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힘으로 ‘간첩 누명’ 벗은 노인…검찰, 또 항소할까

입력 2020.12.20 (13:36) 수정 2020.12.2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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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피고인은 무죄. 이 판결의 요지를 공시한다.”

법대에 앉은 판사가 말을 마치자, 방청석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평소 소란이 금지돼 있는 법정이지만 방청객들을 제지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무기징역 선고 이후 51년 만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박상은 씨는, 법정을 떠나기 전 재판부를 향해 두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법정을 나서는 박 씨를 아내와 두 아들이 꼭 안아주었고, 이웃과 지인들은 준비해 온 꽃바구니와 꽃다발을 건넸습니다. 박 씨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 누명의 시작

1968년 군에 입대한 박 씨는 사건이 일어난 1969년, 강원도에 있는 제7사단 100포병부대 B포대에서 탄약병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탄약을 수령하러 근처 중대에 갔다가 부대에 늦게 복귀한 5월의 어느 날 새벽, 박 씨는 눈을 치울 때 쓰던 넉가래 자루로 선임병에게 30분 넘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박 씨가 탄약고에다 빨래를 널어놨고, 순시를 나온 대대장이 이를 문제 삼았다는 게 구타의 구실이 됐습니다. 선임은 “난 빨래를 한 적이 없다”는 박 씨의 말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박 씨가 휴가를 다녀왔을 때 “밥을 사라”고 요구했던 그는, 박 씨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요구를 거절한 이후 계속 박 씨를 괴롭혀 왔던 터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박 씨는 행정실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빨래 사건을 이유로 한) 15일 짜리 징계 영장을 발견했습니다.

너무도 억울한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마음 먹은 박 씨. 그 길로 총을 챙겨 부대 근처 산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눈앞에 둔 찰나, 고향에 계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막내야, 나는 너를 믿는다. 살아야 한다.” 한바탕 눈물을 쏟은 박 씨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부대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길을 잃었고, 사흘 간 산속을 헤맨 끝에 남방한계선 부근에 다다라서야 인기척이 있는 부대를 발견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도착한 이곳에서 그는 보안부대로 인계됐습니다.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 "빨갱이 새끼"…반복된 고문·가혹행위

이후 끔찍한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수사관들은 박 씨를 “빨갱이 새끼”라고 불렀고, 북한으로 가려한 것을 다 안다면서 순순히 자백하라고 했습니다. 고문과 가혹행위가 반복됐습니다. 그러면서 들은 말이 박 씨는 여태 머리 속에 남아있습니다. “빨갱이 새끼, 네까짓 거 하나 죽여도 어느 누구도 모른다. 남해에 수장시켜줄까, 동해에 수장시켜줄까?” 꾸며낸 조서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박 씨가 버티자, 수사관들은 박 씨의 손가락을 짓눌러 강제로 지장을 찍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조서를 바탕으로 공소장에는 이런 내용이 적혔습니다.

“피고인은 … 세칭 제600고지에 이르러 자살하려고 하였으나 피고인이 군대 입대하기 전인 1965년 경 피고인의 주거지인 경기 강화군 양서면 인화리 거주 (북괴에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어부) 최○○으로부터 북괴 지역이 살기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실 및 1969.2. 중순경 소속대 부관 중위로부터 정훈교육시간에 ‘1970년도에는 북괴 김일성이 남북통일을 하여 청와대에서 환갑잔치를 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들은 바를 상기하고, 피고인이 월북하여 북한에서 돈을 많이 받고 간첩교육을 받은 후 남파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6.25 사변과 같은 전쟁이 발발하면 인민군으로 입대하여 다시 대한민국에 남하하여 가족을 만나 잘 살아보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1969.5.2. 10:00시 경 제600고지에서 적진인 북괴지역으로 도주할 것을 결의하고…”

‘가능할 법하다’고 말하기조차 쉽지 않은 내용의 공소장. 이를 짜맞추기 위해 수사기관은 박 씨의 조카와 군 동기 등 관련자들을 협박해 허위 진술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검찰은 박 씨를 기소했고, 법원 역시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1969년 6월 30일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박 씨는 북한으로 가려한 적이 없다며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변호사도 못 사줘서 너무 미안하다”고 눈물 지었던 박 씨의 부모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 뒤늦게 되찾은 진실

1년도 안되는 시간을 거쳐 어마어마한 간첩이 돼 버린 박 씨는, 형이 확정된 이후에도 끝까지 전향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전향을 하면 결국 내가 죄를 지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한 방을 쓰던 또 다른 재소자가 그를 설득했습니다. “야, 상은아. 일단 살고 봐야 한다. 너 몸이 약할 대로 약해져서 지금 50kg도 안 나가는데,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어쨌든 살고 봐야 한다.”

박 씨에게 “친형 이상의 스승”이었던 고(故) 신영복 교수는, 교도소에서 한 방을 쓰며 의형제를 맺은 박 씨를 꾸준히 설득했습니다. 결국 박 씨는 전향을 했고 가석방으로 20년 만인 1989년에 감옥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43살이었습니다. 직접 재심 청구를 한 끝에 어렵게 무죄를 선고 받은 건, 박 씨가 이미 70대 중순의 노인이 된 뒤였습니다.

재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 씨가 적진으로 도주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고 이를 증명할 만한 증거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또 박 씨가 적법한 미결수용시설도, 구속영장상의 인치장소·구속장소도 아니었던 ‘보안대 내무반’에서 수갑이 채워진 상태로 불법 구금되는 등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인정했습니다. 박 씨가 일부 허위 자백을 한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라며, 그 자백에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박 씨가 재심을 준비하며 50여 년 만에 찾아낸 증인이 법정에 나와 “초소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박 씨가 다가오더니 소속부대와 이름을 말하며 길을 잃었다고 했다”, “박 씨를 데리고 내무반으로 가서 선임들에게 인계해줬을 뿐 체포한 적이 없고, 오히려 박 씨가 자발적으로 나를 따라왔다”고 증언한 점도 무죄 판단의 중요한 근거가 됐습니다. 재판부는 박 씨가 북한으로 도주하려 했다면 남방한계선을 고작 150미터 남겨둔 상황에서 스스로 군 부대를 찾아가 보초병을 따라 들어갔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아울러 공소장에 기재된 박 씨의 이동 경로를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전혀 없고, 실제 박 씨가 이같은 경로로 이동했더라도 지리적 정보와 변호인이 제출한 당시 기상청 자료(날씨) 등을 보면 “자살을 하려다 포기하고 부대로 복귀하려던 중 길을 잃어 헤매다 (남방한계선 근처) 부대에까지 이르게 됐다”는 박 씨의 말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 “너무 고맙다” 고개 숙인 박 씨…검찰 항소 여부 남아

진실이 바로잡히기까지 5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는 오로지 박 씨가 노력한 결과일 뿐, 원인 제공자인 국가기관들은 사실상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박 씨는 재판부에 “진심을 알아주고 무죄를 내려주셔서 너무 고맙다”고 했습니다. “아들들에게 마음의 자유를 준 것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거듭 고개를 숙였습니다. 박 씨는 “앞으로는 저 외에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다고 군 상사들이 휴가를 다녀온 병사들한테 금전적 요구나 정신적 부담은 안줬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남겼습니다.

재심에 나선 박 씨를 변호한 서창효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재심을 청구해 피해를 구제 받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다”며 “가해자인 국가가 나서서 피해자를 구제하려는 좀더 적극적인 노력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재심 청구는 공익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검사 역시 직권으로 할 수 있지만, 현재의 검사들은 범죄자에 대한 형사 처벌이라는 역할에만 그치고 있지 재심 청구에서는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서 변호사는 특히 “과거사 사건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면 검찰은 반성한다며 과거사 사건에 대한 내부 매뉴얼을 만들어 무분별한 항소는 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그것이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박 씨의 사건 역시 검사가 매뉴얼에 따라 항소 여부를 신중히 검토해줬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항소 기간은 오는 23일까지입니다. 검찰이 항소를 하면 박 씨는 서울고등법원에서 또 다시 인생의 다섯 번째 재판을 받아야 하고, 검찰이 항소를 포기할 경우 박 씨에 대한 무죄 판결은 그대로 확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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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2-20 13:36:15
    • 수정2020-12-20 13:46:33
    취재K

“주문. 피고인은 무죄. 이 판결의 요지를 공시한다.”

법대에 앉은 판사가 말을 마치자, 방청석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평소 소란이 금지돼 있는 법정이지만 방청객들을 제지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무기징역 선고 이후 51년 만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박상은 씨는, 법정을 떠나기 전 재판부를 향해 두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법정을 나서는 박 씨를 아내와 두 아들이 꼭 안아주었고, 이웃과 지인들은 준비해 온 꽃바구니와 꽃다발을 건넸습니다. 박 씨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 누명의 시작

1968년 군에 입대한 박 씨는 사건이 일어난 1969년, 강원도에 있는 제7사단 100포병부대 B포대에서 탄약병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탄약을 수령하러 근처 중대에 갔다가 부대에 늦게 복귀한 5월의 어느 날 새벽, 박 씨는 눈을 치울 때 쓰던 넉가래 자루로 선임병에게 30분 넘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박 씨가 탄약고에다 빨래를 널어놨고, 순시를 나온 대대장이 이를 문제 삼았다는 게 구타의 구실이 됐습니다. 선임은 “난 빨래를 한 적이 없다”는 박 씨의 말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박 씨가 휴가를 다녀왔을 때 “밥을 사라”고 요구했던 그는, 박 씨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요구를 거절한 이후 계속 박 씨를 괴롭혀 왔던 터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박 씨는 행정실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빨래 사건을 이유로 한) 15일 짜리 징계 영장을 발견했습니다.

너무도 억울한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마음 먹은 박 씨. 그 길로 총을 챙겨 부대 근처 산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눈앞에 둔 찰나, 고향에 계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막내야, 나는 너를 믿는다. 살아야 한다.” 한바탕 눈물을 쏟은 박 씨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부대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길을 잃었고, 사흘 간 산속을 헤맨 끝에 남방한계선 부근에 다다라서야 인기척이 있는 부대를 발견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도착한 이곳에서 그는 보안부대로 인계됐습니다.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 "빨갱이 새끼"…반복된 고문·가혹행위

이후 끔찍한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수사관들은 박 씨를 “빨갱이 새끼”라고 불렀고, 북한으로 가려한 것을 다 안다면서 순순히 자백하라고 했습니다. 고문과 가혹행위가 반복됐습니다. 그러면서 들은 말이 박 씨는 여태 머리 속에 남아있습니다. “빨갱이 새끼, 네까짓 거 하나 죽여도 어느 누구도 모른다. 남해에 수장시켜줄까, 동해에 수장시켜줄까?” 꾸며낸 조서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박 씨가 버티자, 수사관들은 박 씨의 손가락을 짓눌러 강제로 지장을 찍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조서를 바탕으로 공소장에는 이런 내용이 적혔습니다.

“피고인은 … 세칭 제600고지에 이르러 자살하려고 하였으나 피고인이 군대 입대하기 전인 1965년 경 피고인의 주거지인 경기 강화군 양서면 인화리 거주 (북괴에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어부) 최○○으로부터 북괴 지역이 살기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실 및 1969.2. 중순경 소속대 부관 중위로부터 정훈교육시간에 ‘1970년도에는 북괴 김일성이 남북통일을 하여 청와대에서 환갑잔치를 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들은 바를 상기하고, 피고인이 월북하여 북한에서 돈을 많이 받고 간첩교육을 받은 후 남파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6.25 사변과 같은 전쟁이 발발하면 인민군으로 입대하여 다시 대한민국에 남하하여 가족을 만나 잘 살아보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1969.5.2. 10:00시 경 제600고지에서 적진인 북괴지역으로 도주할 것을 결의하고…”

‘가능할 법하다’고 말하기조차 쉽지 않은 내용의 공소장. 이를 짜맞추기 위해 수사기관은 박 씨의 조카와 군 동기 등 관련자들을 협박해 허위 진술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검찰은 박 씨를 기소했고, 법원 역시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1969년 6월 30일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박 씨는 북한으로 가려한 적이 없다며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변호사도 못 사줘서 너무 미안하다”고 눈물 지었던 박 씨의 부모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 뒤늦게 되찾은 진실

1년도 안되는 시간을 거쳐 어마어마한 간첩이 돼 버린 박 씨는, 형이 확정된 이후에도 끝까지 전향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전향을 하면 결국 내가 죄를 지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한 방을 쓰던 또 다른 재소자가 그를 설득했습니다. “야, 상은아. 일단 살고 봐야 한다. 너 몸이 약할 대로 약해져서 지금 50kg도 안 나가는데,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어쨌든 살고 봐야 한다.”

박 씨에게 “친형 이상의 스승”이었던 고(故) 신영복 교수는, 교도소에서 한 방을 쓰며 의형제를 맺은 박 씨를 꾸준히 설득했습니다. 결국 박 씨는 전향을 했고 가석방으로 20년 만인 1989년에 감옥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43살이었습니다. 직접 재심 청구를 한 끝에 어렵게 무죄를 선고 받은 건, 박 씨가 이미 70대 중순의 노인이 된 뒤였습니다.

재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 씨가 적진으로 도주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고 이를 증명할 만한 증거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또 박 씨가 적법한 미결수용시설도, 구속영장상의 인치장소·구속장소도 아니었던 ‘보안대 내무반’에서 수갑이 채워진 상태로 불법 구금되는 등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인정했습니다. 박 씨가 일부 허위 자백을 한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라며, 그 자백에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박 씨가 재심을 준비하며 50여 년 만에 찾아낸 증인이 법정에 나와 “초소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박 씨가 다가오더니 소속부대와 이름을 말하며 길을 잃었다고 했다”, “박 씨를 데리고 내무반으로 가서 선임들에게 인계해줬을 뿐 체포한 적이 없고, 오히려 박 씨가 자발적으로 나를 따라왔다”고 증언한 점도 무죄 판단의 중요한 근거가 됐습니다. 재판부는 박 씨가 북한으로 도주하려 했다면 남방한계선을 고작 150미터 남겨둔 상황에서 스스로 군 부대를 찾아가 보초병을 따라 들어갔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아울러 공소장에 기재된 박 씨의 이동 경로를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전혀 없고, 실제 박 씨가 이같은 경로로 이동했더라도 지리적 정보와 변호인이 제출한 당시 기상청 자료(날씨) 등을 보면 “자살을 하려다 포기하고 부대로 복귀하려던 중 길을 잃어 헤매다 (남방한계선 근처) 부대에까지 이르게 됐다”는 박 씨의 말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 “너무 고맙다” 고개 숙인 박 씨…검찰 항소 여부 남아

진실이 바로잡히기까지 5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는 오로지 박 씨가 노력한 결과일 뿐, 원인 제공자인 국가기관들은 사실상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박 씨는 재판부에 “진심을 알아주고 무죄를 내려주셔서 너무 고맙다”고 했습니다. “아들들에게 마음의 자유를 준 것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거듭 고개를 숙였습니다. 박 씨는 “앞으로는 저 외에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다고 군 상사들이 휴가를 다녀온 병사들한테 금전적 요구나 정신적 부담은 안줬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남겼습니다.

재심에 나선 박 씨를 변호한 서창효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재심을 청구해 피해를 구제 받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다”며 “가해자인 국가가 나서서 피해자를 구제하려는 좀더 적극적인 노력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재심 청구는 공익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검사 역시 직권으로 할 수 있지만, 현재의 검사들은 범죄자에 대한 형사 처벌이라는 역할에만 그치고 있지 재심 청구에서는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서 변호사는 특히 “과거사 사건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면 검찰은 반성한다며 과거사 사건에 대한 내부 매뉴얼을 만들어 무분별한 항소는 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그것이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박 씨의 사건 역시 검사가 매뉴얼에 따라 항소 여부를 신중히 검토해줬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항소 기간은 오는 23일까지입니다. 검찰이 항소를 하면 박 씨는 서울고등법원에서 또 다시 인생의 다섯 번째 재판을 받아야 하고, 검찰이 항소를 포기할 경우 박 씨에 대한 무죄 판결은 그대로 확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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