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 식구들 대화 태블릿PC로 녹음한 남성…법원 판단은?

입력 2021.01.04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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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부부싸움 후 한 남성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숨진 사건이 보도됐습니다. 부부 사이의 다툼이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사망·살인 사건 등 다른 불행한 일들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최근 법원에서는 부부 간 불화에서 비롯된 다소 이례적인 형사사건에 대한 판결이 확정됐습니다.

집값 마련 문제 때문에 부인과 다투던 30대 남성 A 씨. 이 다툼은 급기야 부부를 넘어서 A 씨의 아버지와 장인·장모까지 휩싸인 양가의 불화로 비화했습니다. 양가 가족들이 A 씨 부부의 집에 모여 언쟁을 벌이던 어느 날, A 씨는 자신의 태블릿PC를 이용해 대화를 녹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화가 격해지던 중 A 씨는 부인과 장인·장모를 남겨두고 자신의 아버지 등과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가족들을 근처 호텔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A 씨의 태블릿PC는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도 그대로 집안을 지켰습니다. 녹음 기능은 켜진 상태로 말이지요.

결국, 태블릿PC는 A 씨가 떠난 이후 집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3시간가량 녹음했고, 그 결과 A 씨는 부인과 장인·장모 세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녹음파일을 확인한 A 씨는, 다음날 아버지를 찾아가 녹음된 대화 내용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 "불법 녹음·누설" vs. "고의 없었다"

이후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A 씨 부인 측은 A 씨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제3자가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하거나 전자장치 등을 이용해 듣는 것은 불법입니다. 또 이런 식의 녹음으로 알게 된 대화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거나 일반에 공개하는 것 역시 불법입니다.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과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의 대화를 불법 도청한 이른바 ‘삼성X파일’을 듣고 ‘떡값 검사’ 7명의 실명을 세상에 공개했던 고(故) 노회찬 전 의원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돼 결국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의원직을 잃었지요.

검사는 죄가 성립한다고 보고 지난해 1월 A 씨를 재판에 넘겼습니다. A 씨의 변호인은 재판에서 “배우자 가족 분들이 워낙 말씀을 많이 바꾸시니까,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 A 씨가 녹음했던 건 맞다”며 “그런데 몰래 녹음하려고 했던 고의가 있었던 건 아니고, 본인도 처음엔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 아니었다”고 상황을 참작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습니다. 또 A 씨가 당시 감정이 격화돼 집을 나서면서 태블릿PC가 녹음 중이라는 사실을 잊은 상태였다고도 강조했습니다.

■ 법원, "사적 대화의 비밀 침해" 죄 인정했지만…

그럼 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요?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은 A 씨의 혐의를 일단 유죄로 판단했습니다. 자초지종이야 어찌됐든 A 씨가 처가 식구들의 대화 내용을 몰래 녹음하고, 제3자인 아버지에게까지 누설한 점은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재판부는 부부간의 다툼과 집안 불화가 생긴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A 씨의 이같은 행동은 “본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 간 사적인 대화의 비밀을 침해했다는 면에서 좋지 못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재판부는 다만 A 씨의 양형에 있어 다수 참작할 만한 사정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처음엔 A 씨 본인도 있는 상태에서 녹음을 시작했고, 그 후 대화 장소를 황급히 떠나게 되면서 태블릿PC의 녹음 기능을 중지시키지 않아 범행에 이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또 사태가 처가와 본가의 불화로까지 번진 상황에서, 당시 처가 식구들과의 대화에 참여했던 A 씨의 아버지에게 해당 대화 이후 상황을 전하며 녹음 내용을 누설하게 된 사정도 참작해야 한다고 재판부는 밝혔습니다. 아울러 A 씨 부부가 이혼조정에 합의하고 A 씨의 부인도 이번 고소 건을 비롯한 다른 형사사건 모두에 대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점, A 씨에게 범행 전력이 없고 A 씨가 이번 일을 반성하고 있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재판부는 이에 A 씨에 대해 징역 6월에 자격정지 1년 선고를 ‘유예’하는, 선고유예 판결을 했습니다. 선고유예란 일정한 기간(2년) 동안 형의 선고를 유예하고, 그 기간이 지나면 해당 범죄에 대한 형벌권이 소멸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입니다. 검사와 A 씨 측 모두 항소하지 않아, 이번 판결은 지난해 말 확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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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가 식구들 대화 태블릿PC로 녹음한 남성…법원 판단은?
    • 입력 2021-01-04 12:53:46
    취재K

연초부터 부부싸움 후 한 남성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숨진 사건이 보도됐습니다. 부부 사이의 다툼이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사망·살인 사건 등 다른 불행한 일들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최근 법원에서는 부부 간 불화에서 비롯된 다소 이례적인 형사사건에 대한 판결이 확정됐습니다.

집값 마련 문제 때문에 부인과 다투던 30대 남성 A 씨. 이 다툼은 급기야 부부를 넘어서 A 씨의 아버지와 장인·장모까지 휩싸인 양가의 불화로 비화했습니다. 양가 가족들이 A 씨 부부의 집에 모여 언쟁을 벌이던 어느 날, A 씨는 자신의 태블릿PC를 이용해 대화를 녹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화가 격해지던 중 A 씨는 부인과 장인·장모를 남겨두고 자신의 아버지 등과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가족들을 근처 호텔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A 씨의 태블릿PC는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도 그대로 집안을 지켰습니다. 녹음 기능은 켜진 상태로 말이지요.

결국, 태블릿PC는 A 씨가 떠난 이후 집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3시간가량 녹음했고, 그 결과 A 씨는 부인과 장인·장모 세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녹음파일을 확인한 A 씨는, 다음날 아버지를 찾아가 녹음된 대화 내용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 "불법 녹음·누설" vs. "고의 없었다"

이후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A 씨 부인 측은 A 씨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제3자가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하거나 전자장치 등을 이용해 듣는 것은 불법입니다. 또 이런 식의 녹음으로 알게 된 대화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거나 일반에 공개하는 것 역시 불법입니다.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과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의 대화를 불법 도청한 이른바 ‘삼성X파일’을 듣고 ‘떡값 검사’ 7명의 실명을 세상에 공개했던 고(故) 노회찬 전 의원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돼 결국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의원직을 잃었지요.

검사는 죄가 성립한다고 보고 지난해 1월 A 씨를 재판에 넘겼습니다. A 씨의 변호인은 재판에서 “배우자 가족 분들이 워낙 말씀을 많이 바꾸시니까,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 A 씨가 녹음했던 건 맞다”며 “그런데 몰래 녹음하려고 했던 고의가 있었던 건 아니고, 본인도 처음엔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 아니었다”고 상황을 참작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습니다. 또 A 씨가 당시 감정이 격화돼 집을 나서면서 태블릿PC가 녹음 중이라는 사실을 잊은 상태였다고도 강조했습니다.

■ 법원, "사적 대화의 비밀 침해" 죄 인정했지만…

그럼 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요?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은 A 씨의 혐의를 일단 유죄로 판단했습니다. 자초지종이야 어찌됐든 A 씨가 처가 식구들의 대화 내용을 몰래 녹음하고, 제3자인 아버지에게까지 누설한 점은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재판부는 부부간의 다툼과 집안 불화가 생긴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A 씨의 이같은 행동은 “본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 간 사적인 대화의 비밀을 침해했다는 면에서 좋지 못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재판부는 다만 A 씨의 양형에 있어 다수 참작할 만한 사정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처음엔 A 씨 본인도 있는 상태에서 녹음을 시작했고, 그 후 대화 장소를 황급히 떠나게 되면서 태블릿PC의 녹음 기능을 중지시키지 않아 범행에 이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또 사태가 처가와 본가의 불화로까지 번진 상황에서, 당시 처가 식구들과의 대화에 참여했던 A 씨의 아버지에게 해당 대화 이후 상황을 전하며 녹음 내용을 누설하게 된 사정도 참작해야 한다고 재판부는 밝혔습니다. 아울러 A 씨 부부가 이혼조정에 합의하고 A 씨의 부인도 이번 고소 건을 비롯한 다른 형사사건 모두에 대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점, A 씨에게 범행 전력이 없고 A 씨가 이번 일을 반성하고 있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재판부는 이에 A 씨에 대해 징역 6월에 자격정지 1년 선고를 ‘유예’하는, 선고유예 판결을 했습니다. 선고유예란 일정한 기간(2년) 동안 형의 선고를 유예하고, 그 기간이 지나면 해당 범죄에 대한 형벌권이 소멸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입니다. 검사와 A 씨 측 모두 항소하지 않아, 이번 판결은 지난해 말 확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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