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민간인 학살?…당신이 ‘잘 모르는’ 과거사

입력 2020.12.2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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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제18전투경찰대대 이름비 세운 전북 경찰
해당 대대 제3중대 ‘민간인 학살’ 기록 물었더니…“잘 모르겠는데”
‘경찰 영웅’ 차일혁 대대장 지침으로 고창 월림마을 주민 89명 총살

전북지방경찰청 앞에 마련된 제18전투경찰대대 차일혁 대대장 흉상과 대원 이름비전북지방경찰청 앞에 마련된 제18전투경찰대대 차일혁 대대장 흉상과 대원 이름비

■ '제18전투경찰대대'를 기리다

전북지방경찰청 앞에 세워진 이름비입니다. 한쪽에 놓인 흉상의 주인공은 경찰 영웅으로 불리는 전북경찰 제18전투경찰대대장, 차일혁 경무관입니다.


전북 경찰은 지난해 차일혁 경무관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하고 흉상을 만들어 현관에 뒀습니다. 그렇게 1년이 흘러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된 올해. 차일혁 경무관과 함께 6.25에 참전해 숭고한 경찰 정신을 펼친 대원들의 이름이 함께 세워지게 된 겁니다.

차일혁 경무관의 흉상을 세운 건 경찰이었고 대원들의 이름비를 세운 건 전북동부보훈지청과 함께였습니다. 그런데 경찰과 보훈지청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제18전투경찰대대 소속 제3중대가 '민간인 학살'이라는 오점을 남겼다는 겁니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의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기록물.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의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기록물.

■ '민간인 학살'한 경찰 있었다…이유는 사적 원한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의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기록 문서입니다.

내용을 보면 지난 1951년 5월 10일,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 제3중대(지휘관 김용식)가 전북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에 사는 마을 주민 89명을 집단 총살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가해자로 지목돼 옥살이한 김용식 지휘관은 국군 명령으로 임무 수행을 위해 이동하다 자신의 일가 등 15명이 다른 성씨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듣게 됩니다.

복수를 결심하고 해당 성씨들이 모여 살던 월림마을 주민 95명을 한데 집결시키는데요, 주변에서 작전 중이던 차일혁 대대장에게 보고한 뒤 대대장 지침을 받아 그들을 인근 계곡에 몰고 가 경기관총 등으로 사살합니다.


■ '경찰 영웅' 차일혁 경무관, "그냥 죽이라"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가족의 원한을 푼 김용식 지휘관과 경찰 영웅으로 불리는 차일혁 대대장의 총살 재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록을 보면 차일혁 대대장이 김용식 지휘관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뒤에 "선운산 전투도 해야 하는데 그냥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정말 '그냥 죽게 된' 사람, 무려 89명에 달합니다.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희생자 명단. 20살 이하 어린 자녀들을 형광펜으로 따로 표기해봤습니다.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희생자 명단. 20살 이하 어린 자녀들을 형광펜으로 따로 표기해봤습니다.

희생자 가운데에는 김용식 지휘관 일가를 살해하는 데 가담하거나 당시 인민군 편에 선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20세 이하 어린 자녀들이 20명 넘게 포함돼 있습니다. 1살짜리 갓난아이도 숨졌으니 그야말로 무차별 총살이었던 셈이죠.

진실과화해위원회는 56년이 흐른 2007년, 현장 조사를 벌인 뒤 이를 경찰이 공권력을 남용해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전북지방경찰청이 제공한 이름비 제막식 행사 사진전북지방경찰청이 제공한 이름비 제막식 행사 사진

■ '혁혁한 공' 기려야 마땅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경찰은 군의 지휘를 받아 활동한 공산주의 비정규군(빨치산)과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경찰대원들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확인된 사건에 대해서 만큼은 이렇다 할 검증 절차 없이 무조건 받드는 건 도리에 어긋나겠죠.

대원들의 이름비를 세우는 데 쓰인 돈은 8천 8백만 원인데요, 예산은 경찰이 아닌 보훈지청이 댔습니다. 전투경찰대대의 공을 기리자며 뜻을 모은 전북 경찰과 보훈지청. 정작 이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입장을 전해왔습니다.

전북지방경찰청 관계자 통화 내용
"(고창 월림 사건이라고 혹시 아세요?) 자세하게는 잘 모르겠는데…."

전북동부보훈지청 관계자 통화 내용
"그 부분(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공적을 가지고 명비를 세운 거지.."

■ 당신이 '잘 모르는' 사이에

과거사 검증은커녕 사건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두 기관.
경찰과 보훈지청의 무지 속에 속이 타들어 가는 건 희생자 유족 측인데요, 반발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실제 이 사건 희생자 황창중 씨의 아들, 황용섭 씨는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의 무차별 학살로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년은 현재 아흔에 가까운 노인이 되었는데, 그 날의 상처를 단 한 번도 잊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양완수 고창군 6·25양민 희생자 제전위원회장 역시 공만 받들고 과를 제대로 살피지 않는 경찰의 행보에 답답함을 토로했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경위를 파악해야 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한편 김용식 지휘관의 일가 측도 할 말을 전해왔습니다. 김용식 지휘관이 총살을 벌인 건 인민군에 부역하던 월림마을 일부 성씨들이 먼저 김씨 일가를 숨지게 했고, 결국 이는 한국전쟁이 낳은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말입니다.

당대의 이념적 논쟁과 뼈아픈 칼부림을 전부 논하기 어려운 점에 유감을 표합니다. 다만 분명한 시사점은 남습니다. 경찰의 공권력 남용에 민간인이 학살당했고, 해당 대대를 기리는 기념물이 만들어졌으며, 공을 기리려는 자들은 과를 전혀 살피지 못했다는 것.


■ 기념비 이름 올린 경찰들 역시 "잘 모른다"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참고인 조사를 받은 제18전투대대 부대대장, 감찰담당, 중대원 등 3명의 진술에 일치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잘 모른다'고 진술한 점입니다. 이 3명은 이번에 만든 기념비에 모두 이름 석 자를 올렸습니다.

'잘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는 '그냥' 죽어갔습니다. 이름도 없이 말이죠.
떠나보낸 희생이야 되돌릴 수 없겠지만 있었던 사실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관련기사>
‘민간인 학살 사건’은 빼고…참전 경찰 이름비 ‘논란’ / KBS전주 뉴스9

촬영기자: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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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이 민간인 학살?…당신이 ‘잘 모르는’ 과거사
    • 입력 2020-12-23 17:10:24
    취재K
제18전투경찰대대 이름비 세운 전북 경찰<br />해당 대대 제3중대 ‘민간인 학살’ 기록 물었더니…“잘 모르겠는데”<br />‘경찰 영웅’ 차일혁 대대장 지침으로 고창 월림마을 주민 89명 총살
전북지방경찰청 앞에 마련된 제18전투경찰대대 차일혁 대대장 흉상과 대원 이름비
■ '제18전투경찰대대'를 기리다

전북지방경찰청 앞에 세워진 이름비입니다. 한쪽에 놓인 흉상의 주인공은 경찰 영웅으로 불리는 전북경찰 제18전투경찰대대장, 차일혁 경무관입니다.


전북 경찰은 지난해 차일혁 경무관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하고 흉상을 만들어 현관에 뒀습니다. 그렇게 1년이 흘러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된 올해. 차일혁 경무관과 함께 6.25에 참전해 숭고한 경찰 정신을 펼친 대원들의 이름이 함께 세워지게 된 겁니다.

차일혁 경무관의 흉상을 세운 건 경찰이었고 대원들의 이름비를 세운 건 전북동부보훈지청과 함께였습니다. 그런데 경찰과 보훈지청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제18전투경찰대대 소속 제3중대가 '민간인 학살'이라는 오점을 남겼다는 겁니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의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기록물.
■ '민간인 학살'한 경찰 있었다…이유는 사적 원한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의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기록 문서입니다.

내용을 보면 지난 1951년 5월 10일,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 제3중대(지휘관 김용식)가 전북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에 사는 마을 주민 89명을 집단 총살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가해자로 지목돼 옥살이한 김용식 지휘관은 국군 명령으로 임무 수행을 위해 이동하다 자신의 일가 등 15명이 다른 성씨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듣게 됩니다.

복수를 결심하고 해당 성씨들이 모여 살던 월림마을 주민 95명을 한데 집결시키는데요, 주변에서 작전 중이던 차일혁 대대장에게 보고한 뒤 대대장 지침을 받아 그들을 인근 계곡에 몰고 가 경기관총 등으로 사살합니다.


■ '경찰 영웅' 차일혁 경무관, "그냥 죽이라"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가족의 원한을 푼 김용식 지휘관과 경찰 영웅으로 불리는 차일혁 대대장의 총살 재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록을 보면 차일혁 대대장이 김용식 지휘관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뒤에 "선운산 전투도 해야 하는데 그냥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정말 '그냥 죽게 된' 사람, 무려 89명에 달합니다.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희생자 명단. 20살 이하 어린 자녀들을 형광펜으로 따로 표기해봤습니다.
희생자 가운데에는 김용식 지휘관 일가를 살해하는 데 가담하거나 당시 인민군 편에 선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20세 이하 어린 자녀들이 20명 넘게 포함돼 있습니다. 1살짜리 갓난아이도 숨졌으니 그야말로 무차별 총살이었던 셈이죠.

진실과화해위원회는 56년이 흐른 2007년, 현장 조사를 벌인 뒤 이를 경찰이 공권력을 남용해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전북지방경찰청이 제공한 이름비 제막식 행사 사진
■ '혁혁한 공' 기려야 마땅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경찰은 군의 지휘를 받아 활동한 공산주의 비정규군(빨치산)과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경찰대원들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확인된 사건에 대해서 만큼은 이렇다 할 검증 절차 없이 무조건 받드는 건 도리에 어긋나겠죠.

대원들의 이름비를 세우는 데 쓰인 돈은 8천 8백만 원인데요, 예산은 경찰이 아닌 보훈지청이 댔습니다. 전투경찰대대의 공을 기리자며 뜻을 모은 전북 경찰과 보훈지청. 정작 이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입장을 전해왔습니다.

전북지방경찰청 관계자 통화 내용
"(고창 월림 사건이라고 혹시 아세요?) 자세하게는 잘 모르겠는데…."

전북동부보훈지청 관계자 통화 내용
"그 부분(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공적을 가지고 명비를 세운 거지.."

■ 당신이 '잘 모르는' 사이에

과거사 검증은커녕 사건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두 기관.
경찰과 보훈지청의 무지 속에 속이 타들어 가는 건 희생자 유족 측인데요, 반발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실제 이 사건 희생자 황창중 씨의 아들, 황용섭 씨는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의 무차별 학살로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년은 현재 아흔에 가까운 노인이 되었는데, 그 날의 상처를 단 한 번도 잊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양완수 고창군 6·25양민 희생자 제전위원회장 역시 공만 받들고 과를 제대로 살피지 않는 경찰의 행보에 답답함을 토로했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경위를 파악해야 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한편 김용식 지휘관의 일가 측도 할 말을 전해왔습니다. 김용식 지휘관이 총살을 벌인 건 인민군에 부역하던 월림마을 일부 성씨들이 먼저 김씨 일가를 숨지게 했고, 결국 이는 한국전쟁이 낳은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말입니다.

당대의 이념적 논쟁과 뼈아픈 칼부림을 전부 논하기 어려운 점에 유감을 표합니다. 다만 분명한 시사점은 남습니다. 경찰의 공권력 남용에 민간인이 학살당했고, 해당 대대를 기리는 기념물이 만들어졌으며, 공을 기리려는 자들은 과를 전혀 살피지 못했다는 것.


■ 기념비 이름 올린 경찰들 역시 "잘 모른다"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참고인 조사를 받은 제18전투대대 부대대장, 감찰담당, 중대원 등 3명의 진술에 일치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잘 모른다'고 진술한 점입니다. 이 3명은 이번에 만든 기념비에 모두 이름 석 자를 올렸습니다.

'잘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는 '그냥' 죽어갔습니다. 이름도 없이 말이죠.
떠나보낸 희생이야 되돌릴 수 없겠지만 있었던 사실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관련기사>
‘민간인 학살 사건’은 빼고…참전 경찰 이름비 ‘논란’ / KBS전주 뉴스9

촬영기자: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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