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40초’, 회색빛 도시에 예술이 켜지는 시간

입력 2021.03.04 (16:27) 수정 2021.03.0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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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출근길 횡단보도, 공연장이 되다
코로나19로 설 곳 잃은 지역 청년예술인들, 거리 무대로 나서
'코로나 블루' 물리칠 예술의 힘…"시민들 모두 누렸으면"


■ 도로 위에 예술가가 나타났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일터로 가는 길.
신호대기하고 있는 차량 앞에 별안간 알록달록 오색 분장을 한 청년예술인들이 나타납니다.

전북 전주 전라북도청 앞 사거리.전북 전주 전라북도청 앞 사거리.
횡단보도 신호등에 초록불이 켜지는 단 40초의 시간. 빠르게 길을 건너며 춤을 추고,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운전자들의 눈을 마주합니다.

10, 9, 8, 7….

초록불이 숫자를 태우는 사이 이들의 짧은 극은 절정을 치닫고, 빨간불이 켜지기 전 일렬로 선 채 격하게 손을 흔들며 어느새 관객이 된 시민들을 떠나보냅니다.

공연 내내 한쪽에 보이는 현수막의 글귀는 관객들의 하루에 깊이 스며듭니다.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그대를 응원합니다."


■ "설 자리 없어졌지만 무대 포기할 수 없어"

이들은 대체 왜 거리로 나왔을까.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열 석 달째.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일이 어려워지면서 직격탄을 맞은 건 예술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지역에서 꿈과 끼를 펼치려는 청년예술인들은 더더욱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공연은 끊겼고, 생계는 힘들어졌으며,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청년예술인들을 힘들게 한 건 바로 눈 맞춤. 관객의 눈을 바라보며 에너지와 메시지를 전달할 무대가 없다는 게 가장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지역의 청년 예술인들은 결국 무대를 찾아 거리로 나서기로 했습니다.


■ 비대면 공연으로 전하는 '응원과 위로'

청년예술인들이 활동하는 전주의 하이댄스퍼포먼스는 어떻게 하면 '비대면 사회'에 걸맞게 관객의 눈을 마주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횡단보도'를 무대로 장식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켜지는 1분 남짓을 위해 준비한 시간은 장장 석 달.

몸을 움직여야 하는 고된 연습 동안에도 마스크를 쓴 채 땀방울을 흘렸고, 실전을 위한 리허설도 지나는 차나 보행자가 없는 새벽 시간대 겨우 이뤄졌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바로 응원과 위로입니다.

코로나19가 장기화 되면서 사회에 짙게 드리운 우울감, 이른바 '코로나 블루'를 겪는 시민들에게 가장 그들다운 방법으로 희망을 전하고자 한 겁니다.


■ 의미 있는 만큼 '안전하게'

전주시는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이달 2일부터 17일까지 출근 시간대 교통량이 많은 교차로에서 깜짝 공연이 펼쳐질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공연은 지나는 차량이 많지만 횡단보도 보행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곳에서 이뤄집니다.

또 공연마다 안전사고 위험을 막기 위해 안전 요원 2명씩을 배치했습니다.

모든 공연자는 신호가 완전히 바뀌기 10초 전쯤 퇴장해 짧고 강렬한 메시지를 안전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 "매일 아침, 새로운 태양이 뜹니다."

이번 공연의 연출을 맡은 포스댄스컴퍼니 오해룡 대표는 "코로나19로 모든 희망이 무너진 것 같지만, 시간이 흘러 결국 봄이 찾아왔듯이 시민들이 짧은 공연으로나마 따뜻한 응원과 희망, 위로를 얻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해왔습니다.

여기에 "그동안 웅크리고 있던 청년예술인들이 잠시나마 무대를 통해 그 끼를 펼칠 수 있어 기쁘다"고 덧붙였는데요, 8명의 예술인은 차량 유리 너머 보이는 관객의 표정과 호응하는 손짓에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다는 후문입니다.

청년예술인들이 풀어놓은 거리 공연의 메시지와 그 후기는 영화 '라라랜드' 대표 삽입곡인 'Another day of sun'의 노랫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When they let you down you'll get up off the ground.
'Cause morning rolls around and it's another day of sun."

"아무리 세상이 절망스럽다 해도 넌 딛고 일어설 거야.
돌아온 아침엔 새로운 태양이 뜰 테니까!"


예술인들은 열정을 태우고, 그 뜨거움을 보는 이들은 위로를 얻고.
코로나19도 꺾을 수 없는 예술의 힘이 봄날의 아침을 깨우고 있습니다.

(촬영기자 김동균 / 그래픽 최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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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 40초’, 회색빛 도시에 예술이 켜지는 시간
    • 입력 2021-03-04 16:27:45
    • 수정2021-03-04 16:36:04
    취재K
출근길 횡단보도, 공연장이 되다<br />코로나19로 설 곳 잃은 지역 청년예술인들, 거리 무대로 나서<br />'코로나 블루' 물리칠 예술의 힘…"시민들 모두 누렸으면"

■ 도로 위에 예술가가 나타났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일터로 가는 길.
신호대기하고 있는 차량 앞에 별안간 알록달록 오색 분장을 한 청년예술인들이 나타납니다.

전북 전주 전라북도청 앞 사거리.횡단보도 신호등에 초록불이 켜지는 단 40초의 시간. 빠르게 길을 건너며 춤을 추고,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운전자들의 눈을 마주합니다.

10, 9, 8, 7….

초록불이 숫자를 태우는 사이 이들의 짧은 극은 절정을 치닫고, 빨간불이 켜지기 전 일렬로 선 채 격하게 손을 흔들며 어느새 관객이 된 시민들을 떠나보냅니다.

공연 내내 한쪽에 보이는 현수막의 글귀는 관객들의 하루에 깊이 스며듭니다.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그대를 응원합니다."


■ "설 자리 없어졌지만 무대 포기할 수 없어"

이들은 대체 왜 거리로 나왔을까.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열 석 달째.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일이 어려워지면서 직격탄을 맞은 건 예술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지역에서 꿈과 끼를 펼치려는 청년예술인들은 더더욱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공연은 끊겼고, 생계는 힘들어졌으며,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청년예술인들을 힘들게 한 건 바로 눈 맞춤. 관객의 눈을 바라보며 에너지와 메시지를 전달할 무대가 없다는 게 가장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지역의 청년 예술인들은 결국 무대를 찾아 거리로 나서기로 했습니다.


■ 비대면 공연으로 전하는 '응원과 위로'

청년예술인들이 활동하는 전주의 하이댄스퍼포먼스는 어떻게 하면 '비대면 사회'에 걸맞게 관객의 눈을 마주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횡단보도'를 무대로 장식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켜지는 1분 남짓을 위해 준비한 시간은 장장 석 달.

몸을 움직여야 하는 고된 연습 동안에도 마스크를 쓴 채 땀방울을 흘렸고, 실전을 위한 리허설도 지나는 차나 보행자가 없는 새벽 시간대 겨우 이뤄졌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바로 응원과 위로입니다.

코로나19가 장기화 되면서 사회에 짙게 드리운 우울감, 이른바 '코로나 블루'를 겪는 시민들에게 가장 그들다운 방법으로 희망을 전하고자 한 겁니다.


■ 의미 있는 만큼 '안전하게'

전주시는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이달 2일부터 17일까지 출근 시간대 교통량이 많은 교차로에서 깜짝 공연이 펼쳐질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공연은 지나는 차량이 많지만 횡단보도 보행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곳에서 이뤄집니다.

또 공연마다 안전사고 위험을 막기 위해 안전 요원 2명씩을 배치했습니다.

모든 공연자는 신호가 완전히 바뀌기 10초 전쯤 퇴장해 짧고 강렬한 메시지를 안전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 "매일 아침, 새로운 태양이 뜹니다."

이번 공연의 연출을 맡은 포스댄스컴퍼니 오해룡 대표는 "코로나19로 모든 희망이 무너진 것 같지만, 시간이 흘러 결국 봄이 찾아왔듯이 시민들이 짧은 공연으로나마 따뜻한 응원과 희망, 위로를 얻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해왔습니다.

여기에 "그동안 웅크리고 있던 청년예술인들이 잠시나마 무대를 통해 그 끼를 펼칠 수 있어 기쁘다"고 덧붙였는데요, 8명의 예술인은 차량 유리 너머 보이는 관객의 표정과 호응하는 손짓에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다는 후문입니다.

청년예술인들이 풀어놓은 거리 공연의 메시지와 그 후기는 영화 '라라랜드' 대표 삽입곡인 'Another day of sun'의 노랫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When they let you down you'll get up off the ground.
'Cause morning rolls around and it's another day of sun."

"아무리 세상이 절망스럽다 해도 넌 딛고 일어설 거야.
돌아온 아침엔 새로운 태양이 뜰 테니까!"


예술인들은 열정을 태우고, 그 뜨거움을 보는 이들은 위로를 얻고.
코로나19도 꺾을 수 없는 예술의 힘이 봄날의 아침을 깨우고 있습니다.

(촬영기자 김동균 / 그래픽 최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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