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면피용 준법감시’ 안 되려면…해답은 판결문에

입력 2021.01.2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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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여러 활동에 대해 준법감시를 한다는 건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기관이 있단 건 상당수 기관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이고, 다른 회사들은 하지도 못합니다. 그에 못지않게 피고인들의 개선의지와 준법의지도 강하게 반영됐다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형식적 보여주기가 아니라는 것도 단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게 1년 전부터 보여주기만으로 이뤄질 수 있겠습니까. 충분하고 진지한 반성의 징표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12월 30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최후 변론에서, 변호인들은 삼성그룹 준법감시제도의 진정성을 강조했습니다. 집행유예를 위한 면피용·보여주기식 도구가 아니라 이 부회장의 진지한 반성과 의지가 녹아든 결과물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피고인들의 양형에 대한 변론 과정에서 나왔던 이야기인 만큼, 이 제도의 실효성을 인정해 이 부회장 등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해 달라는 게 핵심 취지였습니다.

이 부회장 본인도 최후 진술을 통해 “모두가 철저하게, 준법감시의 틀 안에 있는 회사로 (삼성을) 반드시 바꾸겠다”며 “제가 책임지고 추진하겠다. 분명하게 약속드린다”라고 공언하며 재판부의 선처를 구했습니다.

■ 진정성은 있었지만 실효성은 없었다

이에 대한 재판부의 응답, 그제(18일) 판결 선고에서 확인됐습니다.

재판부는 “이재용 피고인은 재판과정에서 새로운, 강화된 준법감시제도를 운영하며 준법 경영의지를 진정성 있게 보여줬다”고 언급하면서도, 현재의 삼성 준법감시제도로는 최고경영진의 위법행위를 실효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삼성 준법감시제도를 점검할 전문심리위원이 구성된 11월 초부터, 2달이 넘는 점검 기간을 거쳐 재판부가 내놓은 결론입니다.

국내 재계 1위 기업인 삼성의 준법감시제도에 대해 외부의 직접적인 검토 작업이 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인 만큼, 재판부의 결론은 한 형사재판의 판결 그 이상의 사회적 가치를 지니게 됐습니다. 재판부가 전문심리위원들의 삼성 준법감시제도 점검 보고서를 법원 홈페이지에 공개한 이유이기도 한데요. 해당 게시글은 한 달 만에 2천 5백 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점검 과정을 총괄해 온 재판부가 짚은 삼성 준법감시제도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판결문에 적힌 관련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 “준법감시제도 양형 반영, 매우 신중해야”

당초 이 부회장과 삼성이 넘어야 할 허들은 그리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재판부가 지난해 1월 17일 전문심리위원 도입을 결정하면서 “준법감시제도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즉 실효적으로 운영돼야만 양형 조건으로 고려될 수 있다”고 분명히 했기 때문입니다.

이 실효성 충족 여부를 두고 특별검사와 변호인, 전문심리위원 3명의 의견이 크게 갈렸는데요. 선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재판부의 눈높이를 좀 더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재판부는 “준법감시제도를 도입하거나 강화했다는 사정을 양형에 긍정적인 요소로 반영하는 데에는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판결문에 적었습니다. 특히 이 부회장 사건처럼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이 선고된 이후에야 준법감시제도를 강화한 경우에는 양형 고려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법원에서까지 유죄가 인정되면 그제야 준법감시제도를 도입하거나 강화해도 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기업들에게 줄 수 있다는 겁니다.

“인센티브를 바라고 준법감시제도를 자발적으로 운영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위법행위에 대한 엄정한 처벌 및 위법행위는 적발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기업이 위법행위를 했음에도 솜방망이 처벌이 이루어지거나 적발될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게 되면, 굳이 비용을 들여가면서까지 준법감시제도를 자발적으로 운영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중략)… 실효성이 담보되지 않은 준법감시제도를 근거로 감형을 하게 되면, 오히려 위법행위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라는 전제 자체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 (판결문 30~31쪽)

재판부는 그러면서 “준법감시제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위법행위의 예방에 있는 것이지, 감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판결문에 적었습니다.

■ 포탄이 ‘떨어진 곳’과 ‘떨어질 곳’

재판부는 그러면서 “실효적인 준법감시는 법적 위험의 평가로부터 시작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표현을 바꿔, 법적 위험의 평가가 미흡할 때 준법감시는 실효성을 갖지 못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 뜻을 이해하기 위해, 강일원 전문심리위원(전 헌법재판관)이 다른 위원들과 가진 첫 회의에서 했다는 비유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 번 포탄이 떨어진 곳에는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 홍순탁 전문심리위원(회계사)은 “한 번 사고가 난 유형 그대로는 나지 않는다. 다른 사고가 날 법한 것들을 찾아내야지, 이미 사고가 난 그 유형만 대비해선 절대 사고를 막을 수 없다. 이는 내부통제의 기본”이라고 재판에서 부연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과거 잘못만 되짚을 것이 아니라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위법행위를 유형별로 정리해 대비하는 게 준법감시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이 부회장 사건에서는 경영권 승계를 현안으로 한 뇌물공여 행위가 문제가 됐으니, 기업 총수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위법행위를 유형별로 예상해 발생 가능한 범죄 행위의 위험성을 정의해 두어야겠지요.

하지만 재판부는 삼성 준법감시제도가 이미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고, 향후 포탄이 떨어질 자리에까지 시야를 넓혀 대비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삼성 준법감시제도의 실효성이 낮게 평가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삼성그룹의 강화된 준법감시제도는 일상적인 준법감시 활동에 더하여 대외후원금과 내부거래 등 이 사건에서 문제된 위법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준법감시 활동을 하고 있으나,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위험을 정의하고 이에 대비한 선제적 위험 예방 및 감시 활동을 하는 데까지는 이르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 33쪽)

(이 쟁점에 대해 삼성 측이 전문심리위원으로 추천한 김경수 변호사는 동의하지 않는단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김 변호사는 전문심리위원 보고서에서 “정권을 거치며 28년간 검찰에 몸담아 온 저의 경험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며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유발되는 이른바 재벌총수 등의 뇌물 횡령 등의 범죄는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도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어 온 것이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 많이 일어났던 것과 유사한 불법과 비리가 재발되지 않도록 확인하고 점검하는 (삼성 측) 노력은 의미있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보완점 5가지 빼곡히…처방전 같은 판결문

재판부는 삼성 준법감시제도의 핵심적 미비점을 지적한 뒤, 크게 다섯 가지 사항이 보완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처방전 같은 판결문을 이어갔습니다.

재판부는 그동안 삼성그룹 총수들의 뇌물·횡령 범죄 등을 보면 과거 구조조정본부와 미래전략실 등 그룹의 ‘컨트롤 타워’ 조직이 위법 행위를 주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 삼성의 준법감시제도에는 이같은 ‘컨트롤 타워’ 조직을 통해 위법 행위가 벌어지는 데 대한 대응방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지 않아 문제라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여기서 삼성그룹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조직이 무엇인지 정확히 특정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특별검사는 삼성그룹의 사업지원TF가 미래전략실의 후신이라고 재판에서 주장해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룹 총수의 지시사항을 이행하는 사업지원TF에 대한 검증은 실효적 준법감시제도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사업지원TF와 미래전략실은 다른 조직이라며 반박해 왔지만, 마지막 재판을 하루 앞두고 돌연 재판부에 “사업지원TF의 역할이 무엇이고 경영권 승계 업무를 담당했는지, 향후 담당할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점검하겠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해 문제 제기를 일견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 부회장도 최후 진술에서 “사업지원TF는 다른 조직보다 더 엄격하게 준법감시를 받게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개선 의지가 현행 준법감시제도에 대한 평가에 반영되진 못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계열사에서 독립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등 단 ‘7개 회사’에 한해 준법감시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꼽았습니다. 최고 경영진의 위법행위는 7개 회사 이외의 회사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며, 과거 케이스포츠재단에 대한 삼성그룹의 지원에 에스원과 제일기획이 동원된 사례나 최근 삼성바이오로직스와 관련해 분식회계 등 여러 형사사건이 불거진 사례를 그 근거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실행행위 단계에서 경영권 승계 관련 불법행위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삼성그룹 계열사 대부분에 대해 실효적인 준법감시가 이뤄져야 할 것인데, 현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조직만으로는 이를 감당하기에 무리가 있어 보인다”라고 꼬집었습니다.

재판부는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법원의 1심 판결이 아직 선고되지 않았다거나 위원회 출범 전 있었던 일이라는 이유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를 안한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필수적인 작업을 누락한 것이라고도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비자금 조성과 임직원을 동원한 차명주식 보유 문제도 실효적 감시가 강화돼야 할 법적 위험이라고 재판부는 설명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준법감시제도를 실효적으로 운영하겠다”고 공언한 삼성 측이 그 약속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준법감시위원 보고서와 재판부 판결문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 회복적 사법의 또 다른 실험? 부적절한 선례?

삼성 준법감시제도에 대한 다각도의 검토가 있었단 점에서 이번 재판의 의미는 적지 않지만, 그와 별도로 이같은 재판 진행이 적절했는지는 생각해 볼 만한 주제입니다.

기업 내 준법감시제도의 운영 성과를 기업 총수의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 요소로 고려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은 그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가 실효적 준법감시제도를 이 부회장의 양형에 반영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자, 특검은 “감경요소에 해당되지도 않는 점에 대한 양형 심리를 진행해 이를 근거로 피고인 이재용 등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겠다는 예단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라며 지난해 2월 재판장에 대해 기피신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경제개혁연대는 판결 선고 후 논평을 내고 “(횡령 범죄 등의) 피해자인 기업이 운영하는 준법감시제도를 회사에 피해를 입힌 경영진들에게 유리한 ‘범행 후 정황’으로 (양형에) 반영할 수도 있음을 인정한 것 자체가 부당하다”며 재판부가 부적절한 선례를 남겼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단체는 “불법이나 피해 예방을 위한 회사의 준법감시 노력이, 경영진이나 총수에 대한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될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사법부는 부정해야 할 것”이라며 “이는 재판부가 강조한 ‘회복적 사법’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양형을 함에 있어 이재용 부회장이 스스로 준법경영을 실천할지와 회사가 준법감시체계를 갖추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며 “재판부의 인식은 기업 내에서 총수가 갖는 지위와 권한을 인정하는 후진적 지배구조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쟁점에 대해 법원은 지난해 4월 특검의 기피신청을 기각하며 한번 판단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재판장 배준현)는 “피고인들이 향후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기업 내부 비리를 실효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준법감시제도를 마련하여 운영하고 그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스스로 다시는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경우, 이를 본안 사건의 여러 양형 사유 중 하나로 고려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라고 밝혔습니다.

판결 선고는 끝났지만, 이번 재판에서 파생된 의미와 쟁점은 이후로도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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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 ‘면피용 준법감시’ 안 되려면…해답은 판결문에
    • 입력 2021-01-20 06:01:32
    취재K

“삼성의 여러 활동에 대해 준법감시를 한다는 건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기관이 있단 건 상당수 기관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이고, 다른 회사들은 하지도 못합니다. 그에 못지않게 피고인들의 개선의지와 준법의지도 강하게 반영됐다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형식적 보여주기가 아니라는 것도 단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게 1년 전부터 보여주기만으로 이뤄질 수 있겠습니까. 충분하고 진지한 반성의 징표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12월 30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최후 변론에서, 변호인들은 삼성그룹 준법감시제도의 진정성을 강조했습니다. 집행유예를 위한 면피용·보여주기식 도구가 아니라 이 부회장의 진지한 반성과 의지가 녹아든 결과물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피고인들의 양형에 대한 변론 과정에서 나왔던 이야기인 만큼, 이 제도의 실효성을 인정해 이 부회장 등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해 달라는 게 핵심 취지였습니다.

이 부회장 본인도 최후 진술을 통해 “모두가 철저하게, 준법감시의 틀 안에 있는 회사로 (삼성을) 반드시 바꾸겠다”며 “제가 책임지고 추진하겠다. 분명하게 약속드린다”라고 공언하며 재판부의 선처를 구했습니다.

■ 진정성은 있었지만 실효성은 없었다

이에 대한 재판부의 응답, 그제(18일) 판결 선고에서 확인됐습니다.

재판부는 “이재용 피고인은 재판과정에서 새로운, 강화된 준법감시제도를 운영하며 준법 경영의지를 진정성 있게 보여줬다”고 언급하면서도, 현재의 삼성 준법감시제도로는 최고경영진의 위법행위를 실효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삼성 준법감시제도를 점검할 전문심리위원이 구성된 11월 초부터, 2달이 넘는 점검 기간을 거쳐 재판부가 내놓은 결론입니다.

국내 재계 1위 기업인 삼성의 준법감시제도에 대해 외부의 직접적인 검토 작업이 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인 만큼, 재판부의 결론은 한 형사재판의 판결 그 이상의 사회적 가치를 지니게 됐습니다. 재판부가 전문심리위원들의 삼성 준법감시제도 점검 보고서를 법원 홈페이지에 공개한 이유이기도 한데요. 해당 게시글은 한 달 만에 2천 5백 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점검 과정을 총괄해 온 재판부가 짚은 삼성 준법감시제도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판결문에 적힌 관련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 “준법감시제도 양형 반영, 매우 신중해야”

당초 이 부회장과 삼성이 넘어야 할 허들은 그리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재판부가 지난해 1월 17일 전문심리위원 도입을 결정하면서 “준법감시제도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즉 실효적으로 운영돼야만 양형 조건으로 고려될 수 있다”고 분명히 했기 때문입니다.

이 실효성 충족 여부를 두고 특별검사와 변호인, 전문심리위원 3명의 의견이 크게 갈렸는데요. 선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재판부의 눈높이를 좀 더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재판부는 “준법감시제도를 도입하거나 강화했다는 사정을 양형에 긍정적인 요소로 반영하는 데에는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판결문에 적었습니다. 특히 이 부회장 사건처럼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이 선고된 이후에야 준법감시제도를 강화한 경우에는 양형 고려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법원에서까지 유죄가 인정되면 그제야 준법감시제도를 도입하거나 강화해도 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기업들에게 줄 수 있다는 겁니다.

“인센티브를 바라고 준법감시제도를 자발적으로 운영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위법행위에 대한 엄정한 처벌 및 위법행위는 적발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기업이 위법행위를 했음에도 솜방망이 처벌이 이루어지거나 적발될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게 되면, 굳이 비용을 들여가면서까지 준법감시제도를 자발적으로 운영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중략)… 실효성이 담보되지 않은 준법감시제도를 근거로 감형을 하게 되면, 오히려 위법행위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라는 전제 자체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 (판결문 30~31쪽)

재판부는 그러면서 “준법감시제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위법행위의 예방에 있는 것이지, 감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판결문에 적었습니다.

■ 포탄이 ‘떨어진 곳’과 ‘떨어질 곳’

재판부는 그러면서 “실효적인 준법감시는 법적 위험의 평가로부터 시작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표현을 바꿔, 법적 위험의 평가가 미흡할 때 준법감시는 실효성을 갖지 못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 뜻을 이해하기 위해, 강일원 전문심리위원(전 헌법재판관)이 다른 위원들과 가진 첫 회의에서 했다는 비유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 번 포탄이 떨어진 곳에는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 홍순탁 전문심리위원(회계사)은 “한 번 사고가 난 유형 그대로는 나지 않는다. 다른 사고가 날 법한 것들을 찾아내야지, 이미 사고가 난 그 유형만 대비해선 절대 사고를 막을 수 없다. 이는 내부통제의 기본”이라고 재판에서 부연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과거 잘못만 되짚을 것이 아니라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위법행위를 유형별로 정리해 대비하는 게 준법감시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이 부회장 사건에서는 경영권 승계를 현안으로 한 뇌물공여 행위가 문제가 됐으니, 기업 총수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위법행위를 유형별로 예상해 발생 가능한 범죄 행위의 위험성을 정의해 두어야겠지요.

하지만 재판부는 삼성 준법감시제도가 이미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고, 향후 포탄이 떨어질 자리에까지 시야를 넓혀 대비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삼성 준법감시제도의 실효성이 낮게 평가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삼성그룹의 강화된 준법감시제도는 일상적인 준법감시 활동에 더하여 대외후원금과 내부거래 등 이 사건에서 문제된 위법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준법감시 활동을 하고 있으나,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위험을 정의하고 이에 대비한 선제적 위험 예방 및 감시 활동을 하는 데까지는 이르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 33쪽)

(이 쟁점에 대해 삼성 측이 전문심리위원으로 추천한 김경수 변호사는 동의하지 않는단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김 변호사는 전문심리위원 보고서에서 “정권을 거치며 28년간 검찰에 몸담아 온 저의 경험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며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유발되는 이른바 재벌총수 등의 뇌물 횡령 등의 범죄는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도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어 온 것이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 많이 일어났던 것과 유사한 불법과 비리가 재발되지 않도록 확인하고 점검하는 (삼성 측) 노력은 의미있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보완점 5가지 빼곡히…처방전 같은 판결문

재판부는 삼성 준법감시제도의 핵심적 미비점을 지적한 뒤, 크게 다섯 가지 사항이 보완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처방전 같은 판결문을 이어갔습니다.

재판부는 그동안 삼성그룹 총수들의 뇌물·횡령 범죄 등을 보면 과거 구조조정본부와 미래전략실 등 그룹의 ‘컨트롤 타워’ 조직이 위법 행위를 주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 삼성의 준법감시제도에는 이같은 ‘컨트롤 타워’ 조직을 통해 위법 행위가 벌어지는 데 대한 대응방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지 않아 문제라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여기서 삼성그룹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조직이 무엇인지 정확히 특정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특별검사는 삼성그룹의 사업지원TF가 미래전략실의 후신이라고 재판에서 주장해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룹 총수의 지시사항을 이행하는 사업지원TF에 대한 검증은 실효적 준법감시제도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사업지원TF와 미래전략실은 다른 조직이라며 반박해 왔지만, 마지막 재판을 하루 앞두고 돌연 재판부에 “사업지원TF의 역할이 무엇이고 경영권 승계 업무를 담당했는지, 향후 담당할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점검하겠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해 문제 제기를 일견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 부회장도 최후 진술에서 “사업지원TF는 다른 조직보다 더 엄격하게 준법감시를 받게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개선 의지가 현행 준법감시제도에 대한 평가에 반영되진 못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계열사에서 독립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등 단 ‘7개 회사’에 한해 준법감시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꼽았습니다. 최고 경영진의 위법행위는 7개 회사 이외의 회사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며, 과거 케이스포츠재단에 대한 삼성그룹의 지원에 에스원과 제일기획이 동원된 사례나 최근 삼성바이오로직스와 관련해 분식회계 등 여러 형사사건이 불거진 사례를 그 근거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실행행위 단계에서 경영권 승계 관련 불법행위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삼성그룹 계열사 대부분에 대해 실효적인 준법감시가 이뤄져야 할 것인데, 현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조직만으로는 이를 감당하기에 무리가 있어 보인다”라고 꼬집었습니다.

재판부는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법원의 1심 판결이 아직 선고되지 않았다거나 위원회 출범 전 있었던 일이라는 이유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를 안한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필수적인 작업을 누락한 것이라고도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비자금 조성과 임직원을 동원한 차명주식 보유 문제도 실효적 감시가 강화돼야 할 법적 위험이라고 재판부는 설명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준법감시제도를 실효적으로 운영하겠다”고 공언한 삼성 측이 그 약속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준법감시위원 보고서와 재판부 판결문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 회복적 사법의 또 다른 실험? 부적절한 선례?

삼성 준법감시제도에 대한 다각도의 검토가 있었단 점에서 이번 재판의 의미는 적지 않지만, 그와 별도로 이같은 재판 진행이 적절했는지는 생각해 볼 만한 주제입니다.

기업 내 준법감시제도의 운영 성과를 기업 총수의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 요소로 고려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은 그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가 실효적 준법감시제도를 이 부회장의 양형에 반영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자, 특검은 “감경요소에 해당되지도 않는 점에 대한 양형 심리를 진행해 이를 근거로 피고인 이재용 등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겠다는 예단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라며 지난해 2월 재판장에 대해 기피신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경제개혁연대는 판결 선고 후 논평을 내고 “(횡령 범죄 등의) 피해자인 기업이 운영하는 준법감시제도를 회사에 피해를 입힌 경영진들에게 유리한 ‘범행 후 정황’으로 (양형에) 반영할 수도 있음을 인정한 것 자체가 부당하다”며 재판부가 부적절한 선례를 남겼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단체는 “불법이나 피해 예방을 위한 회사의 준법감시 노력이, 경영진이나 총수에 대한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될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사법부는 부정해야 할 것”이라며 “이는 재판부가 강조한 ‘회복적 사법’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양형을 함에 있어 이재용 부회장이 스스로 준법경영을 실천할지와 회사가 준법감시체계를 갖추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며 “재판부의 인식은 기업 내에서 총수가 갖는 지위와 권한을 인정하는 후진적 지배구조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쟁점에 대해 법원은 지난해 4월 특검의 기피신청을 기각하며 한번 판단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재판장 배준현)는 “피고인들이 향후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기업 내부 비리를 실효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준법감시제도를 마련하여 운영하고 그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스스로 다시는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경우, 이를 본안 사건의 여러 양형 사유 중 하나로 고려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라고 밝혔습니다.

판결 선고는 끝났지만, 이번 재판에서 파생된 의미와 쟁점은 이후로도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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