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 밑에 또 갑”…공사대금 후려친 중견기업

입력 2020.12.27 (08:00) 수정 2020.12.2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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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등 대기업에 공장 설비를 납품하는 한 중견 기업이 하청 업체를 대상으로 대금을 부당하게 깎는 이른바 '가격 후려치기' 를 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대금이 깎이며, 하청 업체들은 왜 이런 계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 회생 절차 밟는 강소기업

충남 아산시 음봉면의 한 산업단지.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 등의 1·2차 하청 업체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권정봉 씨의 업체는 자동화 기계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합니다. 주로 휴대전화와 텔레비전에 들어가는 얇은 유리를 옮기는 기계입니다. 비록 기업 규모는 크지 않지만, 비닐만큼 얇고 작은 사무실의 한쪽 벽면만큼 거대한 유리를 깨뜨리지 않고 옮기는 고유의 기술을 가진 '강소기업'입니다.


권 대표와 직원들은 한국 경제를 이끄는 첨단 산업의 뿌리 기술을 보유했다는 자부심으로 업체를 운영해 왔습니다.
하지만 권 씨의 업체는 몇 년 전부터 적자를 거듭하다, 최근 결국 회생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 원청업체 의존율 95%

권 씨가 주로 일감을 받는 곳은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 등에 공장 설비를 납품하는 한 중견 기업입니다. 권 씨 업체의 원청 업체 의존율은 95%를 넘었습니다.

국내 대부분의 제조 하청 업체와 비슷합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2017년도 중소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중소 제조기업의 41.9%가 원청업체로부터 일감을 위탁받는 하청 기업이며, 이들은 매출의 81.4%를 원청 기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원청 업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고, 대금 인하를 요구해도 쉽게 거절하기 힘들었습니다.

권 씨는 원청업체의 '하도급 대금 후려치기'를 호소했는데, 크게 2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 최저가, 또 최저가

원청 업체는 주로 3~4개 협력회사에 입찰에 참여하라는 통보를 하고, 이들을 상대로 입찰 견적 금액을 받아 최저가 금액을 제시한 업체를 낙찰 업체로 선정하는 방식을 썼습니다. 경쟁 입찰의 일종입니다.

문제는 최저가 낙찰자로 선정돼도 추가 인하 요구가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권 씨에 따르면 해당 원청업체는 최저가 낙찰자와 구두로 추가 협상을 벌여 가격을 추가로 깎았습니다. 하도급법은 경쟁입찰에 의한 하도급 계약을 맺을 때 정당한 사유 없이 최저가로 입찰한 금액보다 낮은 금액으로 하도급 대금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당한 사유'란 하청 업체에 책임이 있을 경우, 원청업체가 도저히 책임질 수 없는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가격을 낮추지만, 이것이 하청 업체에 손해가 안 될 경우 정도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됩니다.
그런데 권 씨의 원청 업체는 입찰 과정에서 '수행예산 내 제출된 견적가가 없는 경우 다시 견적의뢰가 진행될 수 있다'고 공지했습니다. 이 경우 '정당한 사유'로 인정될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 견해입니다.

하도급법학회장 정종채 변호사(법무법인 정박)는 "예정 가격을 구체적으로, 정확히 명시하지 않고 모호하게 '예정 가격보다 높은 경우' 견적을 새로 의뢰한다는 식으로 입찰이 진행되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공정위 관계자도 "예산 내 들어오지 않으면 다시 견적의뢰 한다는 식의 공지를 미리 했다면 이를 참작할 수는 있을지언정 곧장 '정당한 사유'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선시공 후계약'의 덫

권 씨의 원청 업체가 반복한 또 다른 방식은 '선시공 후계약'입니다. 말 그대로 '급하니까 시공부터 하고 계약은 천천히 하자'는 겁니다.

2016년 권 씨 업체가 진행한 시공을 보면, 1월부터 부품을 구매하며 시공에 착수했는데 정작 계약서는 반년이나 지나서 작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권 씨 업체가 뽑은 견적서를 보면 총비용은 27억5천만 원인데, 최종 계약서는 22억9천만 원입니다. 최초 견적서의 직접공사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입니다.

당시 권 씨는 '급하니까 일단 진행해달라'는 말에 정확한 계약 금액을 정하지 못한 채로 시공에 나섰습니다.

문제는 일단 시공에 나서면 인력과 시간, 돈이 투입된다는 겁니다. 원청 업체의 사정을 봐줘 시공에 나섰는데 오히려 하청 업체의 협상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권 씨는 "이미 시공해서 돌이킬 수도 없고, 돈이 투자된 것도 있다"며, "이건 거부할 방법 자체가 없고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종채 변호사는 이에 대해 "하도급 계약을 하면서 하청 업체가 제출한 견적서 상 직접 공사비보다 낮은 대금을 강요했다면, 이는 누가 봐도 부당하게 낮은 대금인 경우가 명확하다"고 말했습니다.

'선시공 후계약' 관행이 전형적인 하도급 갑질로 꼽히며 하도급법에서 원칙적으로 금지된 이유입니다.

■ "몇 년 새 여러 곳 폐업"

이 일대에서 권 씨와 같은 고통을 호소하는 업체는 한두 곳이 아닙니다.

권 씨는 "해당 원청업체에 등록된 하청업체 중 몇 년 새 폐업한 업체는 제가 아는 곳만 15곳이 넘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중 한 업체는 KBS와의 통화에서 "경쟁입찰에서 낙찰된 이후로도 본인들이 정한 내정가가 있다며 추가로 가격 인하를 요구한 적도 있었다"며 "우리 업체는 부채가 너무 늘어나 4년 전 부도 처리됐다"고 말했습니다.

권 씨의 업체는 원청업체에서 여러해 ‘최우수 협력사’로 선정됐는데, 그 때마다 최대 적자가 났다고 말했습니다.권 씨의 업체는 원청업체에서 여러해 ‘최우수 협력사’로 선정됐는데, 그 때마다 최대 적자가 났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업체는 "이미 들어간 공사에서 추가 공정이 발생하면 아예 추가금액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선시공을 요구하며 '추가비 줄 테니까 걱정 말고 하라'고 말해 믿고 진행했지만, 결국 추가 금액을 정산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 2014년에도 적발… 벌금형 선고

해당 원청 업체는 "상당 부분 하청 업체의 일방적 주장"이라면서도, "법 위반 사실이 있는지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업체는 2014년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계약금을 깎다 공정위 조사에서 적발됐습니다.

당시 공정위가 과징금 3억5천만 원과 함께 시정 조치를 명령했고, 중소기업청(현 중소벤처기업부)의 의뢰로 고발해 이듬해 법인과 대표가 각각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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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 밑에 또 갑”…공사대금 후려친 중견기업
    • 입력 2020-12-27 08:00:06
    • 수정2020-12-27 10:51:10
    취재K

삼성전자 등 대기업에 공장 설비를 납품하는 한 중견 기업이 하청 업체를 대상으로 대금을 부당하게 깎는 이른바 '가격 후려치기' 를 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대금이 깎이며, 하청 업체들은 왜 이런 계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 회생 절차 밟는 강소기업

충남 아산시 음봉면의 한 산업단지.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 등의 1·2차 하청 업체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권정봉 씨의 업체는 자동화 기계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합니다. 주로 휴대전화와 텔레비전에 들어가는 얇은 유리를 옮기는 기계입니다. 비록 기업 규모는 크지 않지만, 비닐만큼 얇고 작은 사무실의 한쪽 벽면만큼 거대한 유리를 깨뜨리지 않고 옮기는 고유의 기술을 가진 '강소기업'입니다.


권 대표와 직원들은 한국 경제를 이끄는 첨단 산업의 뿌리 기술을 보유했다는 자부심으로 업체를 운영해 왔습니다.
하지만 권 씨의 업체는 몇 년 전부터 적자를 거듭하다, 최근 결국 회생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 원청업체 의존율 95%

권 씨가 주로 일감을 받는 곳은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 등에 공장 설비를 납품하는 한 중견 기업입니다. 권 씨 업체의 원청 업체 의존율은 95%를 넘었습니다.

국내 대부분의 제조 하청 업체와 비슷합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2017년도 중소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중소 제조기업의 41.9%가 원청업체로부터 일감을 위탁받는 하청 기업이며, 이들은 매출의 81.4%를 원청 기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원청 업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고, 대금 인하를 요구해도 쉽게 거절하기 힘들었습니다.

권 씨는 원청업체의 '하도급 대금 후려치기'를 호소했는데, 크게 2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 최저가, 또 최저가

원청 업체는 주로 3~4개 협력회사에 입찰에 참여하라는 통보를 하고, 이들을 상대로 입찰 견적 금액을 받아 최저가 금액을 제시한 업체를 낙찰 업체로 선정하는 방식을 썼습니다. 경쟁 입찰의 일종입니다.

문제는 최저가 낙찰자로 선정돼도 추가 인하 요구가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권 씨에 따르면 해당 원청업체는 최저가 낙찰자와 구두로 추가 협상을 벌여 가격을 추가로 깎았습니다. 하도급법은 경쟁입찰에 의한 하도급 계약을 맺을 때 정당한 사유 없이 최저가로 입찰한 금액보다 낮은 금액으로 하도급 대금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당한 사유'란 하청 업체에 책임이 있을 경우, 원청업체가 도저히 책임질 수 없는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가격을 낮추지만, 이것이 하청 업체에 손해가 안 될 경우 정도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됩니다.
그런데 권 씨의 원청 업체는 입찰 과정에서 '수행예산 내 제출된 견적가가 없는 경우 다시 견적의뢰가 진행될 수 있다'고 공지했습니다. 이 경우 '정당한 사유'로 인정될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 견해입니다.

하도급법학회장 정종채 변호사(법무법인 정박)는 "예정 가격을 구체적으로, 정확히 명시하지 않고 모호하게 '예정 가격보다 높은 경우' 견적을 새로 의뢰한다는 식으로 입찰이 진행되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공정위 관계자도 "예산 내 들어오지 않으면 다시 견적의뢰 한다는 식의 공지를 미리 했다면 이를 참작할 수는 있을지언정 곧장 '정당한 사유'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선시공 후계약'의 덫

권 씨의 원청 업체가 반복한 또 다른 방식은 '선시공 후계약'입니다. 말 그대로 '급하니까 시공부터 하고 계약은 천천히 하자'는 겁니다.

2016년 권 씨 업체가 진행한 시공을 보면, 1월부터 부품을 구매하며 시공에 착수했는데 정작 계약서는 반년이나 지나서 작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권 씨 업체가 뽑은 견적서를 보면 총비용은 27억5천만 원인데, 최종 계약서는 22억9천만 원입니다. 최초 견적서의 직접공사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입니다.

당시 권 씨는 '급하니까 일단 진행해달라'는 말에 정확한 계약 금액을 정하지 못한 채로 시공에 나섰습니다.

문제는 일단 시공에 나서면 인력과 시간, 돈이 투입된다는 겁니다. 원청 업체의 사정을 봐줘 시공에 나섰는데 오히려 하청 업체의 협상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권 씨는 "이미 시공해서 돌이킬 수도 없고, 돈이 투자된 것도 있다"며, "이건 거부할 방법 자체가 없고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종채 변호사는 이에 대해 "하도급 계약을 하면서 하청 업체가 제출한 견적서 상 직접 공사비보다 낮은 대금을 강요했다면, 이는 누가 봐도 부당하게 낮은 대금인 경우가 명확하다"고 말했습니다.

'선시공 후계약' 관행이 전형적인 하도급 갑질로 꼽히며 하도급법에서 원칙적으로 금지된 이유입니다.

■ "몇 년 새 여러 곳 폐업"

이 일대에서 권 씨와 같은 고통을 호소하는 업체는 한두 곳이 아닙니다.

권 씨는 "해당 원청업체에 등록된 하청업체 중 몇 년 새 폐업한 업체는 제가 아는 곳만 15곳이 넘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중 한 업체는 KBS와의 통화에서 "경쟁입찰에서 낙찰된 이후로도 본인들이 정한 내정가가 있다며 추가로 가격 인하를 요구한 적도 있었다"며 "우리 업체는 부채가 너무 늘어나 4년 전 부도 처리됐다"고 말했습니다.

권 씨의 업체는 원청업체에서 여러해 ‘최우수 협력사’로 선정됐는데, 그 때마다 최대 적자가 났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업체는 "이미 들어간 공사에서 추가 공정이 발생하면 아예 추가금액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선시공을 요구하며 '추가비 줄 테니까 걱정 말고 하라'고 말해 믿고 진행했지만, 결국 추가 금액을 정산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 2014년에도 적발… 벌금형 선고

해당 원청 업체는 "상당 부분 하청 업체의 일방적 주장"이라면서도, "법 위반 사실이 있는지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업체는 2014년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계약금을 깎다 공정위 조사에서 적발됐습니다.

당시 공정위가 과징금 3억5천만 원과 함께 시정 조치를 명령했고, 중소기업청(현 중소벤처기업부)의 의뢰로 고발해 이듬해 법인과 대표가 각각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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