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속 검은 그림자…그 여성 “열흘동안 거의 굶었습니다”

입력 2021.03.10 (19:19) 수정 2021.03.1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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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보은군 내북면의 해발 250m 산속 터널을 한 여성이 걷고 있다. (순찰차 블랙박스 화면)

■ "터널 안에 사람이 걷고 있어요."

어둠이 짙게 깔린 충북 보은군 내북면의 해발 250m 산속.

검은 긴 패딩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여성이 터널 안을 무작정 걷습니다. 사람은커녕 차도 찾아보기 힘든 긴 터널 속을 홀로 걸어갑니다.

지난달 11일, 자정이 넘은 시각.

충북 보은군 봉계터널 관리사무소 직원 유창수 씨는 CCTV 화면에 잡힌 검은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은 물론 차 조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야심한 밤에 누군가 터널 안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CCTV를 살피던 유 씨는 놀란 마음에 경찰에 신고부터 했습니다.

"경찰서죠? 여기 봉계터널 관리사무소인데요. 터널 안에 사람이 걷고 있어요."

혹시나 사고가 날까 걱정했던 유 씨는 전화를 끊은 뒤에도 이 여성의 행동을 계속 살폈습니다. 비틀거리다 난간을 잡으면서도 아주 천천히, 그리고 계속 걷는 모습이 이상했다고 말합니다.

터널은 총 길이만 1.6km. 평소 비상대피로를 자주 걷던 경험에 비춰볼 때 이 정도 속도면 터널 반대편까지 2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판단했습니다.

6분 뒤, 충북 보은경찰서 내북파출소 우희진 경위가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순찰차는 한참을 달려 터널 중간쯤에서 멈춰 섰습니다.

유 씨가 신고한 대로 검은 긴 패딩을 입은 여성은 아주 느린 속도로 터널 안을 걷고 있었습니다. 터널 안 대피구간에 차를 세우고, 경찰이 차에서 내려 이 여성에게 다가갔습니다.

- 경찰 :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이 아니에요. 위험하니 차에 타세요."
- 여성 : "그냥 걸어가는데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냥 가던 길 가세요."


북한이탈주민 여성이 실종된 지 12일 만에 경찰에 구조됐다. (순찰차 블랙박스 화면)


■ 경계심 가득했던 '북한이탈주민'… "아들이 보고 싶어서"

완강히 거절하는 여성을 두고 설득하길 수차례. 결국, 신원 미상의 여성을 순찰차에 태우고 터널을 빠져나온 우 경위는 일단 이 여성을 안심시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뒷자리에 탄 여성은 경찰을 경계하면서도 힘겹게 입을 떼 말합니다.

"경찰에 잡혀가면 못 나오는 거 아닙니까?"

경찰서로 향하면서 조금씩 입을 뗀 50대 A 씨가 들려준 이야기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저는 사실 북한에서 왔습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몇 년 전 세상을 떠나 충북 음성 추모공원에 안치했습니다.

명절도 다가오고 아들이 정말 보고 싶어서 추모공원에 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추모공원이 있는 충북 음성에서 보은까지는 차로 달려도 70km가 넘고, 직선거리 만으로도 50km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 1월 31일, 아들을 보러 나섰다가 길을 잃은 겁니다.

경찰은 A 씨가 탈북 전후, 경계심 속에 살았던 탓에 주변 낯선 이들에게 섣불리 도움을 청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A 씨는 경찰에게 " 전 남편과의 아들이어서 현 남편에게 연락하지도 못하고 무작정 걷다 보니 보은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일일 최저기온이 영하 7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밤낮으로 걸었던 겁니다.

비틀거리며 터널 안을 걷고 경찰을 경계했던 A 씨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북한이탈주민이 실종 담당 경찰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다. (충북 보은경찰서 CCTV)


■ "걷고, 또 걸으면서 벼 이삭, 옥수수알로 끼니 때워"

충북 보은경찰서에 도착한 A 씨는 초췌한 모습으로 배가 고파 보였습니다.

거리를 배회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논에 떨어진 벼 이삭이나 옥수수알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개울에서 물을 먹으며 걷고 또 걸었다고 했습니다.

새벽 시간이라 음식점도 모두 문을 닫은 상황. 여성청소년수사팀 정창진 경사는 급한 대로 컵라면에 물을 붓고 간식으로 챙겨둔 과자를 건넸습니다. A 씨는 컵라면을 먹으면서도 위축된 상태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정 경사가 이 여성의 주민등록번호를 조회해 신원을 확인해보니 지난달 3일, 경기도 안성에서 실종 신고가 접수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다행히 남편과도 연락이 닿았습니다. 남편은 열흘가량 아내를 찾아다니면서 경기 안성에서 충북 청주까지 이동한 상태였습니다.

경찰은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고 A 씨가 집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해 충북 보은까지 찾아온 남편에게 인계해줬다"고 밝혔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구조해준 출동 경찰, 그리고 A 씨를 보호해준 경찰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화면제공: 충북 보은경찰서, 봉계터널 관리사무소/ 영상편집: 오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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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3-10 19:19:11
    • 수정2021-03-10 20:31:27
    취재K
충북 보은군 내북면의 해발 250m 산속 터널을 한 여성이 걷고 있다. (순찰차 블랙박스 화면)

■ "터널 안에 사람이 걷고 있어요."

어둠이 짙게 깔린 충북 보은군 내북면의 해발 250m 산속.

검은 긴 패딩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여성이 터널 안을 무작정 걷습니다. 사람은커녕 차도 찾아보기 힘든 긴 터널 속을 홀로 걸어갑니다.

지난달 11일, 자정이 넘은 시각.

충북 보은군 봉계터널 관리사무소 직원 유창수 씨는 CCTV 화면에 잡힌 검은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은 물론 차 조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야심한 밤에 누군가 터널 안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CCTV를 살피던 유 씨는 놀란 마음에 경찰에 신고부터 했습니다.

"경찰서죠? 여기 봉계터널 관리사무소인데요. 터널 안에 사람이 걷고 있어요."

혹시나 사고가 날까 걱정했던 유 씨는 전화를 끊은 뒤에도 이 여성의 행동을 계속 살폈습니다. 비틀거리다 난간을 잡으면서도 아주 천천히, 그리고 계속 걷는 모습이 이상했다고 말합니다.

터널은 총 길이만 1.6km. 평소 비상대피로를 자주 걷던 경험에 비춰볼 때 이 정도 속도면 터널 반대편까지 2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판단했습니다.

6분 뒤, 충북 보은경찰서 내북파출소 우희진 경위가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순찰차는 한참을 달려 터널 중간쯤에서 멈춰 섰습니다.

유 씨가 신고한 대로 검은 긴 패딩을 입은 여성은 아주 느린 속도로 터널 안을 걷고 있었습니다. 터널 안 대피구간에 차를 세우고, 경찰이 차에서 내려 이 여성에게 다가갔습니다.

- 경찰 :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이 아니에요. 위험하니 차에 타세요."
- 여성 : "그냥 걸어가는데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냥 가던 길 가세요."


북한이탈주민 여성이 실종된 지 12일 만에 경찰에 구조됐다. (순찰차 블랙박스 화면)


■ 경계심 가득했던 '북한이탈주민'… "아들이 보고 싶어서"

완강히 거절하는 여성을 두고 설득하길 수차례. 결국, 신원 미상의 여성을 순찰차에 태우고 터널을 빠져나온 우 경위는 일단 이 여성을 안심시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뒷자리에 탄 여성은 경찰을 경계하면서도 힘겹게 입을 떼 말합니다.

"경찰에 잡혀가면 못 나오는 거 아닙니까?"

경찰서로 향하면서 조금씩 입을 뗀 50대 A 씨가 들려준 이야기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저는 사실 북한에서 왔습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몇 년 전 세상을 떠나 충북 음성 추모공원에 안치했습니다.

명절도 다가오고 아들이 정말 보고 싶어서 추모공원에 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추모공원이 있는 충북 음성에서 보은까지는 차로 달려도 70km가 넘고, 직선거리 만으로도 50km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 1월 31일, 아들을 보러 나섰다가 길을 잃은 겁니다.

경찰은 A 씨가 탈북 전후, 경계심 속에 살았던 탓에 주변 낯선 이들에게 섣불리 도움을 청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A 씨는 경찰에게 " 전 남편과의 아들이어서 현 남편에게 연락하지도 못하고 무작정 걷다 보니 보은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일일 최저기온이 영하 7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밤낮으로 걸었던 겁니다.

비틀거리며 터널 안을 걷고 경찰을 경계했던 A 씨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북한이탈주민이 실종 담당 경찰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다. (충북 보은경찰서 CCTV)


■ "걷고, 또 걸으면서 벼 이삭, 옥수수알로 끼니 때워"

충북 보은경찰서에 도착한 A 씨는 초췌한 모습으로 배가 고파 보였습니다.

거리를 배회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논에 떨어진 벼 이삭이나 옥수수알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개울에서 물을 먹으며 걷고 또 걸었다고 했습니다.

새벽 시간이라 음식점도 모두 문을 닫은 상황. 여성청소년수사팀 정창진 경사는 급한 대로 컵라면에 물을 붓고 간식으로 챙겨둔 과자를 건넸습니다. A 씨는 컵라면을 먹으면서도 위축된 상태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정 경사가 이 여성의 주민등록번호를 조회해 신원을 확인해보니 지난달 3일, 경기도 안성에서 실종 신고가 접수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다행히 남편과도 연락이 닿았습니다. 남편은 열흘가량 아내를 찾아다니면서 경기 안성에서 충북 청주까지 이동한 상태였습니다.

경찰은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고 A 씨가 집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해 충북 보은까지 찾아온 남편에게 인계해줬다"고 밝혔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구조해준 출동 경찰, 그리고 A 씨를 보호해준 경찰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화면제공: 충북 보은경찰서, 봉계터널 관리사무소/ 영상편집: 오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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