기됐습니다. 국가가 개인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일은 생각보다 드문 일은 아닙니다.

이렇게 대한민국 정부가 소송을 내는 경우 국가의 법률상 대표자는 법무부장관입니다. 법무부장관은 법무부 직원, 각급 검찰청 검사 또는 '공익법무관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공익법무관을 지정해 국가소송을 수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해당 행정기관의 직원을 지정하거나 변호사를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해 국가소송을 수행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소송에서 '대한민국'의 법률상 대표는 추미애 법무부장관이고, 추 장관의 대리인은 A 씨였습니다. 피고인은 B 씨와 C 씨였습니다.

문제는 청구취지였습니다.

△피고인들, 법원행정처(서초대로 219), 대법원(서초중앙로 157)에 관하는 모든 조직단체들은 집합금지, 해산, 폐쇄하며 재결사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피고인들, "법원행정처전산정보관리국" (courtitcenter@scourt.go.kr)과 그에 관련된 계정들로 되는 #@scourt.go.kr 계정들을 전부 파기하고, 동일한 계정명칭들로 재생성이나 재이용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위에 해당하는 인물들, 피고인들과 2호에 해당하는 계정들을 생성한 인물들 전체는 내란선동, 공전자기록위작행사, 공문서위조행사, 공무집행방해죄로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관할로 구인한 뒤 구속영장을 발부하며, 무기징역으로 확정판결하고, 위 인물들과 공모한 인물들 전체는 동일하게 처분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법원행정처를 폐쇄하라고 요청하는 내용으로, 제대로 된 청구취지는 분명 아닙니다. 피고인들은 법원 관계자도 아니었습니다. 누가봐도 황당한 소송이었습니다.

게다가 법무부장관의 대리인이라던 A 씨는 소송 시작 후, 사건 수행을 위해 지정이나 선임을 받았다는 아무런 자료를 제출하지 못했습니다. A 씨를 대한민국의 대리인으로 볼 아무런 근거가 없던 겁니다.

■ 법원 "정부 대리권 받았다고 볼 근거 없다…소권 남용"

재판부는 직권 판단했습니다. 민사소송법은 '부적법한 소로서 그 흠을 보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변론 없이 판결로 소를 각하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제219조). 재판부 판단으로 소송 자체가 문제가 있다면 재판을 시작하지 않고 각하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대리인으로서 소송행위를 한 사람이 그 대리권 또는 소송행위에 필요한 권한을 받았음을 증명하지 못하거나 추인을 받지 못한 경우, 법원은 직권으로 그에게 그 소송행위로 말미암아 발생한 비용을 갚도록 명할 수 있습니다(민사소송법 제108조, 107조 제2항). 자신이 소송 대리인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소송비용까지 물어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른바 '명의 도용' 소송의 남발을 막기 위한 장치인 셈입니다.

법원은 이같은 법리대로 "기록에 의하면 A 씨가 '소권을 남용'하여 원고 대한민국의 대리인임을 자처하며 이 사건 소를 제기한 것으로 보이므로, 이 사건 소는 대리권 없는 자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부적법하다"고 판단하고, 소송을 각하했습니다.

법원은 이어 "이 소송은 부적법한 소로 그 흠을 보정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A 씨가 소송비용을 물어내라고 판결했습니다.

이 소송은 제기된 후 판결이 나기까지 3개월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 2019년 법원에 접수된 소송사건은 총 663만4344건으로 이런 소송도 그 중 하나입니다. 법원의 판사 수는 현재 2900여 명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판결남] “내가 대한민국의 대리인”…명의 도용 소송의 결과는?
    • 입력 2020-12-19 09:00:14
    취재K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가끔 법원엔 문재인 대통령이나 각부 장관들 같은 중량감(?) 있는 인사들의 명의로 소송이 접수됩니다. 물론, 이런 인물들이 직접 소송을 내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이들을 대리한다며 이름을 도용해 소송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이런 소송, 제대로 된 소송 결과를 받아볼 순 있을까요?

■ 대한민국, "대법원 해산·재결사 막아달라" 청구…정말로?

앞서 지난 7월 서울중앙지법 제18민사부엔 원고 '대한민국' 명의로 소송이 제기됐습니다. 국가가 개인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일은 생각보다 드문 일은 아닙니다.

이렇게 대한민국 정부가 소송을 내는 경우 국가의 법률상 대표자는 법무부장관입니다. 법무부장관은 법무부 직원, 각급 검찰청 검사 또는 '공익법무관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공익법무관을 지정해 국가소송을 수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해당 행정기관의 직원을 지정하거나 변호사를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해 국가소송을 수행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소송에서 '대한민국'의 법률상 대표는 추미애 법무부장관이고, 추 장관의 대리인은 A 씨였습니다. 피고인은 B 씨와 C 씨였습니다.

문제는 청구취지였습니다.

△피고인들, 법원행정처(서초대로 219), 대법원(서초중앙로 157)에 관하는 모든 조직단체들은 집합금지, 해산, 폐쇄하며 재결사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피고인들, "법원행정처전산정보관리국" (courtitcenter@scourt.go.kr)과 그에 관련된 계정들로 되는 #@scourt.go.kr 계정들을 전부 파기하고, 동일한 계정명칭들로 재생성이나 재이용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위에 해당하는 인물들, 피고인들과 2호에 해당하는 계정들을 생성한 인물들 전체는 내란선동, 공전자기록위작행사, 공문서위조행사, 공무집행방해죄로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관할로 구인한 뒤 구속영장을 발부하며, 무기징역으로 확정판결하고, 위 인물들과 공모한 인물들 전체는 동일하게 처분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법원행정처를 폐쇄하라고 요청하는 내용으로, 제대로 된 청구취지는 분명 아닙니다. 피고인들은 법원 관계자도 아니었습니다. 누가봐도 황당한 소송이었습니다.

게다가 법무부장관의 대리인이라던 A 씨는 소송 시작 후, 사건 수행을 위해 지정이나 선임을 받았다는 아무런 자료를 제출하지 못했습니다. A 씨를 대한민국의 대리인으로 볼 아무런 근거가 없던 겁니다.

■ 법원 "정부 대리권 받았다고 볼 근거 없다…소권 남용"

재판부는 직권 판단했습니다. 민사소송법은 '부적법한 소로서 그 흠을 보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변론 없이 판결로 소를 각하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제219조). 재판부 판단으로 소송 자체가 문제가 있다면 재판을 시작하지 않고 각하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대리인으로서 소송행위를 한 사람이 그 대리권 또는 소송행위에 필요한 권한을 받았음을 증명하지 못하거나 추인을 받지 못한 경우, 법원은 직권으로 그에게 그 소송행위로 말미암아 발생한 비용을 갚도록 명할 수 있습니다(민사소송법 제108조, 107조 제2항). 자신이 소송 대리인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소송비용까지 물어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른바 '명의 도용' 소송의 남발을 막기 위한 장치인 셈입니다.

법원은 이같은 법리대로 "기록에 의하면 A 씨가 '소권을 남용'하여 원고 대한민국의 대리인임을 자처하며 이 사건 소를 제기한 것으로 보이므로, 이 사건 소는 대리권 없는 자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부적법하다"고 판단하고, 소송을 각하했습니다.

법원은 이어 "이 소송은 부적법한 소로 그 흠을 보정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A 씨가 소송비용을 물어내라고 판결했습니다.

이 소송은 제기된 후 판결이 나기까지 3개월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 2019년 법원에 접수된 소송사건은 총 663만4344건으로 이런 소송도 그 중 하나입니다. 법원의 판사 수는 현재 2900여 명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