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아웅산 수치’ 인생의 3가지 장면

입력 2021.02.01 (14:00) 수정 2021.02.01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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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아들과 함께, 아웅산 수치는 영국 유학길에 에어리스를 만나 결혼, 두 아들을 낳았다. 이 사진을 실은 더타임지는    그녀를 ‘강철 나비(Iron Butterfly)’라고 표현했다.젊은 시절 아들과 함께, 아웅산 수치는 영국 유학길에 에어리스를 만나 결혼, 두 아들을 낳았다. 이 사진을 실은 더타임지는 그녀를 ‘강철 나비(Iron Butterfly)’라고 표현했다.

1.첫번째 장면

45년생, 올해 75세다. 미얀마 민족주의자면서 독립영웅인 아웅산 장군의 딸로 태어났다( 해외 국가원수들은 미얀마를 방문하면, 반드시 그의 묘소를 참배한다. 83년 미얀마묘소 참배 참사도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다).

15살에 영국 유학길에 올라 옥스포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영국인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나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33살이던 88년 어머니 병문안을 위해 고국을 찾았다. 마침 그해 랑군에선 8888(88년 8월 8일 랑군 대학생들의 민주화 봉기)운동이 벌어졌다. 민주화 시위에 참가했다. 그렇게 그녀의 2번째 인생이 시작됐다.


1991년, 구금중인 아웅산 수치여사는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아들과 남편이 대리 수상했다 (출처 EPA=연합뉴스) 1991년, 구금중인 아웅산 수치여사는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아들과 남편이 대리 수상했다 (출처 EPA=연합뉴스)

2. 두번째 장면

90년 마침내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를 얻어 군부 여당에 압승을 거둔다.

하지만 군은 총선 결과를 거부하고, 수치여사는 가택연금된다. 그녀의 길고 긴 구금의 시간은 이때부터다.

이듬해 그녀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구금중인 그녀 대신 시상식에 남편과 두 아들이 참석했다.(그녀는 2012년, 수상 21년만에 노르웨이를 방문해 수상연설을 한다)

99년 남편 에어리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웅산 수치는 군부가 재입국을 거부할 것을 우려해 영국을 찾지 못했다. 끝내 에어리스의 임종을 못했다.

수치여사는 2000년에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다시 구금된다. 2002년 UN의 중재로 석방되지만 2003년 다시 구금됐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15년 11월,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이 비로소 총선에서 승리했다. 미얀마에 첫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외국인 가족을 둔 국민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법률에 따라) 아웅산 수치는 외교부장관과 대통령 고문으로 취임한다. 의회는 그녀의 오른팔을 대통령으로 임명하며 사실상 아웅산 수치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군부의 영향력은 사실상 그대로였다. 미얀마 국민들은 '수치가 대통령 위에 있듯이, 군부는 헌법 위에 있다'고 말한다.

2017년, 학살을 피해 같은 이슬람국가인 방글라데시로 피난길에 오른 로힝야족. (사진 : 로이터) / 아웅산 수치고문의 노벨평화상을 회수하라는 영국 시민들의 피케팅 2017년, 학살을 피해 같은 이슬람국가인 방글라데시로 피난길에 오른 로힝야족. (사진 : 로이터) / 아웅산 수치고문의 노벨평화상을 회수하라는 영국 시민들의 피케팅

3. 세번째 장면

미얀마를 식민지배하던 영국은 미얀마 국민(불교)들이 독립운동을 하자, 북부 로힝야족(이슬람)을 동원했다. 독립을 원했던 로힝야족은 (어쩔수 없이 ) 영국편에 서서 미얀마인들을 탄압했다.

하지만 미얀마 독립 이후 로힝야족은 영국으로부터 버려졌다. 미얀마 국민이 아닌 미얀마 국민 으로 남았고, 미얀마 군부는 민족감정을 자극하며 지속적으로 로힝야족을 차별하고 탄압해왔다.

2018년 미얀마군은 로힝야 무장세력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무차별 학살하고 성폭행했다. 확인된 사망자만 9,700여 명.

로힝야족 인구의 2/3인 62만 명이 같은 이슬람국가인 방글라데시로 끝없는 피난길에 올랐다. 1년 뒤 유엔 진상조사위는 이 사건을 '종교 인종 부족의 씨를 말리려는 중대 범죄'로 규정했다.

이를 지켜보기만 한 아웅산 수치고문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실망이 이어졌다.(이는 아웅산 수치가 여전히 미얀마 군부에 발목이 잡혀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군부와 악수하는 아웅산 수치 고문 (출처 로이터=연합뉴스)군부와 악수하는 아웅산 수치 고문 (출처 로이터=연합뉴스)

유엔 진상조사위에 출석한 아웅산 수치 고문은 “로힝야족의 무력 사용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었다"고 군부를 옹호한다.

이 날 이후 국제사회는 사실상 민주화영웅 '강철 나비'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90년 이후 아웅산 수치의 가택연금을 해제하게 만든 것은 선진국들의 강력한 경제 제재의 힘이였다. 로힝야족 학살이후 국제사회는 같은 방법으로 아웅산 수치의 미얀마에 수많은 경제 제재를 시행중이다)

아웅산 수치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급전 직하했어도, 미얀마 국민은 수치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보여줬다.

지난해 11월 열린 미얀마 총선에서 NLD는 다시 군부에 맞서 압승을 거뒀다(미얀마 총선은 미리 군부에 25%의 의석을 주고 실시된다).

하지만 군부는 끊임없이 부정선거를 언급 하며 총선을 부정했다. 그리고 오늘(1일) '선거부정에 대응해 1년간 비상조치를 단행'한다고 밝혔다. 쿠데타다. 대통령과 아웅산수치 고문 등은 다시 구금됐다. 미얀마의 시계는 다시 1990년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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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01 14:00:16
    • 수정2021-02-01 14:43:56
    특파원 리포트


젊은 시절 아들과 함께, 아웅산 수치는 영국 유학길에 에어리스를 만나 결혼, 두 아들을 낳았다. 이 사진을 실은 더타임지는    그녀를 ‘강철 나비(Iron Butterfly)’라고 표현했다.
1.첫번째 장면

45년생, 올해 75세다. 미얀마 민족주의자면서 독립영웅인 아웅산 장군의 딸로 태어났다( 해외 국가원수들은 미얀마를 방문하면, 반드시 그의 묘소를 참배한다. 83년 미얀마묘소 참배 참사도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다).

15살에 영국 유학길에 올라 옥스포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영국인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나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33살이던 88년 어머니 병문안을 위해 고국을 찾았다. 마침 그해 랑군에선 8888(88년 8월 8일 랑군 대학생들의 민주화 봉기)운동이 벌어졌다. 민주화 시위에 참가했다. 그렇게 그녀의 2번째 인생이 시작됐다.


1991년, 구금중인 아웅산 수치여사는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아들과 남편이 대리 수상했다 (출처 EPA=연합뉴스)
2. 두번째 장면

90년 마침내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를 얻어 군부 여당에 압승을 거둔다.

하지만 군은 총선 결과를 거부하고, 수치여사는 가택연금된다. 그녀의 길고 긴 구금의 시간은 이때부터다.

이듬해 그녀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구금중인 그녀 대신 시상식에 남편과 두 아들이 참석했다.(그녀는 2012년, 수상 21년만에 노르웨이를 방문해 수상연설을 한다)

99년 남편 에어리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웅산 수치는 군부가 재입국을 거부할 것을 우려해 영국을 찾지 못했다. 끝내 에어리스의 임종을 못했다.

수치여사는 2000년에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다시 구금된다. 2002년 UN의 중재로 석방되지만 2003년 다시 구금됐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15년 11월,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이 비로소 총선에서 승리했다. 미얀마에 첫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외국인 가족을 둔 국민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법률에 따라) 아웅산 수치는 외교부장관과 대통령 고문으로 취임한다. 의회는 그녀의 오른팔을 대통령으로 임명하며 사실상 아웅산 수치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군부의 영향력은 사실상 그대로였다. 미얀마 국민들은 '수치가 대통령 위에 있듯이, 군부는 헌법 위에 있다'고 말한다.

2017년, 학살을 피해 같은 이슬람국가인 방글라데시로 피난길에 오른 로힝야족. (사진 : 로이터) / 아웅산 수치고문의 노벨평화상을 회수하라는 영국 시민들의 피케팅
3. 세번째 장면

미얀마를 식민지배하던 영국은 미얀마 국민(불교)들이 독립운동을 하자, 북부 로힝야족(이슬람)을 동원했다. 독립을 원했던 로힝야족은 (어쩔수 없이 ) 영국편에 서서 미얀마인들을 탄압했다.

하지만 미얀마 독립 이후 로힝야족은 영국으로부터 버려졌다. 미얀마 국민이 아닌 미얀마 국민 으로 남았고, 미얀마 군부는 민족감정을 자극하며 지속적으로 로힝야족을 차별하고 탄압해왔다.

2018년 미얀마군은 로힝야 무장세력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무차별 학살하고 성폭행했다. 확인된 사망자만 9,700여 명.

로힝야족 인구의 2/3인 62만 명이 같은 이슬람국가인 방글라데시로 끝없는 피난길에 올랐다. 1년 뒤 유엔 진상조사위는 이 사건을 '종교 인종 부족의 씨를 말리려는 중대 범죄'로 규정했다.

이를 지켜보기만 한 아웅산 수치고문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실망이 이어졌다.(이는 아웅산 수치가 여전히 미얀마 군부에 발목이 잡혀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군부와 악수하는 아웅산 수치 고문 (출처 로이터=연합뉴스)
유엔 진상조사위에 출석한 아웅산 수치 고문은 “로힝야족의 무력 사용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었다"고 군부를 옹호한다.

이 날 이후 국제사회는 사실상 민주화영웅 '강철 나비'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90년 이후 아웅산 수치의 가택연금을 해제하게 만든 것은 선진국들의 강력한 경제 제재의 힘이였다. 로힝야족 학살이후 국제사회는 같은 방법으로 아웅산 수치의 미얀마에 수많은 경제 제재를 시행중이다)

아웅산 수치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급전 직하했어도, 미얀마 국민은 수치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보여줬다.

지난해 11월 열린 미얀마 총선에서 NLD는 다시 군부에 맞서 압승을 거뒀다(미얀마 총선은 미리 군부에 25%의 의석을 주고 실시된다).

하지만 군부는 끊임없이 부정선거를 언급 하며 총선을 부정했다. 그리고 오늘(1일) '선거부정에 대응해 1년간 비상조치를 단행'한다고 밝혔다. 쿠데타다. 대통령과 아웅산수치 고문 등은 다시 구금됐다. 미얀마의 시계는 다시 1990년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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