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신호위반 했다 숨져…2심도 ‘산재 인정’ 이유는?

입력 2021.02.05 (14:45) 수정 2021.02.0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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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A 씨의 차량 진행 방향에서 보이는 신호등 위치와 모습숨진 A 씨의 차량 진행 방향에서 보이는 신호등 위치와 모습

2019년 10월 제주도 내 모 왕복 7차로에서 승용차를 타고 출근하던 A씨가 버스와 충돌했다. A 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A 씨의 유족은 출근길에 사고를 당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청구했다. 근로자가 통상적인 경로와 방법으로 출근하다 발생한 사고는 출퇴근 재해로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는데, A씨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신호위반은 중과실에 해당한다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근로자의 범죄 등으로 발생한 사망은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다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37조를 근거로 든 것이다. 유족 측은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인 제주지방법원 제1행정부는 지난해 '비록 A씨의 과실이 일부 있다고 해도 이 사건이 오로지 A씨의 범죄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사건이 발생한 교차로의 신호등 설치와 관리에 하자가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고 전 A 씨의 차량은 정지선 위에 주차했는데, 1심 재판부는 제1 주신호등이 정지선 위에 설치돼 있어 A씨가 이를 볼 수 없었고, 교차로가 왕복 7차로여서 한눈에 반대 방향 차로까지 확인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판단했다.

또 제2 신호등이 반대 방향 차로 위에 설치돼 있어 운전자가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설사 인지하더라도 다른 진행 방향의 신호등으로 착각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근로복지공단의 재해조사서에 '신호 변경상태를 확인하지 못하고 주행해 A씨가 사망한 것'이라고 기재된 점 역시 근거로 들었다.

"중과실이라고 해서 기계적으로 평가해선 안 돼"

근로복지공단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광주고등법원 제주 제1행정부(왕정옥 부장판사)도 5일 또다시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12대 중과실로 인해 발생한 사고라고 해서 기계적으로 '근로자의 범죄행위로 재해가 발생했다고 평가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재판부에 A씨가 10년간 이 교차로를 출퇴근하며 신호 체계를 잘 알고 있었고, 사고 당시에도 고의로 신호를 위반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재판부는 일반적인 운전자는 신호등의 위치와 체계를 기억해서 의존하기보다는, 당시의 신호등과 주변 교통 상황 등을 인지하고 판단해 통과한다며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숨진 A씨가 출퇴근해온 기간에 교차로 주변에 건물이 신축되고,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새로 설치되는 등 상황이 지속적으로 변했지만, 원고 측이 교차로의 신호 위치와 체계가 동일하다고 인정할 자료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근로복지공단의 보조참가인으로 참여한 제주도가 '최근 3년간 도내 교차로에 설치된 배면 신호등(반대 방향 차로에 설치되는 신호등)에서 신호 오인으로 발생한 교통사고는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지만, 이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사고 당시 비가 내려 와이퍼를 작동하고 반대 방향 신호등 주변에 가로수가 심어져있어 A 씨의 시야가 방해받은 상태인 것으로 보이는 점, 정차한 위치에서 오른쪽 모퉁이 건물 때문에 시야가 제한된 점, 당시 시력이나 나이 등을 고려하면 신호 내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재판부는 "적색 신호를 인식하고도 사고와 부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신호를 위반할 만큼 급박한 사정 역시 찾아볼 수 없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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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근길 신호위반 했다 숨져…2심도 ‘산재 인정’ 이유는?
    • 입력 2021-02-05 14:45:56
    • 수정2021-02-05 17:24:18
    취재K
숨진 A 씨의 차량 진행 방향에서 보이는 신호등 위치와 모습
2019년 10월 제주도 내 모 왕복 7차로에서 승용차를 타고 출근하던 A씨가 버스와 충돌했다. A 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A 씨의 유족은 출근길에 사고를 당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청구했다. 근로자가 통상적인 경로와 방법으로 출근하다 발생한 사고는 출퇴근 재해로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는데, A씨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신호위반은 중과실에 해당한다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근로자의 범죄 등으로 발생한 사망은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다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37조를 근거로 든 것이다. 유족 측은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인 제주지방법원 제1행정부는 지난해 '비록 A씨의 과실이 일부 있다고 해도 이 사건이 오로지 A씨의 범죄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사건이 발생한 교차로의 신호등 설치와 관리에 하자가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고 전 A 씨의 차량은 정지선 위에 주차했는데, 1심 재판부는 제1 주신호등이 정지선 위에 설치돼 있어 A씨가 이를 볼 수 없었고, 교차로가 왕복 7차로여서 한눈에 반대 방향 차로까지 확인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판단했다.

또 제2 신호등이 반대 방향 차로 위에 설치돼 있어 운전자가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설사 인지하더라도 다른 진행 방향의 신호등으로 착각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근로복지공단의 재해조사서에 '신호 변경상태를 확인하지 못하고 주행해 A씨가 사망한 것'이라고 기재된 점 역시 근거로 들었다.

"중과실이라고 해서 기계적으로 평가해선 안 돼"

근로복지공단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광주고등법원 제주 제1행정부(왕정옥 부장판사)도 5일 또다시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12대 중과실로 인해 발생한 사고라고 해서 기계적으로 '근로자의 범죄행위로 재해가 발생했다고 평가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재판부에 A씨가 10년간 이 교차로를 출퇴근하며 신호 체계를 잘 알고 있었고, 사고 당시에도 고의로 신호를 위반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재판부는 일반적인 운전자는 신호등의 위치와 체계를 기억해서 의존하기보다는, 당시의 신호등과 주변 교통 상황 등을 인지하고 판단해 통과한다며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숨진 A씨가 출퇴근해온 기간에 교차로 주변에 건물이 신축되고,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새로 설치되는 등 상황이 지속적으로 변했지만, 원고 측이 교차로의 신호 위치와 체계가 동일하다고 인정할 자료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근로복지공단의 보조참가인으로 참여한 제주도가 '최근 3년간 도내 교차로에 설치된 배면 신호등(반대 방향 차로에 설치되는 신호등)에서 신호 오인으로 발생한 교통사고는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지만, 이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사고 당시 비가 내려 와이퍼를 작동하고 반대 방향 신호등 주변에 가로수가 심어져있어 A 씨의 시야가 방해받은 상태인 것으로 보이는 점, 정차한 위치에서 오른쪽 모퉁이 건물 때문에 시야가 제한된 점, 당시 시력이나 나이 등을 고려하면 신호 내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재판부는 "적색 신호를 인식하고도 사고와 부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신호를 위반할 만큼 급박한 사정 역시 찾아볼 수 없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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