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만세” 항일 희생 102년 만에…

입력 2021.03.01 (07:01) 수정 2021.03.0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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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독립만세" 외치다가… 아들 이어 어머니까지 희생

102년 전,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대한 독립을 외치는 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열망은 한 달여 뒤인 4월 3일, 충북 진천까지 닿았습니다. 장날을 맞아, 충북 진천 광혜원 장터600여 명의 군중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대한제국 육군 참의 출신이자 의병장이었던 윤병한 선생의 지휘 아래, 일제가 장악한 면사무소와 경찰서를 습격했습니다.

당시 36살이었던 박도철 선생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박 선생은 군중의 선두에 서서 경찰서를 습격하다, 일본 헌병대 총탄에 맞아 희생됐습니다. 이를 목격한 박 선생의 어머니는 헌병 주재소에 돌을 던지면서 아들의 죽음에 대해 항의하다가 같은 날, 일제의 무자비한 총격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관련 기록상, 충북 진천 광혜원 대규모 만세 운동 당시 4명이 숨지고 5명이 다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919년 기록된 일본 헌병대의 충북 진천 광혜원면 만세운동 보고서. 1919년 기록된 일본 헌병대의 충북 진천 광혜원면 만세운동 보고서.

박 선생의 순국 직후, 가족들은 일제의 서슬 퍼런 감시를 피해 족보를 태웠습니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일가족 모두 몰살당할까 걱정해서였습니다. 집안의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에 쏟아 부어, 박 선생의 유족들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면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합니다.

왼쪽부터 고 박도철 선생 증손녀 박명현 씨와 손자 박영섭 씨. 순국 102년 만에 선조인 박도철 선생의 독립유공 서훈을 인정받았다. 왼쪽부터 고 박도철 선생 증손녀 박명현 씨와 손자 박영섭 씨. 순국 102년 만에 선조인 박도철 선생의 독립유공 서훈을 인정받았다.

■ "순국 102년 만에 독립 유공 서훈 인정"

박도철 선생의 후손들은 선조의 독립운동 사실을 그저 막연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박 선생의 증손녀 박명현 씨는 박 선생과 그의 어머니, 즉 증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 제사를 같은 날 지내고 있는데요. "집안 어르신들께서, '두 분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셨다'고만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국가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시는지, 항상 의문을 품었다고 합니다.

박도철 선생의 손자 박영섭 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0여 년 전부터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을 인정받기 위해 자료를 모았지만, 번번이 한계에 부딪혔다고 합니다. 박영섭 씨는 "일반 후손들이 선조의 독립운동을 입증하는 자료를 모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입증 자료를 모으려면, 생활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수준"이라고 말합니다.

선조의 독립유공 포상을 포기하다시피 했던 2015년 3월. 증손녀 박명현 씨는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증조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순국하셨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당시 일을 증언해주실 분들이 모두 돌아가셔서 독립유공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2019년 1월, 충북 진천 향토사연구회 소속 오인근 씨가 이 글을 발견했습니다.
충북 진천 광혜원 만세 시위 자료를 수집하던 오 씨는, 박명현 씨가 '박도철 선생의 증손녀'라고 생각해 연락을 취했는데요.

이후 오 씨를 비롯한 지역 역사학자들이 국가기록원의 3·1 운동 피살자 명부1919년 일본 헌병대가 남긴 관련 기록 등을 샅샅이 찾아 박도철 선생의 독립운동 사실을 발견합니다.

 2013년 6월 발굴된 3·1 운동 피살자 명부. 박도철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이 담겨있다. 2013년 6월 발굴된 3·1 운동 피살자 명부. 박도철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이 담겨있다.

■ 독립유공 포상 신청 어려워… "사료 발굴 지원 절실"

하지만 관련 자료를 발굴한 이후에도, 박도철 선생의 독립유공 포상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박 선생의 가족들이 족보 등을 태운 탓에, 박도철 선생과 박영섭 씨가 '가족'이란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역 역사 연구가들은 포기하지 않고, 주민들의 증언과 박영섭 씨 아버지의 제적 등본 등 관련 자료를 있는 대로 열심히 모았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소명과 재신청을 반복한 끝에 박도철 선생은 순국 102년 만인 올해 '애국장 서훈'을 받게 됐습니다. 지역 역사 연구가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에 박도철 선생의 독립유공을 이제야 인정받은 겁니다.


후손 개개인이, 선조의 독립운동 사실을 명확하게, 세세하게 입증하기 어렵다 보니 '국가유공자' 포상 신청자 10명 가운데 겨우 3명만 서훈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국가보훈처 자료를 보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독립유공 포상을 신청한 1,078명 가운데 36.8%인 397명만 포상을 받았는데요.

박걸순 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10여 년 전부터 국가보훈처가 전문 사료 발굴단을 편성해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발굴하고 있지만, 아직 남아있는 독립 유공자가 많다"며, " 후손의 적극적인 포상 신청과 자치단체의 노력, 지역 역사가의 노력이 모두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잊혀가는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기 위해 정부 차원의 지원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도 강조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던 애국 열사.
흘러가는 시간에 묻힌 이들의 희생과 공로를 더 많이 기억하고 발굴하려는 노력이 시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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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독립만세” 항일 희생 102년 만에…
    • 입력 2021-03-01 07:01:57
    • 수정2021-03-01 12:08:27
    취재K

■ "대한독립만세" 외치다가… 아들 이어 어머니까지 희생

102년 전,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대한 독립을 외치는 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열망은 한 달여 뒤인 4월 3일, 충북 진천까지 닿았습니다. 장날을 맞아, 충북 진천 광혜원 장터600여 명의 군중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대한제국 육군 참의 출신이자 의병장이었던 윤병한 선생의 지휘 아래, 일제가 장악한 면사무소와 경찰서를 습격했습니다.

당시 36살이었던 박도철 선생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박 선생은 군중의 선두에 서서 경찰서를 습격하다, 일본 헌병대 총탄에 맞아 희생됐습니다. 이를 목격한 박 선생의 어머니는 헌병 주재소에 돌을 던지면서 아들의 죽음에 대해 항의하다가 같은 날, 일제의 무자비한 총격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관련 기록상, 충북 진천 광혜원 대규모 만세 운동 당시 4명이 숨지고 5명이 다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919년 기록된 일본 헌병대의 충북 진천 광혜원면 만세운동 보고서.
박 선생의 순국 직후, 가족들은 일제의 서슬 퍼런 감시를 피해 족보를 태웠습니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일가족 모두 몰살당할까 걱정해서였습니다. 집안의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에 쏟아 부어, 박 선생의 유족들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면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합니다.

왼쪽부터 고 박도철 선생 증손녀 박명현 씨와 손자 박영섭 씨. 순국 102년 만에 선조인 박도철 선생의 독립유공 서훈을 인정받았다.
■ "순국 102년 만에 독립 유공 서훈 인정"

박도철 선생의 후손들은 선조의 독립운동 사실을 그저 막연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박 선생의 증손녀 박명현 씨는 박 선생과 그의 어머니, 즉 증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 제사를 같은 날 지내고 있는데요. "집안 어르신들께서, '두 분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셨다'고만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국가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시는지, 항상 의문을 품었다고 합니다.

박도철 선생의 손자 박영섭 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0여 년 전부터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을 인정받기 위해 자료를 모았지만, 번번이 한계에 부딪혔다고 합니다. 박영섭 씨는 "일반 후손들이 선조의 독립운동을 입증하는 자료를 모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입증 자료를 모으려면, 생활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수준"이라고 말합니다.

선조의 독립유공 포상을 포기하다시피 했던 2015년 3월. 증손녀 박명현 씨는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증조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순국하셨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당시 일을 증언해주실 분들이 모두 돌아가셔서 독립유공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2019년 1월, 충북 진천 향토사연구회 소속 오인근 씨가 이 글을 발견했습니다.
충북 진천 광혜원 만세 시위 자료를 수집하던 오 씨는, 박명현 씨가 '박도철 선생의 증손녀'라고 생각해 연락을 취했는데요.

이후 오 씨를 비롯한 지역 역사학자들이 국가기록원의 3·1 운동 피살자 명부1919년 일본 헌병대가 남긴 관련 기록 등을 샅샅이 찾아 박도철 선생의 독립운동 사실을 발견합니다.

 2013년 6월 발굴된 3·1 운동 피살자 명부. 박도철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이 담겨있다.
■ 독립유공 포상 신청 어려워… "사료 발굴 지원 절실"

하지만 관련 자료를 발굴한 이후에도, 박도철 선생의 독립유공 포상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박 선생의 가족들이 족보 등을 태운 탓에, 박도철 선생과 박영섭 씨가 '가족'이란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역 역사 연구가들은 포기하지 않고, 주민들의 증언과 박영섭 씨 아버지의 제적 등본 등 관련 자료를 있는 대로 열심히 모았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소명과 재신청을 반복한 끝에 박도철 선생은 순국 102년 만인 올해 '애국장 서훈'을 받게 됐습니다. 지역 역사 연구가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에 박도철 선생의 독립유공을 이제야 인정받은 겁니다.


후손 개개인이, 선조의 독립운동 사실을 명확하게, 세세하게 입증하기 어렵다 보니 '국가유공자' 포상 신청자 10명 가운데 겨우 3명만 서훈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국가보훈처 자료를 보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독립유공 포상을 신청한 1,078명 가운데 36.8%인 397명만 포상을 받았는데요.

박걸순 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10여 년 전부터 국가보훈처가 전문 사료 발굴단을 편성해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발굴하고 있지만, 아직 남아있는 독립 유공자가 많다"며, " 후손의 적극적인 포상 신청과 자치단체의 노력, 지역 역사가의 노력이 모두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잊혀가는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기 위해 정부 차원의 지원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도 강조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던 애국 열사.
흘러가는 시간에 묻힌 이들의 희생과 공로를 더 많이 기억하고 발굴하려는 노력이 시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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