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목소리 외면한 ‘생활형 숙박시설’…부산시는 ‘발뺌’

입력 2021.03.03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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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항 상업업무지구에 들어서는 초고층 생활형 숙박시설 건물 예상도북항 상업업무지구에 들어서는 초고층 생활형 숙박시설 건물 예상도

“참담한 거죠. 앞마당을 다 내준 기분입니다.”

수십 년 째 부산 동구 산복도로 인근에 사는 이인환 씨는 아침마다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매일 마을 뒷산에 올라 탁 트인 부산항 전경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어렵게 됐습니다. 산복도로 기준 2배 이상 높은 건물이 떡하니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부산의 바다가 좋아 서울에서 일을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왔다는 이 씨. 건물에 가려지는 바다가 아쉬워 매일 아침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점점 더 가려지는 바다만큼 그의 마음도 갑갑하기만 합니다.

이 전경을 사랑한 것은 비단 주민들뿐만이 아닙니다.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20·30세대가 좋아하는 카페와 식당이 들어섰고, 외국인과 타지 관광객이 어우러져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자라났습니다.

부산시도 산복도로 인근에 하늘길을 만들어 관광 자원으로 육성할 계획을 꾸리고 있습니다.

북항 재개발 사업으로 상업업무지구에 들어서는 초고층 건물은 지상 59층 규모에 높이는 최대 210m 이상입니다.

상업업무지구지만 상업시설은 10% 남짓이고 나머지는 모두 1,200여 실의 생활형 숙박시설로 조성됐습니다.

민관협의체 회의 결과 문서. 차기 회의에서 심도있는 논의를 진행한다고 했지만 이후 추가 회의는 없었다.민관협의체 회의 결과 문서. 차기 회의에서 심도있는 논의를 진행한다고 했지만 이후 추가 회의는 없었다.

협의 결과도 안 나왔는데…착공계 강행한 부산시

주민들은 눈앞을 가로막는 이 거대한 건물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조망을 해칠 뿐만 아니라 상업업무지구로 역할을 하지 못해 동구 경제에 일자리 창출 등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이 건물이 부산시의 최종 사업 승인을 받았습니다. 주민 반발이 거세지자 부산시는 사업주와 시민단체, 주민단체 등을 모아 지난해 8월 민관협의체를 꾸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첫 회의. 시민단체와 구청 등은 당초 ‘사업 취소’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주는 “이미 부산항만공사의 공모에서 선정된 내용을 바탕으로 대출 등 비용 지불까지 마무리된 상황에서 사업을 되돌릴 수는 없다”며 선을 그었는데요.

주민들은 건물 높이를 줄이거나 사회적 기여를 늘리는 방안으로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회의 결과를 담은 공식 문서에서도 “사업자와 동구 상호 간에 충분히 협의해 차기 회의에서 구체적인 대안 마련 등 심도 있게 논의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명시됐습니다.

하지만 다음 회의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민관협의체가 구성된 이후 6개월 동안 열린 회의는 단 한 번. 그 사이, 사업주는 부산시에 착공계를 제출했고, 부산시는 지난 2월 초, 착공계를 최종 승인했습니다.

부산시의회가 용역을 맡긴 북항1단계 계획에 따른 모의실험 사진. 스카이라인이 무너질 우려가 높다.부산시의회가 용역을 맡긴 북항1단계 계획에 따른 모의실험 사진. 스카이라인이 무너질 우려가 높다.

나 몰라라 행정에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 몫

주민들이 요구했던 용적률·건물 높이 변경은 아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부산시는 “착공계 제출은 사업주의 몫이며, 법적 하자가 없어 계획을 승인했다”고 밝혔는데요. 사실상 되돌릴 수 없는 사안을 가지고 허울뿐인 민관협의체를 운영한 겁니다.

부산시는 “건축법령에 조망권에 대한 내용은 없으며 이 부분은 사업주와 주민들이 알아서 결정할 부분”이라고 발을 뺐습니다.

또 “해수부가 수립한 지구단위계획에 따라 허가해준 것 뿐”이라며 “민관협의체 회의는 계속하면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이미 착공계 승인을 받은 생활형 숙박시설은 지난달 15일부터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구역 바로 옆에는 77층 높이의 생활형 숙박시설이 추가로 부산시 심의를 받고 있는데요. 이대로라면 이미 건설 중인 두 곳을 포함해 200m 이상의 초고층 건물이 삼지창처럼 부산 북항 앞을 가로막게 됩니다.

“천혜의 자연을 볼 수 있는, 향수를 불러오는 부산의 바다, 그걸 해치는 개발은 상생이 아니라 일방적인 관계인 거잖아요.”

원주민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초고층 건물, 이제는 재개발의 취지를 다시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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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민 목소리 외면한 ‘생활형 숙박시설’…부산시는 ‘발뺌’
    • 입력 2021-03-03 08:07:19
    취재K
북항 상업업무지구에 들어서는 초고층 생활형 숙박시설 건물 예상도
“참담한 거죠. 앞마당을 다 내준 기분입니다.”

수십 년 째 부산 동구 산복도로 인근에 사는 이인환 씨는 아침마다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매일 마을 뒷산에 올라 탁 트인 부산항 전경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어렵게 됐습니다. 산복도로 기준 2배 이상 높은 건물이 떡하니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부산의 바다가 좋아 서울에서 일을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왔다는 이 씨. 건물에 가려지는 바다가 아쉬워 매일 아침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점점 더 가려지는 바다만큼 그의 마음도 갑갑하기만 합니다.

이 전경을 사랑한 것은 비단 주민들뿐만이 아닙니다.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20·30세대가 좋아하는 카페와 식당이 들어섰고, 외국인과 타지 관광객이 어우러져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자라났습니다.

부산시도 산복도로 인근에 하늘길을 만들어 관광 자원으로 육성할 계획을 꾸리고 있습니다.

북항 재개발 사업으로 상업업무지구에 들어서는 초고층 건물은 지상 59층 규모에 높이는 최대 210m 이상입니다.

상업업무지구지만 상업시설은 10% 남짓이고 나머지는 모두 1,200여 실의 생활형 숙박시설로 조성됐습니다.

민관협의체 회의 결과 문서. 차기 회의에서 심도있는 논의를 진행한다고 했지만 이후 추가 회의는 없었다.
협의 결과도 안 나왔는데…착공계 강행한 부산시

주민들은 눈앞을 가로막는 이 거대한 건물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조망을 해칠 뿐만 아니라 상업업무지구로 역할을 하지 못해 동구 경제에 일자리 창출 등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이 건물이 부산시의 최종 사업 승인을 받았습니다. 주민 반발이 거세지자 부산시는 사업주와 시민단체, 주민단체 등을 모아 지난해 8월 민관협의체를 꾸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첫 회의. 시민단체와 구청 등은 당초 ‘사업 취소’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주는 “이미 부산항만공사의 공모에서 선정된 내용을 바탕으로 대출 등 비용 지불까지 마무리된 상황에서 사업을 되돌릴 수는 없다”며 선을 그었는데요.

주민들은 건물 높이를 줄이거나 사회적 기여를 늘리는 방안으로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회의 결과를 담은 공식 문서에서도 “사업자와 동구 상호 간에 충분히 협의해 차기 회의에서 구체적인 대안 마련 등 심도 있게 논의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명시됐습니다.

하지만 다음 회의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민관협의체가 구성된 이후 6개월 동안 열린 회의는 단 한 번. 그 사이, 사업주는 부산시에 착공계를 제출했고, 부산시는 지난 2월 초, 착공계를 최종 승인했습니다.

부산시의회가 용역을 맡긴 북항1단계 계획에 따른 모의실험 사진. 스카이라인이 무너질 우려가 높다.
나 몰라라 행정에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 몫

주민들이 요구했던 용적률·건물 높이 변경은 아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부산시는 “착공계 제출은 사업주의 몫이며, 법적 하자가 없어 계획을 승인했다”고 밝혔는데요. 사실상 되돌릴 수 없는 사안을 가지고 허울뿐인 민관협의체를 운영한 겁니다.

부산시는 “건축법령에 조망권에 대한 내용은 없으며 이 부분은 사업주와 주민들이 알아서 결정할 부분”이라고 발을 뺐습니다.

또 “해수부가 수립한 지구단위계획에 따라 허가해준 것 뿐”이라며 “민관협의체 회의는 계속하면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이미 착공계 승인을 받은 생활형 숙박시설은 지난달 15일부터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구역 바로 옆에는 77층 높이의 생활형 숙박시설이 추가로 부산시 심의를 받고 있는데요. 이대로라면 이미 건설 중인 두 곳을 포함해 200m 이상의 초고층 건물이 삼지창처럼 부산 북항 앞을 가로막게 됩니다.

“천혜의 자연을 볼 수 있는, 향수를 불러오는 부산의 바다, 그걸 해치는 개발은 상생이 아니라 일방적인 관계인 거잖아요.”

원주민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초고층 건물, 이제는 재개발의 취지를 다시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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