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저는 19살이었습니다” 나치 부역 95살 노인 추방한 미국과 ‘램지어’ 만든 일본

입력 2021.02.21 (15:00) 수정 2021.02.2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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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워싱턴포스트 2.20. 가장 많이 읽은 기사 미 워싱턴포스트 2.20. 가장 많이 읽은 기사

오늘(21일)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 뉴스 중 하나는 바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 수용소에서 일했던 남성을 추방했다는 뉴스였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네이버나 다음에서 뉴스를 보는 게 아니라, 개별 언론사로 연결되어 기사를 읽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전체 댓글을 집계할 수는 없지만, 워싱턴포스트만 꼽아서 보면 단일 기사에 댓글이 천 700개 이상이 달려 갑론을박이 진행 중이기도 한 기사입니다. 도대체 무슨 기사였을까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테네시 주에서 새 삶을 살고 있던 95세의 전 독일 강제수용소 경비원이 침몰한 배에서 발견된 색인 카드 때문에 나치 행각이 들통났다. 색인 카드에는 그가 나치 부역을 했던 사실을 증명했고, 지난 토요일 본국(독일)으로 추방됐다.

프리드리히 카를 베르거는 함부르크 근교에 있는 노이엔가메 수용소에서 일했다는 것이 입증된 뒤 미국 법무부에 의해 추방이 결정됐다. 이 수용소에는 러시아, 네덜란드, 폴란드 민간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기타 국가에서 온 유대인 포로 및 적군의 병사들이 수용되었다. 1945년 겨울, 법원이 내린 베르거 추방 명령문에 따르면, 죄수들은 “악랄한” 환경에서 살며 “지치고 죽을 정도로” 일해야 했다.

1945년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수용소로 진격했을 때, 베르거는 수감자들이 수용소를 강제로 비우도록 했고, 2주 간 70명의 죄수들이 죽었다. 이 수감자들은 발트해에 있는 2척의 배에 실려 보내졌는데,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 1945년 5월 전쟁 마지막 주에 영국 전투기가 실수로 이 배들을 폭격했기 때문이다.

법무부 역사학자들은 폭격 후 몇 년 후 침몰한 배들 중 한 척에서 발견된 색인 카드에서 베르거가 수용소에서 복무했던 상황을 찾았다. 몬티 윌킨슨 법무장관 대행은 베르거의 추방이 “미국이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와 다른 인권 유린 행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안전한 안식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헌신”이라고 표현했다.

1979년 이후 법무부는 70명을 상대로 유사한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치 시대의 소송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다른 소송은 미결이다. 베르거가 마지막으로 쫓겨난 나치 경비병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전쟁이 끝난 후, 베르거는 독일에서 그의 아내와 딸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1959년 미국으로 왔다.

현재 두 손자를 둔 베르거는 자신은 수용소에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곳에 잠시 있었을 뿐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며 “75년이 지난 지금, 이건 말도 안 돼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재판이 끝난 후, 베르거는 “저는 19살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저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지난해 이민법 재판에서 베르거는 자신이 수용소에서 일했고, 당시 전역을 요청하지 않았으며, 전시 근무에 따른 연금을 독일로부터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 출처:워싱턴포스트

이 기사에 달린 미국인들의 댓글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믿을 수 있을까, 불쌍하다, 청년 시절에는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정서는 “희생자들에게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에 대해 불쌍하다고 말하다니”, “역사는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75년 전 나치 수용소에서 일했다는 것만으로 미국에서 쫓겨나다니... 이게 가능할까요?
미국은 1978년 홀츠만 수정헌법(Holtzman Amendment)으로 알려진 법에 따라 나치가 후원하는 박해에 참여한 사람은 미국에 들어가거나 사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나치 박해를 돕는 사람들을 금지하는 연방법이 존재했고요.

그럼 베르거는 어떻게 미국에 이민 와 살 수 있었을까요?
2개의 법 사이에 빈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치 부역자들의 입국을 금지한 연방법은 1957년, 그러니까 전쟁이 끝나고 12년 뒤 만료됩니다. 수정헌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20년 가량의 공백이 생겼던 거죠. 베르거가 그 때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합법적으로요. 하지만 바뀐 헌법에 따라 이제 강제 추방된 겁니다.

나치 부역 추방하는 미국과 램지어의 일본

미국이 베르거를 강제추방한 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부정하며 램지어와 같은 학자들을 키워내 역사를 세탁하고 있는 일본의 행태와 참으로 비교됩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하버드’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만큼 역사적 증거를 철저히 외면할 뿐 아니라 증거 인멸에 적극적으로 부역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잊을 만 하면 망언은 되살아납니다. 앞으로 더 많은 망언들이 나올 겁니다.” 테사 모리스-스즈키 /국립호주대학교 교수

“이건 학문적 자유가 아닙니다. 학문적 자유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거짓을 마치 의견인 것 처럼 주장한다면 그건 연구의 진실성에 위배됩니다.
세상 모든 학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의견이라고 해도 된다는 겁니까?” 알렉시스 더든/코네티컷 대학 교수

일본이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기여했다거나, 전범 기업이 미쓰비시가 논문을 발주했다거나 하는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램지어 교수 자체가 미쓰비시가 하버드에 낸 기금으로 교수가 된 인물
이고, 일본이 공공외교와 민간기업 자본을 통해서 오랜 기간 동안 미국 학계에 공들여왔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램지어 교수와 같은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키워져왔고, 앞으로도 키워져갈 겁니다.

문제는 독일 정부가, 혹은 미국 정부가 위안부라는 범죄에 대해 ‘반인륜 범죄’로 규정한 만큼 일본 정부가 혹은 우리 정부가 잔혹한 인권 유린에 부역한 이들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추방하고 응징해왔다면 이런 역사 왜곡이 지금껏 버젓이 가능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여전히 생존자들이 남아있는 문젭니다.
생존자들은 점점 고령이 되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건 역사를 세탁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기억을 지우려는 전쟁이에요. 기억은 쉽게 사라지고 바뀌고 잊혀집니다. 일본의 이런 전략적인 거짓말들이 계속된다면, 램지어 교수 같은 사람이 계속 나온다면 우리는 기억 전쟁에서 지고 말 겁니다.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 일본 제국주의 침탈 지역에서 존재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나서서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세대와 세대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래야 저들이 책임지게 할 수 있습니다.”


알렉시스 더든 교수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말을 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또렷한 한국말로 “김학순 할머니를 시작으로 할머니들”을 잊으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아, 참고로 독일은 베르거가 입국한 뒤에 독일 경찰이 다시 그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95세 노인이라는 점은 관계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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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저는 19살이었습니다” 나치 부역 95살 노인 추방한 미국과 ‘램지어’ 만든 일본
    • 입력 2021-02-21 15:00:10
    • 수정2021-02-21 16:53:35
    특파원 리포트
 미 워싱턴포스트 2.20. 가장 많이 읽은 기사
오늘(21일)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 뉴스 중 하나는 바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 수용소에서 일했던 남성을 추방했다는 뉴스였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네이버나 다음에서 뉴스를 보는 게 아니라, 개별 언론사로 연결되어 기사를 읽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전체 댓글을 집계할 수는 없지만, 워싱턴포스트만 꼽아서 보면 단일 기사에 댓글이 천 700개 이상이 달려 갑론을박이 진행 중이기도 한 기사입니다. 도대체 무슨 기사였을까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테네시 주에서 새 삶을 살고 있던 95세의 전 독일 강제수용소 경비원이 침몰한 배에서 발견된 색인 카드 때문에 나치 행각이 들통났다. 색인 카드에는 그가 나치 부역을 했던 사실을 증명했고, 지난 토요일 본국(독일)으로 추방됐다.

프리드리히 카를 베르거는 함부르크 근교에 있는 노이엔가메 수용소에서 일했다는 것이 입증된 뒤 미국 법무부에 의해 추방이 결정됐다. 이 수용소에는 러시아, 네덜란드, 폴란드 민간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기타 국가에서 온 유대인 포로 및 적군의 병사들이 수용되었다. 1945년 겨울, 법원이 내린 베르거 추방 명령문에 따르면, 죄수들은 “악랄한” 환경에서 살며 “지치고 죽을 정도로” 일해야 했다.

1945년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수용소로 진격했을 때, 베르거는 수감자들이 수용소를 강제로 비우도록 했고, 2주 간 70명의 죄수들이 죽었다. 이 수감자들은 발트해에 있는 2척의 배에 실려 보내졌는데,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 1945년 5월 전쟁 마지막 주에 영국 전투기가 실수로 이 배들을 폭격했기 때문이다.

법무부 역사학자들은 폭격 후 몇 년 후 침몰한 배들 중 한 척에서 발견된 색인 카드에서 베르거가 수용소에서 복무했던 상황을 찾았다. 몬티 윌킨슨 법무장관 대행은 베르거의 추방이 “미국이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와 다른 인권 유린 행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안전한 안식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헌신”이라고 표현했다.

1979년 이후 법무부는 70명을 상대로 유사한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치 시대의 소송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다른 소송은 미결이다. 베르거가 마지막으로 쫓겨난 나치 경비병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전쟁이 끝난 후, 베르거는 독일에서 그의 아내와 딸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1959년 미국으로 왔다.

현재 두 손자를 둔 베르거는 자신은 수용소에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곳에 잠시 있었을 뿐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며 “75년이 지난 지금, 이건 말도 안 돼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재판이 끝난 후, 베르거는 “저는 19살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저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지난해 이민법 재판에서 베르거는 자신이 수용소에서 일했고, 당시 전역을 요청하지 않았으며, 전시 근무에 따른 연금을 독일로부터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 출처:워싱턴포스트

이 기사에 달린 미국인들의 댓글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믿을 수 있을까, 불쌍하다, 청년 시절에는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정서는 “희생자들에게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에 대해 불쌍하다고 말하다니”, “역사는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75년 전 나치 수용소에서 일했다는 것만으로 미국에서 쫓겨나다니... 이게 가능할까요?
미국은 1978년 홀츠만 수정헌법(Holtzman Amendment)으로 알려진 법에 따라 나치가 후원하는 박해에 참여한 사람은 미국에 들어가거나 사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나치 박해를 돕는 사람들을 금지하는 연방법이 존재했고요.

그럼 베르거는 어떻게 미국에 이민 와 살 수 있었을까요?
2개의 법 사이에 빈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치 부역자들의 입국을 금지한 연방법은 1957년, 그러니까 전쟁이 끝나고 12년 뒤 만료됩니다. 수정헌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20년 가량의 공백이 생겼던 거죠. 베르거가 그 때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합법적으로요. 하지만 바뀐 헌법에 따라 이제 강제 추방된 겁니다.

나치 부역 추방하는 미국과 램지어의 일본

미국이 베르거를 강제추방한 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부정하며 램지어와 같은 학자들을 키워내 역사를 세탁하고 있는 일본의 행태와 참으로 비교됩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하버드’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만큼 역사적 증거를 철저히 외면할 뿐 아니라 증거 인멸에 적극적으로 부역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잊을 만 하면 망언은 되살아납니다. 앞으로 더 많은 망언들이 나올 겁니다.” 테사 모리스-스즈키 /국립호주대학교 교수

“이건 학문적 자유가 아닙니다. 학문적 자유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거짓을 마치 의견인 것 처럼 주장한다면 그건 연구의 진실성에 위배됩니다.
세상 모든 학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의견이라고 해도 된다는 겁니까?” 알렉시스 더든/코네티컷 대학 교수

일본이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기여했다거나, 전범 기업이 미쓰비시가 논문을 발주했다거나 하는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램지어 교수 자체가 미쓰비시가 하버드에 낸 기금으로 교수가 된 인물
이고, 일본이 공공외교와 민간기업 자본을 통해서 오랜 기간 동안 미국 학계에 공들여왔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램지어 교수와 같은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키워져왔고, 앞으로도 키워져갈 겁니다.

문제는 독일 정부가, 혹은 미국 정부가 위안부라는 범죄에 대해 ‘반인륜 범죄’로 규정한 만큼 일본 정부가 혹은 우리 정부가 잔혹한 인권 유린에 부역한 이들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추방하고 응징해왔다면 이런 역사 왜곡이 지금껏 버젓이 가능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여전히 생존자들이 남아있는 문젭니다.
생존자들은 점점 고령이 되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건 역사를 세탁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기억을 지우려는 전쟁이에요. 기억은 쉽게 사라지고 바뀌고 잊혀집니다. 일본의 이런 전략적인 거짓말들이 계속된다면, 램지어 교수 같은 사람이 계속 나온다면 우리는 기억 전쟁에서 지고 말 겁니다.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 일본 제국주의 침탈 지역에서 존재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나서서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세대와 세대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래야 저들이 책임지게 할 수 있습니다.”


알렉시스 더든 교수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말을 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또렷한 한국말로 “김학순 할머니를 시작으로 할머니들”을 잊으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아, 참고로 독일은 베르거가 입국한 뒤에 독일 경찰이 다시 그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95세 노인이라는 점은 관계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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