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조선 화가들은 경복궁을 안 그렸을까?

입력 2021.03.10 (09:01) 수정 2021.03.1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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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일이죠. 경복궁을 그린 조선의 화가가 없다니.

보고 그린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던 시절도 분명 아니었습니다. 경복궁은 수도 한양에 도읍을 정한 새 왕조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신성하고 장엄한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백악산을 등지고 파도치듯 흐르는 기와지붕의 선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그 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큼 압도적이었을 겁니다.

지금이야 제법 번듯한 모습이지만, 경복궁의 수난은 그것 자체로 우리 역사의 압축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잿더미로 변해버렸고, 이후 경복궁은 무려 300년 가까이 폐허로 방치됐습니다. 조선의 어느 임금도 경복궁 재건을 계획하거나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또는 못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경복궁은 대대적으로 중건됩니다.

처음 지은 것을 창건(創建)이라 했으니, 다시 지은 것을 중건(重建)이라 한 것이죠. 안팎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조선 말기에 경복궁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일제가 철저하게 짓밟아버리죠. 수난도 그런 수난이 없습니다. 경복궁 복원(復原) 공사는 2021년 오늘도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림 이야기로 돌아오면, 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만큼이나 저도 무척 궁금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야 경복궁이랄 것이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됐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대체 임진왜란 전까지 이 땅에 세워진 그 어떤 건축물도 감히 넘볼 수 없었을 경복궁의 장엄과 위용을 조선의 화가들은 왜 그리지 않았던가?


■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을 보여주는 그림

〈중묘조서연관사연도〉, 1535년, 화첩, 종이에 채색, 42.7×57.5cm, 홍익대학교박물관〈중묘조서연관사연도〉, 1535년, 화첩, 종이에 채색, 42.7×57.5cm, 홍익대학교박물관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이 갖는 가치는 독보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목은 <중묘조서여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중묘조, 즉 조선 중종 때 서연관, 즉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리들에게 사연, 즉 연회를 베풀어준 일을 기념해 그린 기록화입니다.

그렇다면 이 행사가 열린 장소가 어딜까요? 바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이었습니다.

화면 오른쪽 위에 보이는 2층 지붕 건물이 바로 근정전(勤政殿)입니다. 행사 자체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 탓에 배경이 되는 근정전 일대는 원래 모습보다 상당히 축소해서 그렸습니다.

그렇지만 근정전을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펼쳐진 회랑은 물론 근정전 영역을 드나드는 동문, 남문, 서문까지 자세하게 그려놓았습니다. 뒤에는 백악산이 우뚝 서 있고요.

〈중묘조서연관사연도〉, 18세기 이모(移模), 화첩, 종이에 채색, 44.0×61.0cm, 고려대학교박물관〈중묘조서연관사연도〉, 18세기 이모(移模), 화첩, 종이에 채색, 44.0×61.0cm, 고려대학교박물관

임진왜란으로 불타 사라지기 전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무이한 작품입니다. 행사가 열린 시기가 중종 30년인 1535년이니, 이 그림은 1535년에 그려진 겁니다.

하지만 위 그림은 1535년 작품이 아닙니다. 후대에 원본을 베껴 다시 그린 거죠. 이런 모사본(模寫本)이 지금까지 여러 점 남아 전합니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품은 세부 묘사에서 홍익대 박물관 소장품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뭐가 같고 뭐가 다른지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죠.


■ 임진왜란 이후의 경복궁을 보여주는 그림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돼버린 경복궁은 이후 찾는 이 없이 쓸쓸하게 방치됩니다. 누구도 경복궁을 재건하는 일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경복궁이 안타까웠는지 재위 시절 유난히 경복궁을 자주 찾은 임금이 있었죠. 조선 21대 임금 영조(英祖, 1694~1776)입니다. 영조는 국가와 왕실의 여러 공식 행사를 경복궁 터에서 치르도록 했습니다.

조선 영조 43년인 1767년 경복궁에서 진작례(進爵禮)라는 행사가 거행됩니다. 진작례는 조선 시대 궁중에서 잔치를 열 때, 임금에게 술잔을 올리고 예를 표한 의식을 뜻합니다.

영조는 당시 근정전 자리에서 과거 시험을 열게 하고, 이에 맞춰 술잔을 올리는 의식을 치르게 하죠. 이 일을 기념하는 기록화가 지금까지 남아 전합니다.

〈영묘조구궐진작도〉, 1767년, 비단에 채색, 42.9×60.4cm, 국립문화재연구소〈영묘조구궐진작도〉, 1767년, 비단에 채색, 42.9×60.4cm, 국립문화재연구소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 영묘조, 즉 영조 때 구궐(舊闕), 즉 옛 궁궐인 경복궁에서 진작, 즉 진작례를 치른 일을 기념한 그림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인가. 근정전 터입니다. 천막을 친 장소가 바로 근정전이 서 있던 자리죠. 당연히 기록에 그렇게 돼 있으니 이곳이 근정전이란 사실을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림에도 결정적인 증거가 펼쳐져 있으니 그림 아래에 보이는 석축 월대입니다.

근정전은 불타 잿더미가 된 지 오래지만, 돌을 깎고 다듬어 쌓아 올린 월대는 당시까지도 저리 번듯하게 남아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아랫단 좌우 측 모서리에 놓인 동물 조각상까지 그대로였던 모양입니다. 이 동물은 석견(石犬)으로 흔히 알려졌는데, 2019년 10월에 KBS가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던 원본 조각상을 찾아냅니다.

문화재청은 물론 역사학계도 그 존재조차 까맣게 몰랐던 유물이죠.

2019년 10월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아낸 근정전 월대 조각상 원본2019년 10월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아낸 근정전 월대 조각상 원본


[연관기사] [단독] 경복궁 근정전 앞 동물 조각상 ‘석견’ 원본 찾았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307942

이 그림 역시 앞서 소개한 것과 마찬가지로 최초로 그려진 것은 1767년이겠지만, 미술사학자들은 색채를 사용한 방법이라든가 음영법을 쓴 묘사 기법이 19세기 양식으로 보인다며 후대에 원본을 베껴 그린 이모본(移模本)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그림의 가치는 전혀 퇴색하지 않죠. 조선 후기에도 근정전 월대 석축이 저만치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료이기 때문입니다.


■ 경복궁을 비로소 경복궁답게 그린 그림

위에서 본 그림 두 점은 경복궁의 흔적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각적 기록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핵심은 왕실의 행사였고, 근정전과 근정전 터는 그저 행사의 배경으로 등장할 뿐이죠. 경복궁 자체가 주인공이 된 경우가 조선 시대 그림에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의 화가들은 경복궁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한창이던 1915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서 대규모 박람회를 열기로 합니다. 조선을 식민지배 아래 둔 지 5년이 된 해를 기념해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기로 한 거였죠.

행사를 위해 일제는 경복궁의 많은 전각을 부수고 신식 건물과 서양식 건축물들을 지었습니다. 경복궁은 또다시 잔인하게 훼손되고 유린당합니다.

바로 그해에 식민지 조선의 한 화가가 한국 미술사에 길이 남을 그림을 완성합니다.

화가의 이름은 안중식(安中植, 1861∼1919). 42살이던 1902년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 제작에 참여해 당대 최고의 화가만이 누릴 수 있는 영예를 거머쥔 조선 최후의 궁중 화가였죠.

안중식이 1915년에 완성한 그림은 <백악춘효(白岳春曉)>라는 이름의 그림 두 점입니다.

안중식 〈백악춘효도〉,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197.5×63.6cm, 202.0×65.3cm, 등록문화재 485호, 국립중앙박물관안중식 〈백악춘효도〉,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197.5×63.6cm, 202.0×65.3cm, 등록문화재 485호, 국립중앙박물관

<백악춘효>는 '여름본'과 '가을본' 두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세부 묘사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같은 구도로 그린 그림이죠.

화면 오른쪽 위에 적혀 있는 백악춘효(白岳春曉)라는 글씨가 그림의 제목입니다. 풀이하면 '백악산의 봄날 새벽'입니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하나는 여름, 다른 하나는 가을 풍경을 담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시 '춘효(春曉)'와 연관 지어서 해석합니다. 이 시의 첫 줄에 담긴 의미에 주목한 겁니다.

春眠不覺曉 봄 잠에 날 밝는 줄 몰랐는데
夜來風雨聲 간밤에 비바람 소리 들렸으니
處處聞啼鳥 여기저기서 새 소리 들려온다
花落知多少 꽃잎은 얼마나 떨어졌을까?

봄 잠에 날 밝는 줄도 몰랐다는 구절에 주목해 봅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915년 당시의 경복궁은 이런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안중식이 본 경복궁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모습이었겠죠.

하지만 화가가 완성한 그림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안중식은 무참하게 헐리고 훼손되기 전 웅장하고 위엄 있는 옛 경복궁을 그렸습니다. <백악춘효>에 묘사된 경복궁은 실제가 아닌 상상의 산물인 겁니다.

화가는 대체 어떤 마음으로 저 그림들을 완성한 걸까. 비록 광화문 현판에 글자까지 써넣지는 않았지만, 광화문 앞 어도(御道)는 물론 해태상도 처음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그렸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그림에 붙인 제목처럼 언젠가 봄이 오고 새벽이 오리라는 기대와 염원을 그림에 담은 건 아닐까.

<백악춘효>는 한국 미술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경복궁을 경복궁답게 그린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재하는 풍경이 아닌 상상에 의한 묘사라는 점에서 그림 속 경복궁을 보고 있노라면 두서없이 얽혀드는 상념들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나라의 빛을 되찾은 지도 어느덧 76년. 하지만 경복궁 복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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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조선 화가들은 경복궁을 안 그렸을까?
    • 입력 2021-03-10 09:01:07
    • 수정2021-03-11 10:41:25
    취재K
참 이상한 일이죠. 경복궁을 그린 조선의 화가가 없다니.

보고 그린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던 시절도 분명 아니었습니다. 경복궁은 수도 한양에 도읍을 정한 새 왕조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신성하고 장엄한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백악산을 등지고 파도치듯 흐르는 기와지붕의 선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그 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큼 압도적이었을 겁니다.

지금이야 제법 번듯한 모습이지만, 경복궁의 수난은 그것 자체로 우리 역사의 압축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잿더미로 변해버렸고, 이후 경복궁은 무려 300년 가까이 폐허로 방치됐습니다. 조선의 어느 임금도 경복궁 재건을 계획하거나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또는 못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경복궁은 대대적으로 중건됩니다.

처음 지은 것을 창건(創建)이라 했으니, 다시 지은 것을 중건(重建)이라 한 것이죠. 안팎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조선 말기에 경복궁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일제가 철저하게 짓밟아버리죠. 수난도 그런 수난이 없습니다. 경복궁 복원(復原) 공사는 2021년 오늘도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림 이야기로 돌아오면, 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만큼이나 저도 무척 궁금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야 경복궁이랄 것이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됐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대체 임진왜란 전까지 이 땅에 세워진 그 어떤 건축물도 감히 넘볼 수 없었을 경복궁의 장엄과 위용을 조선의 화가들은 왜 그리지 않았던가?


■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을 보여주는 그림

〈중묘조서연관사연도〉, 1535년, 화첩, 종이에 채색, 42.7×57.5cm, 홍익대학교박물관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이 갖는 가치는 독보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목은 <중묘조서여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중묘조, 즉 조선 중종 때 서연관, 즉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리들에게 사연, 즉 연회를 베풀어준 일을 기념해 그린 기록화입니다.

그렇다면 이 행사가 열린 장소가 어딜까요? 바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이었습니다.

화면 오른쪽 위에 보이는 2층 지붕 건물이 바로 근정전(勤政殿)입니다. 행사 자체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 탓에 배경이 되는 근정전 일대는 원래 모습보다 상당히 축소해서 그렸습니다.

그렇지만 근정전을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펼쳐진 회랑은 물론 근정전 영역을 드나드는 동문, 남문, 서문까지 자세하게 그려놓았습니다. 뒤에는 백악산이 우뚝 서 있고요.

〈중묘조서연관사연도〉, 18세기 이모(移模), 화첩, 종이에 채색, 44.0×61.0cm, 고려대학교박물관
임진왜란으로 불타 사라지기 전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무이한 작품입니다. 행사가 열린 시기가 중종 30년인 1535년이니, 이 그림은 1535년에 그려진 겁니다.

하지만 위 그림은 1535년 작품이 아닙니다. 후대에 원본을 베껴 다시 그린 거죠. 이런 모사본(模寫本)이 지금까지 여러 점 남아 전합니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품은 세부 묘사에서 홍익대 박물관 소장품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뭐가 같고 뭐가 다른지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죠.


■ 임진왜란 이후의 경복궁을 보여주는 그림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돼버린 경복궁은 이후 찾는 이 없이 쓸쓸하게 방치됩니다. 누구도 경복궁을 재건하는 일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경복궁이 안타까웠는지 재위 시절 유난히 경복궁을 자주 찾은 임금이 있었죠. 조선 21대 임금 영조(英祖, 1694~1776)입니다. 영조는 국가와 왕실의 여러 공식 행사를 경복궁 터에서 치르도록 했습니다.

조선 영조 43년인 1767년 경복궁에서 진작례(進爵禮)라는 행사가 거행됩니다. 진작례는 조선 시대 궁중에서 잔치를 열 때, 임금에게 술잔을 올리고 예를 표한 의식을 뜻합니다.

영조는 당시 근정전 자리에서 과거 시험을 열게 하고, 이에 맞춰 술잔을 올리는 의식을 치르게 하죠. 이 일을 기념하는 기록화가 지금까지 남아 전합니다.

〈영묘조구궐진작도〉, 1767년, 비단에 채색, 42.9×60.4cm, 국립문화재연구소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 영묘조, 즉 영조 때 구궐(舊闕), 즉 옛 궁궐인 경복궁에서 진작, 즉 진작례를 치른 일을 기념한 그림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인가. 근정전 터입니다. 천막을 친 장소가 바로 근정전이 서 있던 자리죠. 당연히 기록에 그렇게 돼 있으니 이곳이 근정전이란 사실을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림에도 결정적인 증거가 펼쳐져 있으니 그림 아래에 보이는 석축 월대입니다.

근정전은 불타 잿더미가 된 지 오래지만, 돌을 깎고 다듬어 쌓아 올린 월대는 당시까지도 저리 번듯하게 남아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아랫단 좌우 측 모서리에 놓인 동물 조각상까지 그대로였던 모양입니다. 이 동물은 석견(石犬)으로 흔히 알려졌는데, 2019년 10월에 KBS가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던 원본 조각상을 찾아냅니다.

문화재청은 물론 역사학계도 그 존재조차 까맣게 몰랐던 유물이죠.

2019년 10월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아낸 근정전 월대 조각상 원본

[연관기사] [단독] 경복궁 근정전 앞 동물 조각상 ‘석견’ 원본 찾았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307942

이 그림 역시 앞서 소개한 것과 마찬가지로 최초로 그려진 것은 1767년이겠지만, 미술사학자들은 색채를 사용한 방법이라든가 음영법을 쓴 묘사 기법이 19세기 양식으로 보인다며 후대에 원본을 베껴 그린 이모본(移模本)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그림의 가치는 전혀 퇴색하지 않죠. 조선 후기에도 근정전 월대 석축이 저만치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료이기 때문입니다.


■ 경복궁을 비로소 경복궁답게 그린 그림

위에서 본 그림 두 점은 경복궁의 흔적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각적 기록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핵심은 왕실의 행사였고, 근정전과 근정전 터는 그저 행사의 배경으로 등장할 뿐이죠. 경복궁 자체가 주인공이 된 경우가 조선 시대 그림에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의 화가들은 경복궁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한창이던 1915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서 대규모 박람회를 열기로 합니다. 조선을 식민지배 아래 둔 지 5년이 된 해를 기념해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기로 한 거였죠.

행사를 위해 일제는 경복궁의 많은 전각을 부수고 신식 건물과 서양식 건축물들을 지었습니다. 경복궁은 또다시 잔인하게 훼손되고 유린당합니다.

바로 그해에 식민지 조선의 한 화가가 한국 미술사에 길이 남을 그림을 완성합니다.

화가의 이름은 안중식(安中植, 1861∼1919). 42살이던 1902년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 제작에 참여해 당대 최고의 화가만이 누릴 수 있는 영예를 거머쥔 조선 최후의 궁중 화가였죠.

안중식이 1915년에 완성한 그림은 <백악춘효(白岳春曉)>라는 이름의 그림 두 점입니다.

안중식 〈백악춘효도〉,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197.5×63.6cm, 202.0×65.3cm, 등록문화재 485호, 국립중앙박물관
<백악춘효>는 '여름본'과 '가을본' 두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세부 묘사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같은 구도로 그린 그림이죠.

화면 오른쪽 위에 적혀 있는 백악춘효(白岳春曉)라는 글씨가 그림의 제목입니다. 풀이하면 '백악산의 봄날 새벽'입니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하나는 여름, 다른 하나는 가을 풍경을 담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시 '춘효(春曉)'와 연관 지어서 해석합니다. 이 시의 첫 줄에 담긴 의미에 주목한 겁니다.

春眠不覺曉 봄 잠에 날 밝는 줄 몰랐는데
夜來風雨聲 간밤에 비바람 소리 들렸으니
處處聞啼鳥 여기저기서 새 소리 들려온다
花落知多少 꽃잎은 얼마나 떨어졌을까?

봄 잠에 날 밝는 줄도 몰랐다는 구절에 주목해 봅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915년 당시의 경복궁은 이런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안중식이 본 경복궁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모습이었겠죠.

하지만 화가가 완성한 그림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안중식은 무참하게 헐리고 훼손되기 전 웅장하고 위엄 있는 옛 경복궁을 그렸습니다. <백악춘효>에 묘사된 경복궁은 실제가 아닌 상상의 산물인 겁니다.

화가는 대체 어떤 마음으로 저 그림들을 완성한 걸까. 비록 광화문 현판에 글자까지 써넣지는 않았지만, 광화문 앞 어도(御道)는 물론 해태상도 처음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그렸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그림에 붙인 제목처럼 언젠가 봄이 오고 새벽이 오리라는 기대와 염원을 그림에 담은 건 아닐까.

<백악춘효>는 한국 미술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경복궁을 경복궁답게 그린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재하는 풍경이 아닌 상상에 의한 묘사라는 점에서 그림 속 경복궁을 보고 있노라면 두서없이 얽혀드는 상념들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나라의 빛을 되찾은 지도 어느덧 76년. 하지만 경복궁 복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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