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이 보이는 가장 오래된 조선 시대 그림은?
입력 2021.02.16 (09:00)
수정 2021.02.16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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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왕산인가? 먼저 이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조선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산은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그림으로만 보면 단연 '금강산'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신령한 산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성지(聖地)처럼 여겨졌습니다. 금강산 유람은 풍류를 아는 이라면 평생에 한 번은 해봐야 할, 요즘 말로 하면 '버킷 리스트'의 맨 꼭대기를 차지했죠. 그래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같은 걸출한 화가들의 그림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럼 그다음은? 바로 인왕산입니다. 궁금했죠. 금강산이야 원체 예로부터 이름난 명산이니 그렇다 쳐도, 그다음이 어째서 인왕산인가. 거리가 가까워서? 거리로만 따지면 경복궁 뒤편에 늠름하게 서 있는 백악산이 있고, 아래로는 남산도 있고, 좀 멀게는 관악산, 낙산, 북한산, 도봉산도 있죠. 도성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이렇게도 좋은 산이 많은데 왜 유독 인왕산 그림만 많은 걸까.
전국 팔도강산에 하고많은 명산이 즐비한데 어째서 화가들은 줄기차게 인왕산을 그렸을까.
그 해답이 돼줄 그림입니다. 너무나 잘 아시죠.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조선 회화 최대의 걸작입니다. 조선 시대에 수많은 산수화가 있었지만, 산을 주인공으로 세운 그림이 있었을까? 다시, 우리 산을 제대로 한 번 그려보겠다고 마음먹은 화가가 겸재 이전엔 단 한 명도 없었을까?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가 지금으로선 그 기준점이 된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죠. 이 그림 하나로 인왕산은 명실상부 조선의 수도 한양의 '랜드마크'로 우뚝 섭니다.
그러니 겸재 이후로 화가들이 인왕산을 그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실제로도 인왕산을 그린 조선 후기 그림은 무척 많습니다. 그만큼 인왕산은 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품고 있기도 하고요.
조선 말기 이후로 더는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았던 인왕산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고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화가들에 의해 '재발견'됩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화가가 그린 아주 희귀한 인왕산 그림이 있습니다.
미술사가의 황정수의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이숲, 2018)에서 만난 이 희귀한 인왕산 그림을 그린 이는 가토 쇼린(加藤松林, 1898~1983). 화면 오른쪽에 짙은 먹으로 그려낸 백악산 옆으로 아스라하게 뻗어가는 인왕산 줄기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림의 소장자이기도 한 황정수 미술사가는 "담채로 희미하게 그린 것이 마치 비라도 내린 후의 깨끗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몰골로 그린 선염법이 서양화가들의 맑은 수채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고 평했습니다. 특기할 만한 작품이라 이 자리에 소개합니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인왕산이 보이는 가장 오래된 조선 시대 그림은 뭘까?
광해군 12년인 1620년 봄, 인왕산의 이름난 계곡 청풍계(靑楓溪)에 있는 태고정(太古亭)이라는, 이름도 그럴싸한 정자에 문인 일곱 명이 모여 봄을 즐기고 저마다 시를 지어 책으로 묶습니다. 이런 모임을 계회(契會)라 하는데, 이 계회를 기념하는 그림 한 점이 책에 수록돼 있죠.
왼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그 옆에 초가집이 한 채 고고하게 서 있는 게 보입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집 태고정입니다.
잘 모르시겠다고요? 실은 그 동생이 더 유명합니다.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37). 병자호란 때 끝까지 화친을 반대하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고, 죽을지언정 한사코 무릎 꿇지 않는 기개로 청나라 사람들조차 고개를 끄덕여 돌려보내 주었다는 대쪽같은 인물.
다시, 그림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김상용의 집 태고정에서 모임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정작 집주인인 김상용은 다른 지방에서 벼슬을 살고 있어 이 자리엔 함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참석자는 모두 7명. 그중에 당시 병조판서 이상의(李尙毅, 1560~1624)라는 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모임을 연 기념으로 시와 그림을 두루마리에 묶어 참석자들이 한 부씩 나눠 가졌습니다. 이런 두루마리를 계축(契軸)이라고 하는데요. 다른 두루마리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위에 소개한 것만 후손에게 대대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자, 이제 병조판서 이상의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상의의 증손자는 저 유명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입니다. 이익은 '경서청풍계첩후(敬書淸楓溪帖後)'라는 글에서 두루마리의 그림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1736년에 원본을 똑같이 그리게 한 뒤 원래 두루마리였던 것을 첩(帖), 그러니까 책의 형태로 바꿨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정리하면 《청풍계첩》에 수록된 위 그림은 17세기에 그려진 원본을 18세기에 다시 그린 거란 뜻입니다.
그림을 보면 가운데 접힌 자국이 보이죠. 책의 형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1620년에 그려진 최초의 원본은 어디에 있을까? 미술사 연구자들이 쓴 책을 보면, 이 그림은 1620년에 그려졌고 여주이씨정산종택이 소장하고 있다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인용한 그림은 접힌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는 위의 것이더군요. 성호 이익이 남긴 기록에 따라 이 그림은 정확하게 116년 뒤에 다시 그린 것이고, 지금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 성호박물관에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그림의 가치가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인왕산 청풍계를 그린 유일한 작품일 뿐 아니라, 겸재 정선보다 시기적으로 무려 120년이나 앞서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이 그림이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인왕산 그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계곡 물줄기 왼쪽으로 첩첩이 타고 오르는 산세가 시원해 보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인왕산 그림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보다도 60년 이상 앞선 그림이 있었으니….
조선 명종 12년인 1557년에 그려진 <동궁책봉도감계회도(東宮冊封都監契會圖)라는 그림입니다.
명종이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 수고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준 것을 기념해 그리게 한 것이죠. 그렇게 보면 기록화가 분명한데, 그림만 따로 떼어 보면 아주 근사한 산수화로 손색이 없습니다. 화면 가운데가 구름에 가렸는지 안개에 가렸는지 어스름한 가운데 비어 있고, 그 위로 백악산, 삼각산이 우뚝 서 있습니다. 화면 아래로는 한강까지 보이는 꽤 규모 있게 한양의 북쪽 일대를 조망한 그림이죠.
여기서 왼쪽을 자세히 보면, 성긴 소나무 동산 위로 문루가 보입니다. 숭례문이죠. 숭례문을 따라 이어지는 담장이 바로 한양도성입니다. 성곽이 죽 이어지다가 가닿는 산이 바로 우리가 찾는 인왕산입니다. 인왕산을 꽤 공들여 그렸음을 한눈에 알 수 있죠. 화가는 이 드넓은 광경을 화폭에 옮기면서 화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서쪽 경계를 인왕산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인식이었죠. 미술사학자 최열은 지난해 출간한 《옛 그림으로 본 서울》(혜화1117, 2020)에서 이 그림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린 이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낡을 대로 낡아 세부가 지워져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재와 내용 및 구도와 기법 모두를 살펴볼 때 조선 오백 년을 통틀어 한양을 그린 명작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그림은 기본적으로 감상용 그림이 아니라 기록화인 까닭에 미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그림이 아닌데도 일반에는 그 존재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4년 전에 궁궐 역사학자 홍순민의 책 《홍순민의 한양읽기: 도성》(눌와, 2017)에서 이미 이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저자가 경복궁 창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숭례문의 존재를 알려주기 위한 참고자료로 제시한 것이어서 그림의 다른 부분은 미처 주목해보지 않았습니다.
'인왕산'을 중심에 놓고 그림을 다시 꼼꼼하게 보아야만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굳이 인왕산 그림을 애써 찾아본 까닭은 지금도 많은 화가가 인왕산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화가들도 꽤 많고요.
그래서 만날 때마다 화가들에게 물어봅니다. 왜 인왕산을 그리느냐고. 물론 답은 천차만별입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도 인왕산은 화가들이 그리고 싶게 만드는 '뭔가'를 품은 산이란 점입니다.
온몸이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위산이 훤한 이마를 드러내고, 기이한 모습을 한 갖가지 바위가 곳곳에 숨어 있는 자연 돌조각 공원.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한양 도성을 품 안에 가만히 끌어안은 산.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철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산. 경복궁 서쪽 마을 서촌에 깃든 화가와 문인, 건축가들에게 지금도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상상의 샘. 이름에 임금 왕(王) 자를 품은 몇 안 되는 산. 경복궁 근처에 가면 어디서도 얼굴을 볼 수 있는 바로 그 산.
해발고도 338m에 불과한 저 바위산에 깃든 내력과 산이 뿜어내는 기운은 그만큼 범상치 않습니다.
조선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산은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그림으로만 보면 단연 '금강산'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신령한 산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성지(聖地)처럼 여겨졌습니다. 금강산 유람은 풍류를 아는 이라면 평생에 한 번은 해봐야 할, 요즘 말로 하면 '버킷 리스트'의 맨 꼭대기를 차지했죠. 그래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같은 걸출한 화가들의 그림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럼 그다음은? 바로 인왕산입니다. 궁금했죠. 금강산이야 원체 예로부터 이름난 명산이니 그렇다 쳐도, 그다음이 어째서 인왕산인가. 거리가 가까워서? 거리로만 따지면 경복궁 뒤편에 늠름하게 서 있는 백악산이 있고, 아래로는 남산도 있고, 좀 멀게는 관악산, 낙산, 북한산, 도봉산도 있죠. 도성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이렇게도 좋은 산이 많은데 왜 유독 인왕산 그림만 많은 걸까.
전국 팔도강산에 하고많은 명산이 즐비한데 어째서 화가들은 줄기차게 인왕산을 그렸을까.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비단에 엷은 채색, 79.2×138.2cm, 국보 제216호, 삼성미술관 리움
그 해답이 돼줄 그림입니다. 너무나 잘 아시죠.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조선 회화 최대의 걸작입니다. 조선 시대에 수많은 산수화가 있었지만, 산을 주인공으로 세운 그림이 있었을까? 다시, 우리 산을 제대로 한 번 그려보겠다고 마음먹은 화가가 겸재 이전엔 단 한 명도 없었을까?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가 지금으로선 그 기준점이 된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죠. 이 그림 하나로 인왕산은 명실상부 조선의 수도 한양의 '랜드마크'로 우뚝 섭니다.
그러니 겸재 이후로 화가들이 인왕산을 그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실제로도 인왕산을 그린 조선 후기 그림은 무척 많습니다. 그만큼 인왕산은 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품고 있기도 하고요.
조선 말기 이후로 더는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았던 인왕산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고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화가들에 의해 '재발견'됩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화가가 그린 아주 희귀한 인왕산 그림이 있습니다.
일본 화가 가토 쇼린이 그린 <인왕산 소견> [사진 제공 : 황정수]
미술사가의 황정수의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이숲, 2018)에서 만난 이 희귀한 인왕산 그림을 그린 이는 가토 쇼린(加藤松林, 1898~1983). 화면 오른쪽에 짙은 먹으로 그려낸 백악산 옆으로 아스라하게 뻗어가는 인왕산 줄기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림의 소장자이기도 한 황정수 미술사가는 "담채로 희미하게 그린 것이 마치 비라도 내린 후의 깨끗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몰골로 그린 선염법이 서양화가들의 맑은 수채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고 평했습니다. 특기할 만한 작품이라 이 자리에 소개합니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인왕산이 보이는 가장 오래된 조선 시대 그림은 뭘까?
광해군 12년인 1620년 봄, 인왕산의 이름난 계곡 청풍계(靑楓溪)에 있는 태고정(太古亭)이라는, 이름도 그럴싸한 정자에 문인 일곱 명이 모여 봄을 즐기고 저마다 시를 지어 책으로 묶습니다. 이런 모임을 계회(契會)라 하는데, 이 계회를 기념하는 그림 한 점이 책에 수록돼 있죠.
성호기념관 소장 《청풍계첩》에 수록된 인왕산 청풍계 그림
왼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그 옆에 초가집이 한 채 고고하게 서 있는 게 보입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집 태고정입니다.
잘 모르시겠다고요? 실은 그 동생이 더 유명합니다.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37). 병자호란 때 끝까지 화친을 반대하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고, 죽을지언정 한사코 무릎 꿇지 않는 기개로 청나라 사람들조차 고개를 끄덕여 돌려보내 주었다는 대쪽같은 인물.
다시, 그림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김상용의 집 태고정에서 모임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정작 집주인인 김상용은 다른 지방에서 벼슬을 살고 있어 이 자리엔 함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참석자는 모두 7명. 그중에 당시 병조판서 이상의(李尙毅, 1560~1624)라는 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모임을 연 기념으로 시와 그림을 두루마리에 묶어 참석자들이 한 부씩 나눠 가졌습니다. 이런 두루마리를 계축(契軸)이라고 하는데요. 다른 두루마리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위에 소개한 것만 후손에게 대대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자, 이제 병조판서 이상의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상의의 증손자는 저 유명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입니다. 이익은 '경서청풍계첩후(敬書淸楓溪帖後)'라는 글에서 두루마리의 그림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1736년에 원본을 똑같이 그리게 한 뒤 원래 두루마리였던 것을 첩(帖), 그러니까 책의 형태로 바꿨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정리하면 《청풍계첩》에 수록된 위 그림은 17세기에 그려진 원본을 18세기에 다시 그린 거란 뜻입니다.
그림을 보면 가운데 접힌 자국이 보이죠. 책의 형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1620년에 그려진 최초의 원본은 어디에 있을까? 미술사 연구자들이 쓴 책을 보면, 이 그림은 1620년에 그려졌고 여주이씨정산종택이 소장하고 있다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인용한 그림은 접힌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는 위의 것이더군요. 성호 이익이 남긴 기록에 따라 이 그림은 정확하게 116년 뒤에 다시 그린 것이고, 지금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 성호박물관에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그림의 가치가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인왕산 청풍계를 그린 유일한 작품일 뿐 아니라, 겸재 정선보다 시기적으로 무려 120년이나 앞서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이 그림이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인왕산 그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계곡 물줄기 왼쪽으로 첩첩이 타고 오르는 산세가 시원해 보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인왕산 그림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보다도 60년 이상 앞선 그림이 있었으니….
<동궁책봉도감계회도>, 1557년, 비단에 먹, 90.6×85cm, 일본 개인 소장
조선 명종 12년인 1557년에 그려진 <동궁책봉도감계회도(東宮冊封都監契會圖)라는 그림입니다.
명종이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 수고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준 것을 기념해 그리게 한 것이죠. 그렇게 보면 기록화가 분명한데, 그림만 따로 떼어 보면 아주 근사한 산수화로 손색이 없습니다. 화면 가운데가 구름에 가렸는지 안개에 가렸는지 어스름한 가운데 비어 있고, 그 위로 백악산, 삼각산이 우뚝 서 있습니다. 화면 아래로는 한강까지 보이는 꽤 규모 있게 한양의 북쪽 일대를 조망한 그림이죠.
여기서 왼쪽을 자세히 보면, 성긴 소나무 동산 위로 문루가 보입니다. 숭례문이죠. 숭례문을 따라 이어지는 담장이 바로 한양도성입니다. 성곽이 죽 이어지다가 가닿는 산이 바로 우리가 찾는 인왕산입니다. 인왕산을 꽤 공들여 그렸음을 한눈에 알 수 있죠. 화가는 이 드넓은 광경을 화폭에 옮기면서 화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서쪽 경계를 인왕산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인식이었죠. 미술사학자 최열은 지난해 출간한 《옛 그림으로 본 서울》(혜화1117, 2020)에서 이 그림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린 이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낡을 대로 낡아 세부가 지워져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재와 내용 및 구도와 기법 모두를 살펴볼 때 조선 오백 년을 통틀어 한양을 그린 명작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그림은 기본적으로 감상용 그림이 아니라 기록화인 까닭에 미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그림이 아닌데도 일반에는 그 존재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4년 전에 궁궐 역사학자 홍순민의 책 《홍순민의 한양읽기: 도성》(눌와, 2017)에서 이미 이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저자가 경복궁 창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숭례문의 존재를 알려주기 위한 참고자료로 제시한 것이어서 그림의 다른 부분은 미처 주목해보지 않았습니다.
조풍류, <인왕산>, 2017, 캔버스에 먹 호분 분채 석채, 140×220cm
'인왕산'을 중심에 놓고 그림을 다시 꼼꼼하게 보아야만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굳이 인왕산 그림을 애써 찾아본 까닭은 지금도 많은 화가가 인왕산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화가들도 꽤 많고요.
그래서 만날 때마다 화가들에게 물어봅니다. 왜 인왕산을 그리느냐고. 물론 답은 천차만별입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도 인왕산은 화가들이 그리고 싶게 만드는 '뭔가'를 품은 산이란 점입니다.
온몸이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위산이 훤한 이마를 드러내고, 기이한 모습을 한 갖가지 바위가 곳곳에 숨어 있는 자연 돌조각 공원.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한양 도성을 품 안에 가만히 끌어안은 산.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철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산. 경복궁 서쪽 마을 서촌에 깃든 화가와 문인, 건축가들에게 지금도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상상의 샘. 이름에 임금 왕(王) 자를 품은 몇 안 되는 산. 경복궁 근처에 가면 어디서도 얼굴을 볼 수 있는 바로 그 산.
해발고도 338m에 불과한 저 바위산에 깃든 내력과 산이 뿜어내는 기운은 그만큼 범상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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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산이 보이는 가장 오래된 조선 시대 그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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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02-16 09:00:49
- 수정2021-02-16 09:17:37
왜 인왕산인가? 먼저 이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조선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산은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그림으로만 보면 단연 '금강산'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신령한 산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성지(聖地)처럼 여겨졌습니다. 금강산 유람은 풍류를 아는 이라면 평생에 한 번은 해봐야 할, 요즘 말로 하면 '버킷 리스트'의 맨 꼭대기를 차지했죠. 그래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같은 걸출한 화가들의 그림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럼 그다음은? 바로 인왕산입니다. 궁금했죠. 금강산이야 원체 예로부터 이름난 명산이니 그렇다 쳐도, 그다음이 어째서 인왕산인가. 거리가 가까워서? 거리로만 따지면 경복궁 뒤편에 늠름하게 서 있는 백악산이 있고, 아래로는 남산도 있고, 좀 멀게는 관악산, 낙산, 북한산, 도봉산도 있죠. 도성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이렇게도 좋은 산이 많은데 왜 유독 인왕산 그림만 많은 걸까.
전국 팔도강산에 하고많은 명산이 즐비한데 어째서 화가들은 줄기차게 인왕산을 그렸을까.
그 해답이 돼줄 그림입니다. 너무나 잘 아시죠.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조선 회화 최대의 걸작입니다. 조선 시대에 수많은 산수화가 있었지만, 산을 주인공으로 세운 그림이 있었을까? 다시, 우리 산을 제대로 한 번 그려보겠다고 마음먹은 화가가 겸재 이전엔 단 한 명도 없었을까?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가 지금으로선 그 기준점이 된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죠. 이 그림 하나로 인왕산은 명실상부 조선의 수도 한양의 '랜드마크'로 우뚝 섭니다.
그러니 겸재 이후로 화가들이 인왕산을 그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실제로도 인왕산을 그린 조선 후기 그림은 무척 많습니다. 그만큼 인왕산은 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품고 있기도 하고요.
조선 말기 이후로 더는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았던 인왕산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고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화가들에 의해 '재발견'됩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화가가 그린 아주 희귀한 인왕산 그림이 있습니다.
미술사가의 황정수의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이숲, 2018)에서 만난 이 희귀한 인왕산 그림을 그린 이는 가토 쇼린(加藤松林, 1898~1983). 화면 오른쪽에 짙은 먹으로 그려낸 백악산 옆으로 아스라하게 뻗어가는 인왕산 줄기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림의 소장자이기도 한 황정수 미술사가는 "담채로 희미하게 그린 것이 마치 비라도 내린 후의 깨끗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몰골로 그린 선염법이 서양화가들의 맑은 수채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고 평했습니다. 특기할 만한 작품이라 이 자리에 소개합니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인왕산이 보이는 가장 오래된 조선 시대 그림은 뭘까?
광해군 12년인 1620년 봄, 인왕산의 이름난 계곡 청풍계(靑楓溪)에 있는 태고정(太古亭)이라는, 이름도 그럴싸한 정자에 문인 일곱 명이 모여 봄을 즐기고 저마다 시를 지어 책으로 묶습니다. 이런 모임을 계회(契會)라 하는데, 이 계회를 기념하는 그림 한 점이 책에 수록돼 있죠.
왼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그 옆에 초가집이 한 채 고고하게 서 있는 게 보입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집 태고정입니다.
잘 모르시겠다고요? 실은 그 동생이 더 유명합니다.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37). 병자호란 때 끝까지 화친을 반대하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고, 죽을지언정 한사코 무릎 꿇지 않는 기개로 청나라 사람들조차 고개를 끄덕여 돌려보내 주었다는 대쪽같은 인물.
다시, 그림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김상용의 집 태고정에서 모임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정작 집주인인 김상용은 다른 지방에서 벼슬을 살고 있어 이 자리엔 함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참석자는 모두 7명. 그중에 당시 병조판서 이상의(李尙毅, 1560~1624)라는 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모임을 연 기념으로 시와 그림을 두루마리에 묶어 참석자들이 한 부씩 나눠 가졌습니다. 이런 두루마리를 계축(契軸)이라고 하는데요. 다른 두루마리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위에 소개한 것만 후손에게 대대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자, 이제 병조판서 이상의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상의의 증손자는 저 유명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입니다. 이익은 '경서청풍계첩후(敬書淸楓溪帖後)'라는 글에서 두루마리의 그림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1736년에 원본을 똑같이 그리게 한 뒤 원래 두루마리였던 것을 첩(帖), 그러니까 책의 형태로 바꿨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정리하면 《청풍계첩》에 수록된 위 그림은 17세기에 그려진 원본을 18세기에 다시 그린 거란 뜻입니다.
그림을 보면 가운데 접힌 자국이 보이죠. 책의 형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1620년에 그려진 최초의 원본은 어디에 있을까? 미술사 연구자들이 쓴 책을 보면, 이 그림은 1620년에 그려졌고 여주이씨정산종택이 소장하고 있다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인용한 그림은 접힌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는 위의 것이더군요. 성호 이익이 남긴 기록에 따라 이 그림은 정확하게 116년 뒤에 다시 그린 것이고, 지금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 성호박물관에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그림의 가치가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인왕산 청풍계를 그린 유일한 작품일 뿐 아니라, 겸재 정선보다 시기적으로 무려 120년이나 앞서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이 그림이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인왕산 그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계곡 물줄기 왼쪽으로 첩첩이 타고 오르는 산세가 시원해 보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인왕산 그림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보다도 60년 이상 앞선 그림이 있었으니….
조선 명종 12년인 1557년에 그려진 <동궁책봉도감계회도(東宮冊封都監契會圖)라는 그림입니다.
명종이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 수고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준 것을 기념해 그리게 한 것이죠. 그렇게 보면 기록화가 분명한데, 그림만 따로 떼어 보면 아주 근사한 산수화로 손색이 없습니다. 화면 가운데가 구름에 가렸는지 안개에 가렸는지 어스름한 가운데 비어 있고, 그 위로 백악산, 삼각산이 우뚝 서 있습니다. 화면 아래로는 한강까지 보이는 꽤 규모 있게 한양의 북쪽 일대를 조망한 그림이죠.
여기서 왼쪽을 자세히 보면, 성긴 소나무 동산 위로 문루가 보입니다. 숭례문이죠. 숭례문을 따라 이어지는 담장이 바로 한양도성입니다. 성곽이 죽 이어지다가 가닿는 산이 바로 우리가 찾는 인왕산입니다. 인왕산을 꽤 공들여 그렸음을 한눈에 알 수 있죠. 화가는 이 드넓은 광경을 화폭에 옮기면서 화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서쪽 경계를 인왕산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인식이었죠. 미술사학자 최열은 지난해 출간한 《옛 그림으로 본 서울》(혜화1117, 2020)에서 이 그림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린 이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낡을 대로 낡아 세부가 지워져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재와 내용 및 구도와 기법 모두를 살펴볼 때 조선 오백 년을 통틀어 한양을 그린 명작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그림은 기본적으로 감상용 그림이 아니라 기록화인 까닭에 미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그림이 아닌데도 일반에는 그 존재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4년 전에 궁궐 역사학자 홍순민의 책 《홍순민의 한양읽기: 도성》(눌와, 2017)에서 이미 이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저자가 경복궁 창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숭례문의 존재를 알려주기 위한 참고자료로 제시한 것이어서 그림의 다른 부분은 미처 주목해보지 않았습니다.
'인왕산'을 중심에 놓고 그림을 다시 꼼꼼하게 보아야만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굳이 인왕산 그림을 애써 찾아본 까닭은 지금도 많은 화가가 인왕산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화가들도 꽤 많고요.
그래서 만날 때마다 화가들에게 물어봅니다. 왜 인왕산을 그리느냐고. 물론 답은 천차만별입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도 인왕산은 화가들이 그리고 싶게 만드는 '뭔가'를 품은 산이란 점입니다.
온몸이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위산이 훤한 이마를 드러내고, 기이한 모습을 한 갖가지 바위가 곳곳에 숨어 있는 자연 돌조각 공원.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한양 도성을 품 안에 가만히 끌어안은 산.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철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산. 경복궁 서쪽 마을 서촌에 깃든 화가와 문인, 건축가들에게 지금도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상상의 샘. 이름에 임금 왕(王) 자를 품은 몇 안 되는 산. 경복궁 근처에 가면 어디서도 얼굴을 볼 수 있는 바로 그 산.
해발고도 338m에 불과한 저 바위산에 깃든 내력과 산이 뿜어내는 기운은 그만큼 범상치 않습니다.
조선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산은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그림으로만 보면 단연 '금강산'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신령한 산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성지(聖地)처럼 여겨졌습니다. 금강산 유람은 풍류를 아는 이라면 평생에 한 번은 해봐야 할, 요즘 말로 하면 '버킷 리스트'의 맨 꼭대기를 차지했죠. 그래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같은 걸출한 화가들의 그림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럼 그다음은? 바로 인왕산입니다. 궁금했죠. 금강산이야 원체 예로부터 이름난 명산이니 그렇다 쳐도, 그다음이 어째서 인왕산인가. 거리가 가까워서? 거리로만 따지면 경복궁 뒤편에 늠름하게 서 있는 백악산이 있고, 아래로는 남산도 있고, 좀 멀게는 관악산, 낙산, 북한산, 도봉산도 있죠. 도성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이렇게도 좋은 산이 많은데 왜 유독 인왕산 그림만 많은 걸까.
전국 팔도강산에 하고많은 명산이 즐비한데 어째서 화가들은 줄기차게 인왕산을 그렸을까.
그 해답이 돼줄 그림입니다. 너무나 잘 아시죠.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조선 회화 최대의 걸작입니다. 조선 시대에 수많은 산수화가 있었지만, 산을 주인공으로 세운 그림이 있었을까? 다시, 우리 산을 제대로 한 번 그려보겠다고 마음먹은 화가가 겸재 이전엔 단 한 명도 없었을까?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가 지금으로선 그 기준점이 된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죠. 이 그림 하나로 인왕산은 명실상부 조선의 수도 한양의 '랜드마크'로 우뚝 섭니다.
그러니 겸재 이후로 화가들이 인왕산을 그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실제로도 인왕산을 그린 조선 후기 그림은 무척 많습니다. 그만큼 인왕산은 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품고 있기도 하고요.
조선 말기 이후로 더는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았던 인왕산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고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화가들에 의해 '재발견'됩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화가가 그린 아주 희귀한 인왕산 그림이 있습니다.
미술사가의 황정수의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이숲, 2018)에서 만난 이 희귀한 인왕산 그림을 그린 이는 가토 쇼린(加藤松林, 1898~1983). 화면 오른쪽에 짙은 먹으로 그려낸 백악산 옆으로 아스라하게 뻗어가는 인왕산 줄기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림의 소장자이기도 한 황정수 미술사가는 "담채로 희미하게 그린 것이 마치 비라도 내린 후의 깨끗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몰골로 그린 선염법이 서양화가들의 맑은 수채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고 평했습니다. 특기할 만한 작품이라 이 자리에 소개합니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인왕산이 보이는 가장 오래된 조선 시대 그림은 뭘까?
광해군 12년인 1620년 봄, 인왕산의 이름난 계곡 청풍계(靑楓溪)에 있는 태고정(太古亭)이라는, 이름도 그럴싸한 정자에 문인 일곱 명이 모여 봄을 즐기고 저마다 시를 지어 책으로 묶습니다. 이런 모임을 계회(契會)라 하는데, 이 계회를 기념하는 그림 한 점이 책에 수록돼 있죠.
왼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그 옆에 초가집이 한 채 고고하게 서 있는 게 보입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집 태고정입니다.
잘 모르시겠다고요? 실은 그 동생이 더 유명합니다.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37). 병자호란 때 끝까지 화친을 반대하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고, 죽을지언정 한사코 무릎 꿇지 않는 기개로 청나라 사람들조차 고개를 끄덕여 돌려보내 주었다는 대쪽같은 인물.
다시, 그림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김상용의 집 태고정에서 모임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정작 집주인인 김상용은 다른 지방에서 벼슬을 살고 있어 이 자리엔 함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참석자는 모두 7명. 그중에 당시 병조판서 이상의(李尙毅, 1560~1624)라는 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모임을 연 기념으로 시와 그림을 두루마리에 묶어 참석자들이 한 부씩 나눠 가졌습니다. 이런 두루마리를 계축(契軸)이라고 하는데요. 다른 두루마리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위에 소개한 것만 후손에게 대대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자, 이제 병조판서 이상의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상의의 증손자는 저 유명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입니다. 이익은 '경서청풍계첩후(敬書淸楓溪帖後)'라는 글에서 두루마리의 그림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1736년에 원본을 똑같이 그리게 한 뒤 원래 두루마리였던 것을 첩(帖), 그러니까 책의 형태로 바꿨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정리하면 《청풍계첩》에 수록된 위 그림은 17세기에 그려진 원본을 18세기에 다시 그린 거란 뜻입니다.
그림을 보면 가운데 접힌 자국이 보이죠. 책의 형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1620년에 그려진 최초의 원본은 어디에 있을까? 미술사 연구자들이 쓴 책을 보면, 이 그림은 1620년에 그려졌고 여주이씨정산종택이 소장하고 있다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인용한 그림은 접힌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는 위의 것이더군요. 성호 이익이 남긴 기록에 따라 이 그림은 정확하게 116년 뒤에 다시 그린 것이고, 지금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 성호박물관에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그림의 가치가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인왕산 청풍계를 그린 유일한 작품일 뿐 아니라, 겸재 정선보다 시기적으로 무려 120년이나 앞서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이 그림이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인왕산 그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계곡 물줄기 왼쪽으로 첩첩이 타고 오르는 산세가 시원해 보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인왕산 그림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보다도 60년 이상 앞선 그림이 있었으니….
조선 명종 12년인 1557년에 그려진 <동궁책봉도감계회도(東宮冊封都監契會圖)라는 그림입니다.
명종이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 수고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준 것을 기념해 그리게 한 것이죠. 그렇게 보면 기록화가 분명한데, 그림만 따로 떼어 보면 아주 근사한 산수화로 손색이 없습니다. 화면 가운데가 구름에 가렸는지 안개에 가렸는지 어스름한 가운데 비어 있고, 그 위로 백악산, 삼각산이 우뚝 서 있습니다. 화면 아래로는 한강까지 보이는 꽤 규모 있게 한양의 북쪽 일대를 조망한 그림이죠.
여기서 왼쪽을 자세히 보면, 성긴 소나무 동산 위로 문루가 보입니다. 숭례문이죠. 숭례문을 따라 이어지는 담장이 바로 한양도성입니다. 성곽이 죽 이어지다가 가닿는 산이 바로 우리가 찾는 인왕산입니다. 인왕산을 꽤 공들여 그렸음을 한눈에 알 수 있죠. 화가는 이 드넓은 광경을 화폭에 옮기면서 화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서쪽 경계를 인왕산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인식이었죠. 미술사학자 최열은 지난해 출간한 《옛 그림으로 본 서울》(혜화1117, 2020)에서 이 그림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린 이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낡을 대로 낡아 세부가 지워져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재와 내용 및 구도와 기법 모두를 살펴볼 때 조선 오백 년을 통틀어 한양을 그린 명작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그림은 기본적으로 감상용 그림이 아니라 기록화인 까닭에 미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그림이 아닌데도 일반에는 그 존재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4년 전에 궁궐 역사학자 홍순민의 책 《홍순민의 한양읽기: 도성》(눌와, 2017)에서 이미 이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저자가 경복궁 창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숭례문의 존재를 알려주기 위한 참고자료로 제시한 것이어서 그림의 다른 부분은 미처 주목해보지 않았습니다.
'인왕산'을 중심에 놓고 그림을 다시 꼼꼼하게 보아야만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굳이 인왕산 그림을 애써 찾아본 까닭은 지금도 많은 화가가 인왕산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화가들도 꽤 많고요.
그래서 만날 때마다 화가들에게 물어봅니다. 왜 인왕산을 그리느냐고. 물론 답은 천차만별입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도 인왕산은 화가들이 그리고 싶게 만드는 '뭔가'를 품은 산이란 점입니다.
온몸이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위산이 훤한 이마를 드러내고, 기이한 모습을 한 갖가지 바위가 곳곳에 숨어 있는 자연 돌조각 공원.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한양 도성을 품 안에 가만히 끌어안은 산.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철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산. 경복궁 서쪽 마을 서촌에 깃든 화가와 문인, 건축가들에게 지금도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상상의 샘. 이름에 임금 왕(王) 자를 품은 몇 안 되는 산. 경복궁 근처에 가면 어디서도 얼굴을 볼 수 있는 바로 그 산.
해발고도 338m에 불과한 저 바위산에 깃든 내력과 산이 뿜어내는 기운은 그만큼 범상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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