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30만 명, 1조 6천억 원…‘임금체불 공화국’의 민낯

입력 2021.02.08 (07:00) 수정 2021.02.0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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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조 모 씨는 지난해 5월, 코로나19 때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뒤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식당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근무 조건이 맞지 않았다. 고민 끝에 한 달만 일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사장이 한 달 치 월급 120만 원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조 씨는 곧 주겠다는 사장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월급은 지급되지 않았다. 결국, 두 달 넘게 체불된 임금을 받지 못하자 지난해 8월 관할 지방 노동청에 진정을 접수했다.

노동청에 가서 보니 이미 다른 사람 5명이 조 씨처럼 문제의 사장에게 임금체불을 당했다며 진정을 신청한 상태였다. 체불 건수가 한두 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동청은 사장에 대해 임금체불에 의한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은 사장을 재판에 넘겼다.

법원에서도 유죄가 인정돼 벌금형이 내려졌다. 그러나 사장은 조 씨에게 50만 원만 줬을 뿐, 여전히 남은 임금은 주지 않고 있다.


조 씨처럼 임금을 떼인 노동자는 지난해 기준 30만 명에 달한다. 금액으로는 1조 6천억 원에 육박한다. 선진국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공식적인 피해 규모만 집계했으니 실제 임금체불 피해자 수와 금액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나마 2019년에 비해 8.1% 감소한 게 이 정도 수치다. '임금체불 공화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결코 과장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사업주가 임금을 안 주고 버틸 경우, 이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뤄질까?

■ 임금체불 1심 판결문 분석…실형은 4%, 벌금도 미미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KBS는 노무법인 '노동과인권'과 함께 대법원 홈페이지에 공개된 2020년 임금체불 사건 1심 판결문 1,247건을 전수 분석했다.

임금체불 사건 1심 재판의 선고 유형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벌금형(59%)으로 나타났다. 징역형·벌금형 집행유예(33%)가 뒤를 이었다.

실형이 선고된 경우는 45건으로 전체의 4%에 그쳤다. 실형 기간은 평균 7.4개월 불과했다.


선고 유형의 과반을 차지하는 벌금형이 얼마나 실효성 있는지도 분석했다. 벌금형이 내려진 임금체불 사건의 평균 체불액은 천 5백여만 원인데 평균 벌금액은 2백만 원가량이다. 체불액의 13% 수준인 셈이다.

임금체불액을 구간별로도 살펴봤다. 체불액이 5백만 원 미만일 경우 체불액 대비 벌금 비율은 30.1%로 비교적 높았다.

그런데 1천만 원 미만 구간에서는 벌금 비율이 18.5%로 떨어지더니 3천만 원 미만일 경우에는 12.6%, 5천만 원 미만일 경우 10% 아래로 떨어졌다. 1억 원 미만은 6%를 겨우 넘겼다.

사업주가 임금을 얼마나 많이 떼먹든 벌금은 대부분 수백만 원 수준에 그치는 게 일반적이다 보니, 체불액이 많을수록 체불액 대비 벌금 비율은 오히려 낮아지는 역설적인 결과가 나온 것이다.


■양형 이유 살펴봤더니…체당금 이용해도, 상습 체불해도 감형

임금체불 사건을 바라보는 사법부의 시각은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양형 이유도 분석했다. 주로 체불액과 체불 근로자 수, 체불 피해회복 여부, 범죄전력, 반성 여부, 체불 경위가 악의적인지 여부가 참작 사유로 언급된 걸 확인했다.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감형 사유로 내세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피해회복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피해회복'이 사업주에게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된 판결문은 377건이었는데, 이 중 42.7%는 피해 노동자가 국가(근로복지공단)로부터 긴급히 구제받는 '체당금' 제도를 이용하는 것을 피해 회복으로 보고 감형 이유로 삼았다.

임금체불 노동자의 피해 회복을 위한 돈은 국가가 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주에게 감형이라는 혜택이 돌아간 셈이다.

임금체불 범죄 전력이 13번 있는데도 '동종의 범죄전력은 있으나 벌금형을 초과하는 전력은 없다'는 이유로 감형해 주는 등 상습체불 사업주에게 솜방망이 처분을 내린 판결도 있었다.

판결문 분석을 함께한 박성우 노무법인 '노동과인권' 대표 노무사는 "임금체불은 노동자가 부양하고 있는 한 가정의 생계를 파괴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인데, 판사들이 임금체불 범죄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경향이 판결문 분석을 통해 확인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판사들은 임금체불 사건을 노동자의 생존권이 달린 노동법적 문제라기보다는, 경제 사범 같은 경제적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32조 2항은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근로의 의무'를 다했는데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국민에 대해 국가도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KBS는 오늘(8일)부터 나흘 동안 연속해서 <뉴스9>를 통해 판결 분석 결과를 포함해 임금체불 문제를 집중 보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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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간 30만 명, 1조 6천억 원…‘임금체불 공화국’의 민낯
    • 입력 2021-02-08 07:00:38
    • 수정2021-02-08 10:47:43
    취재K

30대 조 모 씨는 지난해 5월, 코로나19 때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뒤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식당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근무 조건이 맞지 않았다. 고민 끝에 한 달만 일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사장이 한 달 치 월급 120만 원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조 씨는 곧 주겠다는 사장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월급은 지급되지 않았다. 결국, 두 달 넘게 체불된 임금을 받지 못하자 지난해 8월 관할 지방 노동청에 진정을 접수했다.

노동청에 가서 보니 이미 다른 사람 5명이 조 씨처럼 문제의 사장에게 임금체불을 당했다며 진정을 신청한 상태였다. 체불 건수가 한두 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동청은 사장에 대해 임금체불에 의한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은 사장을 재판에 넘겼다.

법원에서도 유죄가 인정돼 벌금형이 내려졌다. 그러나 사장은 조 씨에게 50만 원만 줬을 뿐, 여전히 남은 임금은 주지 않고 있다.


조 씨처럼 임금을 떼인 노동자는 지난해 기준 30만 명에 달한다. 금액으로는 1조 6천억 원에 육박한다. 선진국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공식적인 피해 규모만 집계했으니 실제 임금체불 피해자 수와 금액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나마 2019년에 비해 8.1% 감소한 게 이 정도 수치다. '임금체불 공화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결코 과장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사업주가 임금을 안 주고 버틸 경우, 이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뤄질까?

■ 임금체불 1심 판결문 분석…실형은 4%, 벌금도 미미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KBS는 노무법인 '노동과인권'과 함께 대법원 홈페이지에 공개된 2020년 임금체불 사건 1심 판결문 1,247건을 전수 분석했다.

임금체불 사건 1심 재판의 선고 유형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벌금형(59%)으로 나타났다. 징역형·벌금형 집행유예(33%)가 뒤를 이었다.

실형이 선고된 경우는 45건으로 전체의 4%에 그쳤다. 실형 기간은 평균 7.4개월 불과했다.


선고 유형의 과반을 차지하는 벌금형이 얼마나 실효성 있는지도 분석했다. 벌금형이 내려진 임금체불 사건의 평균 체불액은 천 5백여만 원인데 평균 벌금액은 2백만 원가량이다. 체불액의 13% 수준인 셈이다.

임금체불액을 구간별로도 살펴봤다. 체불액이 5백만 원 미만일 경우 체불액 대비 벌금 비율은 30.1%로 비교적 높았다.

그런데 1천만 원 미만 구간에서는 벌금 비율이 18.5%로 떨어지더니 3천만 원 미만일 경우에는 12.6%, 5천만 원 미만일 경우 10% 아래로 떨어졌다. 1억 원 미만은 6%를 겨우 넘겼다.

사업주가 임금을 얼마나 많이 떼먹든 벌금은 대부분 수백만 원 수준에 그치는 게 일반적이다 보니, 체불액이 많을수록 체불액 대비 벌금 비율은 오히려 낮아지는 역설적인 결과가 나온 것이다.


■양형 이유 살펴봤더니…체당금 이용해도, 상습 체불해도 감형

임금체불 사건을 바라보는 사법부의 시각은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양형 이유도 분석했다. 주로 체불액과 체불 근로자 수, 체불 피해회복 여부, 범죄전력, 반성 여부, 체불 경위가 악의적인지 여부가 참작 사유로 언급된 걸 확인했다.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감형 사유로 내세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피해회복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피해회복'이 사업주에게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된 판결문은 377건이었는데, 이 중 42.7%는 피해 노동자가 국가(근로복지공단)로부터 긴급히 구제받는 '체당금' 제도를 이용하는 것을 피해 회복으로 보고 감형 이유로 삼았다.

임금체불 노동자의 피해 회복을 위한 돈은 국가가 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주에게 감형이라는 혜택이 돌아간 셈이다.

임금체불 범죄 전력이 13번 있는데도 '동종의 범죄전력은 있으나 벌금형을 초과하는 전력은 없다'는 이유로 감형해 주는 등 상습체불 사업주에게 솜방망이 처분을 내린 판결도 있었다.

판결문 분석을 함께한 박성우 노무법인 '노동과인권' 대표 노무사는 "임금체불은 노동자가 부양하고 있는 한 가정의 생계를 파괴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인데, 판사들이 임금체불 범죄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경향이 판결문 분석을 통해 확인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판사들은 임금체불 사건을 노동자의 생존권이 달린 노동법적 문제라기보다는, 경제 사범 같은 경제적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32조 2항은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근로의 의무'를 다했는데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국민에 대해 국가도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KBS는 오늘(8일)부터 나흘 동안 연속해서 <뉴스9>를 통해 판결 분석 결과를 포함해 임금체불 문제를 집중 보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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