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70년기획]⑰ “부모님 이름 잊지 않으려 여든 넘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입력 2021.02.17 (08:00) 수정 2021.02.1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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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여 년이 지났습니다.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날 줄 알았지만,
여전히 재회하지 못한 이산가족이 5만 명이 넘습니다.
만날 수 있다는 기대도, 시간도 하루하루 희미해져 가는데요.
설을 맞아 그분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10남매의 맏이였던 할머니…다섯 살 남동생만 등에 업고 남으로 남으로...

고향 산에 올라가면 영변 약산 진달래가 보였습니다. 평안남도 개천군 북면 용연리. 평생 그곳에서 살 줄 알았습니다. 6남매에, 작은아버지의 자녀들 4명까지 10명의 아이들이 북적이던 고향 집. 그중 맏딸이 김보부 할머니입니다. 10남매의 큰 언니 노릇 하랴 밖으로만 돌던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일 돌보랴 공부는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마는 집안 살림을 꾸리고 그녀는 베를 짜서 팔며 집안을 이끌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이 집을 돌보지 않으면 동생들은 학교에 못 간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생들이 공부 잘하는 모습만으로 그저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피란길에 오른 건 1.4 후퇴 때였습니다. 피란길에도 비행기 폭격이 잦았고, 바로 옆으로 떨어지는 폭탄을 피해 가족들은 이리저리 흩어졌습니다. 폭격기가 사라지고 형제자매, 부모님과 헤어졌던 자리로 돌아가 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김보부 할머니는 다섯 살짜리 남동생 하나만 등에 업고 남으로 향했습니다.


■ 내가 아닌 동생의 엄마로…뒤늦게 배운 글자로 써 내려간 어머니 전 상서

남쪽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데, 동생까지 딸려서 몇 배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어린 동생은 엄마를 찾고, 힘든 일을 마치고 와도 동생을 달래는데 남은 기운을 써야 했습니다. '김보부'가 아닌 동생의 엄마로 살았던 시간. 서로 의지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인생의 짐이었던 시간들.

어느덧 70년이 흘러 늦었지만 공부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부모님 함자를 잊지 말아야 저세상에 가서라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젠 부모님께 한 자 한 자 편지를 써 내려갑니다. 고향의 어머니가 속마음을 모두 들어주시리라 생각하며. 19세 딸로 돌아가 응어리진 지난 세월을 쏟아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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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산70년기획]⑰ “부모님 이름 잊지 않으려 여든 넘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 입력 2021-02-17 08:00:35
    • 수정2021-02-17 21:10:00
    취재K


편집자 주 :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여 년이 지났습니다.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날 줄 알았지만,
여전히 재회하지 못한 이산가족이 5만 명이 넘습니다.
만날 수 있다는 기대도, 시간도 하루하루 희미해져 가는데요.
설을 맞아 그분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10남매의 맏이였던 할머니…다섯 살 남동생만 등에 업고 남으로 남으로...

고향 산에 올라가면 영변 약산 진달래가 보였습니다. 평안남도 개천군 북면 용연리. 평생 그곳에서 살 줄 알았습니다. 6남매에, 작은아버지의 자녀들 4명까지 10명의 아이들이 북적이던 고향 집. 그중 맏딸이 김보부 할머니입니다. 10남매의 큰 언니 노릇 하랴 밖으로만 돌던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일 돌보랴 공부는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마는 집안 살림을 꾸리고 그녀는 베를 짜서 팔며 집안을 이끌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이 집을 돌보지 않으면 동생들은 학교에 못 간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생들이 공부 잘하는 모습만으로 그저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피란길에 오른 건 1.4 후퇴 때였습니다. 피란길에도 비행기 폭격이 잦았고, 바로 옆으로 떨어지는 폭탄을 피해 가족들은 이리저리 흩어졌습니다. 폭격기가 사라지고 형제자매, 부모님과 헤어졌던 자리로 돌아가 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김보부 할머니는 다섯 살짜리 남동생 하나만 등에 업고 남으로 향했습니다.


■ 내가 아닌 동생의 엄마로…뒤늦게 배운 글자로 써 내려간 어머니 전 상서

남쪽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데, 동생까지 딸려서 몇 배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어린 동생은 엄마를 찾고, 힘든 일을 마치고 와도 동생을 달래는데 남은 기운을 써야 했습니다. '김보부'가 아닌 동생의 엄마로 살았던 시간. 서로 의지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인생의 짐이었던 시간들.

어느덧 70년이 흘러 늦었지만 공부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부모님 함자를 잊지 말아야 저세상에 가서라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젠 부모님께 한 자 한 자 편지를 써 내려갑니다. 고향의 어머니가 속마음을 모두 들어주시리라 생각하며. 19세 딸로 돌아가 응어리진 지난 세월을 쏟아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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