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균에 눈 먼 남편” 병간호와 생계 떠맡은 결혼 이주여성

입력 2021.01.30 (08:01) 수정 2021.01.3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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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 퇴원을 앞둔 남편을 간호하는 결혼이주여성 P씨. 병원 퇴원을 앞둔 남편을 간호하는 결혼이주여성 P씨.

7년 전 24살 꽃다운 나이에 한국인 남편 A 씨(53)와 결혼한 뒤 베트남에서 제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결혼 이주여성 P 씨는 막막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남편 A씨가 양쪽 눈을 비롯해 전신에 곰팡이균으로 인한 염증이 생기는 큰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상황이 악화돼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 남편은 도내 병원에서는 수술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한국말도 서툴고 당장 수중에 쥔 돈도 별로 없는 P씨가 남편을 위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음식을 먹여주고 용변을 처리해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P 씨는 마지막 방법으로 이주여성상담소 문을 두드렸습니다.


“서울 큰 병원 가셔야….” 남편 병명도 모른 채 발만 동동

 남편 A씨는 현재 입모양으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지만 목소리를 내기는 힘든 상태다. 남편 A씨는 현재 입모양으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지만 목소리를 내기는 힘든 상태다.

P 씨는 남편이 제주대학병원에서 퇴원해야 하는 어제(29일) 오전 기자를 만났습니다.
한국말이 서툴러 제주폭력피해이주여성상담소의 통역 도움을 받으며 P 씨는 모국어로 쉼 없이 ‘너무 힘들다.’고 반복했습니다. 양 쪽 눈이 멀고, 스스로 거동할 수도, 대화도 불가능한 남편을 병간호하며 동시에 월 백만 원 남짓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갔던 P 씨는 ‘남편이 퇴원하면 내가 돈을 벌 수도 없게 된다’며 남편을 받아줄 병원과 일자리가 간절하다고 토로했습니다.

P 씨는 남편이 서울대병원에서 처음 안과 진료를 받았던 2018년 당시 이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경제적 사정과 완치 가능성 등을 고민하던 남편이 수술을 포기하고 제주로 돌아왔고, 최근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졌다는 겁니다. 곰팡이균으로 인해 양쪽 눈 모두 시력을 잃다 못해, 염증이 온몸으로 퍼져 스스로 화장실조차 갈 수 없어진 겁니다.

남편을 응급환자로 받아준 도내 가장 큰 병원에서조차 더 해줄 수 있는 치료나 검사가 없다며, 수술이 가능한 서울대병원으로 옮기는 게 낫다고 P 씨에게 설명했습니다. 게다가 일주일만에 50만 원 남짓 입원비와 치료비가 청구돼, 더 불어날 병원비를 P 씨 혼자 감당하기도 벅찼습니다.


이주여성상담소 직원들도 발벗고 도왔지만…병원 “모두 거절”

제주폭력피해이주여성상담소 직원들은 P 씨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의료비 지원을 받기엔 A씨가 내는 월 10만 원, 최근 2년여간 미납된 건강보험료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건강보험공단에 찾아간 상담소 직원들과 P씨는 청구액이 왜 이렇게 많은지 물었는데, 시골 주택 한 채가 A 씨의 재산으로 올려져있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P씨는 물론 A 씨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재산이었습니다.

취재를 통해 확인해보니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A 씨의 모친이 남긴 집으로, 형제들과의 상속 관계가 얽혀있었습니다. P 씨는 A 씨의 배우자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공단에서 확인하기 힘들었고, 이 때문에 그나마 기대했던 의료비 지원이 허무하게 막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P 씨의 남편을 받아줄 병원을 찾기 위해 이주여성상담소 직원들이 동사무소와 복지센터, 요양병원 이곳저곳에 문의했지만 결국 허사였습니다. 적극적인 치료가 아닌 입원이라도 부탁하는 상담소 직원들에게 ‘코로나19로 남는 병실이 없다’, ‘정확한 병명을 모르면 이곳에서 진료가 안 돼 어렵다’ ‘50대라서 안 된다’ ‘암환자만 입원 가능해서 안된다’고 설명하는 등 거절의 이유도 제각각이었습니다.

결국 남편의 병을 처음 진단해주고 수술을 권했던 서울대병원에 가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수중에 쥔 돈도 넉넉지 않은 상황에 P씨가 거동도 불가능한 남편을 보살피며 비행기를 타 서울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P씨의 남편 진단서. P씨의 남편 진단서.

한국말이 서툰 P 씨를 대신해 상담소 직원들이 서울대병원에 연락해 ‘A 씨의 정확한 병명이라도 알려주면 입원 가능한 가까운 병원을 알아보겠다’고 부탁했지만, ‘당사자나 대리인이 직접 와서 확인해야 한다’는 냉정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지금까지 P씨가 아는 남편의 병명은 진단서에 쓰인 ‘기타 안내염’. 이 다섯 글자만으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병환 상태로, P씨는 ‘남편 몸에 곰팡이균이 가득하다’라고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퇴원 예정일까지 발만 동동 구른 P 씨는 어제(29일) 오전 KBS 취재가 시작되자 남편을 받아주겠다는 병원이 같은 날 생겨나,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남편 숨져 아이 셋과 모텔 전전…” 고령 배우자에 기댄 결혼이주여성의 삶

P 씨처럼 남편만 믿고 한국에 온 결혼이주여성들은 배우자가 큰 병에 걸리거나 사망할 경우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놓이고 있습니다.

제주폭력피해이주여성상담소에서 2년째 베트남 여성을 상담하고 있는 김선미 씨는 “남편이 숨지자 집에서 쫓겨난 결혼이주여성을 지난해 상담했었다”며 “20대 어린나이의 이 여성은 어린 자녀 셋을 데리고 모텔을 수개월 전전하던 상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1990년대부터 국내 결혼이주여성이 늘면서 가정 폭력 문제나 인권 침해, 범죄를 막기 위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돼왔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배우자의 사망이나 질병이 미치는 결혼이주여성의 삶에 대한 연구는 이주여성을 지원하는 전문기관에서조차 찾기 힘든 실정입니다.

특히 초창기 급증한 한국 결혼이주여성과 남편 간 나이 차가 매우 컸던 것을 감안하면, 이미 노년층에 접어든 배우자를 둔 결혼이주여성 또한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P 씨의 사례처럼 배우자가 병환이 깊거나 혹은 사망에 이른 뒤에도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발 딛고 살 수 있도록 도울 사회적 울타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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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곰팡이균에 눈 먼 남편” 병간호와 생계 떠맡은 결혼 이주여성
    • 입력 2021-01-30 08:01:56
    • 수정2021-01-30 10:36:43
    취재K
 병원 퇴원을 앞둔 남편을 간호하는 결혼이주여성 P씨.
7년 전 24살 꽃다운 나이에 한국인 남편 A 씨(53)와 결혼한 뒤 베트남에서 제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결혼 이주여성 P 씨는 막막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남편 A씨가 양쪽 눈을 비롯해 전신에 곰팡이균으로 인한 염증이 생기는 큰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상황이 악화돼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 남편은 도내 병원에서는 수술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한국말도 서툴고 당장 수중에 쥔 돈도 별로 없는 P씨가 남편을 위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음식을 먹여주고 용변을 처리해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P 씨는 마지막 방법으로 이주여성상담소 문을 두드렸습니다.


“서울 큰 병원 가셔야….” 남편 병명도 모른 채 발만 동동

 남편 A씨는 현재 입모양으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지만 목소리를 내기는 힘든 상태다.
P 씨는 남편이 제주대학병원에서 퇴원해야 하는 어제(29일) 오전 기자를 만났습니다.
한국말이 서툴러 제주폭력피해이주여성상담소의 통역 도움을 받으며 P 씨는 모국어로 쉼 없이 ‘너무 힘들다.’고 반복했습니다. 양 쪽 눈이 멀고, 스스로 거동할 수도, 대화도 불가능한 남편을 병간호하며 동시에 월 백만 원 남짓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갔던 P 씨는 ‘남편이 퇴원하면 내가 돈을 벌 수도 없게 된다’며 남편을 받아줄 병원과 일자리가 간절하다고 토로했습니다.

P 씨는 남편이 서울대병원에서 처음 안과 진료를 받았던 2018년 당시 이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경제적 사정과 완치 가능성 등을 고민하던 남편이 수술을 포기하고 제주로 돌아왔고, 최근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졌다는 겁니다. 곰팡이균으로 인해 양쪽 눈 모두 시력을 잃다 못해, 염증이 온몸으로 퍼져 스스로 화장실조차 갈 수 없어진 겁니다.

남편을 응급환자로 받아준 도내 가장 큰 병원에서조차 더 해줄 수 있는 치료나 검사가 없다며, 수술이 가능한 서울대병원으로 옮기는 게 낫다고 P 씨에게 설명했습니다. 게다가 일주일만에 50만 원 남짓 입원비와 치료비가 청구돼, 더 불어날 병원비를 P 씨 혼자 감당하기도 벅찼습니다.


이주여성상담소 직원들도 발벗고 도왔지만…병원 “모두 거절”

제주폭력피해이주여성상담소 직원들은 P 씨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의료비 지원을 받기엔 A씨가 내는 월 10만 원, 최근 2년여간 미납된 건강보험료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건강보험공단에 찾아간 상담소 직원들과 P씨는 청구액이 왜 이렇게 많은지 물었는데, 시골 주택 한 채가 A 씨의 재산으로 올려져있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P씨는 물론 A 씨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재산이었습니다.

취재를 통해 확인해보니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A 씨의 모친이 남긴 집으로, 형제들과의 상속 관계가 얽혀있었습니다. P 씨는 A 씨의 배우자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공단에서 확인하기 힘들었고, 이 때문에 그나마 기대했던 의료비 지원이 허무하게 막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P 씨의 남편을 받아줄 병원을 찾기 위해 이주여성상담소 직원들이 동사무소와 복지센터, 요양병원 이곳저곳에 문의했지만 결국 허사였습니다. 적극적인 치료가 아닌 입원이라도 부탁하는 상담소 직원들에게 ‘코로나19로 남는 병실이 없다’, ‘정확한 병명을 모르면 이곳에서 진료가 안 돼 어렵다’ ‘50대라서 안 된다’ ‘암환자만 입원 가능해서 안된다’고 설명하는 등 거절의 이유도 제각각이었습니다.

결국 남편의 병을 처음 진단해주고 수술을 권했던 서울대병원에 가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수중에 쥔 돈도 넉넉지 않은 상황에 P씨가 거동도 불가능한 남편을 보살피며 비행기를 타 서울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P씨의 남편 진단서.
한국말이 서툰 P 씨를 대신해 상담소 직원들이 서울대병원에 연락해 ‘A 씨의 정확한 병명이라도 알려주면 입원 가능한 가까운 병원을 알아보겠다’고 부탁했지만, ‘당사자나 대리인이 직접 와서 확인해야 한다’는 냉정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지금까지 P씨가 아는 남편의 병명은 진단서에 쓰인 ‘기타 안내염’. 이 다섯 글자만으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병환 상태로, P씨는 ‘남편 몸에 곰팡이균이 가득하다’라고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퇴원 예정일까지 발만 동동 구른 P 씨는 어제(29일) 오전 KBS 취재가 시작되자 남편을 받아주겠다는 병원이 같은 날 생겨나,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남편 숨져 아이 셋과 모텔 전전…” 고령 배우자에 기댄 결혼이주여성의 삶

P 씨처럼 남편만 믿고 한국에 온 결혼이주여성들은 배우자가 큰 병에 걸리거나 사망할 경우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놓이고 있습니다.

제주폭력피해이주여성상담소에서 2년째 베트남 여성을 상담하고 있는 김선미 씨는 “남편이 숨지자 집에서 쫓겨난 결혼이주여성을 지난해 상담했었다”며 “20대 어린나이의 이 여성은 어린 자녀 셋을 데리고 모텔을 수개월 전전하던 상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1990년대부터 국내 결혼이주여성이 늘면서 가정 폭력 문제나 인권 침해, 범죄를 막기 위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돼왔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배우자의 사망이나 질병이 미치는 결혼이주여성의 삶에 대한 연구는 이주여성을 지원하는 전문기관에서조차 찾기 힘든 실정입니다.

특히 초창기 급증한 한국 결혼이주여성과 남편 간 나이 차가 매우 컸던 것을 감안하면, 이미 노년층에 접어든 배우자를 둔 결혼이주여성 또한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P 씨의 사례처럼 배우자가 병환이 깊거나 혹은 사망에 이른 뒤에도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발 딛고 살 수 있도록 도울 사회적 울타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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