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미얀마 군 ‘탓마도’, 그 살육의 역사

입력 2021.03.14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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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탓마도, 그 살육의 역사

1988년 8월, 네윈 대통령이 민주화 시위대에 밝힌 경고는 TV로 생중계됐다. "경고합니다. 우리 군이 소집되면 발포할 것입니다. 우리 군은 결코 총을 허공에 쏘는 일은 없습니다". 8월 8일, 미얀마 군은 결국 수도 양곤에서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를 시작했다. 며칠새 천여 명의 미얀마 시민들이 죽었다.

88년 8월 8일의 민주화시위를 미얀마인들은 ‘8888항쟁’이라고 부른다.88년 8월 8일의 민주화시위를 미얀마인들은 ‘8888항쟁’이라고 부른다.

그 미얀마 군대의 이름이 '탓마도(Tatmadaw)'다. 네윈 대통령도 군 출신이였다. 쿠데타로 집권해 26년 군사독재를 펼치다 결국 88년 민주화시위로 쫓겨났다. 하지만 한달쯤 뒤에 이른바 '신군부'가 나타났다. 9월 18일 쏘 마웅 국방부장관이 또 쿠데타를 일으켰다. 다시 군사독재가 시작됐다. 탓마도는 이렇게 미얀마를 지배한다. 독립 이후 58년을 집권했다.

그 탓마도는 70년 전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위해 아웅산 장군이 창설했다. 지난 2월 1일 미얀마 군은 총선으로 집권한 아웅산의 딸을 가두고 쿠데타로 또 집권했다. 이들은 실전에 강하다. 살육과 성폭행, 약탈의 전문가 집단이다.

미얀마는 70%의 버마인(불교)과 30%의 140여 개 다민족으로 구성된 연방국가다. 소수민족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탓마도는 이 교전에 익숙한 군대다. 최근까지도 북부 카친족(기독교)과 교전이 이어졌다. 2017년 탓마도가 자행한 로힝야족(이슬람교) 학살도 같은 맥락이다. 9천명 가까운 로힝야족을 살해했다. 수많은 성폭행이 이어졌다. UN등 국제사회는 훗날 이 전투를 '살육'이라고 규정했다.

그 군대(77여단)가 지금 양곤과 만달레이에 주둔중이다.

만달레이에 주둔중인 77여단 군인들, 77여단은 2017년 로힝야족을 잔인하게 학살한 특수부대다.만달레이에 주둔중인 77여단 군인들, 77여단은 2017년 로힝야족을 잔인하게 학살한 특수부대다.

2019년 4월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 반군과의 교전을 앞둔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차를 마시던 우 테인 아웅의 집에 쳐들어와 부대와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20여 명의 마을 남자들이 축출됐다. 접경지역 지뢰 매설지역에 도착했다. 군은 마을남자들에게 100피트 전방으로 걸어가라고 명령했다. 거부한 몇몇 남성들이 집단 폭행을 당했다. 결국 한명이 지뢰를 밟았다. 몸이 산산조각났다. 당시 눈을 잃은 아웅(65)은 "죽을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지뢰밭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지뢰탐지기로 썼습니다"라고 말했다.

-방콕 포스트 보도중에서


이 어둠의 군대는 교전과 시민 살해, 성폭행, 방화 그리고 약탈의 매뉴얼을 배웠다. 살아남은 소수민족 소년들은 짐꾼으로 끌려간다(4세기전 아프리카 아이보리 코스트의 노예상인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10월 라카인 주, 람바르빌 마을에서 로힝야족인 샤아둘 아민은 낚시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쳐들어온 탓마도들이 14명의 마을 남성들을 체포했다. 지역 반군과 교전을 앞두고 군인들은 이들 남성들을 앞장 세웠다. 교전이 시작됐고 10살과 18살 청년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군인들은 두명의 시신을 주민들에게 묻으라고 지시하고 떠났다.

미얀마 북부의 소수민족 로힝야족(이슬람교),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할 무렵 로힝야족은 영국군에 편입되면서 미얀마(버마족/불교)인들의 미움을 샀다. 그 미움이 로힝야족 학살의 배경이다.미얀마 북부의 소수민족 로힝야족(이슬람교),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할 무렵 로힝야족은 영국군에 편입되면서 미얀마(버마족/불교)인들의 미움을 샀다. 그 미움이 로힝야족 학살의 배경이다.

라카인 주와 카친주, 샨주의 수많은 소수민족 여성들도 이 군대의 잔혹함을 기억한다. 로힝야족인 오오 하이 윈(37)은 마을을 찾아온 3명의 군인들에게 집단 강간당했다. 그녀는 그 사실이 알려지고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녀는 이 사실을 고발했고, 가해군인들은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례는 하지만 탓마도의 나라에서 매우 보기 드문 승리일 뿐이다.

탓마도는 미얀마에서 권력을 뺏긴 적이 없다. 지난 9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 치 진영에게 크게 패배했지만 역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2015년 다시 총선에서 크게 패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그때도 권력을 분점했다.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던 지난 2008년 미얀마군은 헌법을 고쳤다. 군에게 25%의 의석이 자동으로 주어진다. 개헌을 위해서는 의원 75%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군이 동의하지 않으면 결국 개헌이 불가능하다. 이 헌법을 기초로 2016년 아웅산 수 치의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군과 권력 분점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미얀마국민은 아웅산 수 치에게 83%의 지지를 보냈다. 완전히 군 권력을 떼어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렇게 재집권하는 문민 정부가 출범하는 2월 1일. 군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얀마의 시계는 다시 1988년으로 돌아갔다.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고, 탓마도는 다시 시민들에게 발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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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미얀마 군 ‘탓마도’, 그 살육의 역사
    • 입력 2021-03-14 08:02:45
    특파원 리포트
미얀마 탓마도, 그 살육의 역사

1988년 8월, 네윈 대통령이 민주화 시위대에 밝힌 경고는 TV로 생중계됐다. "경고합니다. 우리 군이 소집되면 발포할 것입니다. 우리 군은 결코 총을 허공에 쏘는 일은 없습니다". 8월 8일, 미얀마 군은 결국 수도 양곤에서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를 시작했다. 며칠새 천여 명의 미얀마 시민들이 죽었다.

88년 8월 8일의 민주화시위를 미얀마인들은 ‘8888항쟁’이라고 부른다.
그 미얀마 군대의 이름이 '탓마도(Tatmadaw)'다. 네윈 대통령도 군 출신이였다. 쿠데타로 집권해 26년 군사독재를 펼치다 결국 88년 민주화시위로 쫓겨났다. 하지만 한달쯤 뒤에 이른바 '신군부'가 나타났다. 9월 18일 쏘 마웅 국방부장관이 또 쿠데타를 일으켰다. 다시 군사독재가 시작됐다. 탓마도는 이렇게 미얀마를 지배한다. 독립 이후 58년을 집권했다.

그 탓마도는 70년 전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위해 아웅산 장군이 창설했다. 지난 2월 1일 미얀마 군은 총선으로 집권한 아웅산의 딸을 가두고 쿠데타로 또 집권했다. 이들은 실전에 강하다. 살육과 성폭행, 약탈의 전문가 집단이다.

미얀마는 70%의 버마인(불교)과 30%의 140여 개 다민족으로 구성된 연방국가다. 소수민족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탓마도는 이 교전에 익숙한 군대다. 최근까지도 북부 카친족(기독교)과 교전이 이어졌다. 2017년 탓마도가 자행한 로힝야족(이슬람교) 학살도 같은 맥락이다. 9천명 가까운 로힝야족을 살해했다. 수많은 성폭행이 이어졌다. UN등 국제사회는 훗날 이 전투를 '살육'이라고 규정했다.

그 군대(77여단)가 지금 양곤과 만달레이에 주둔중이다.

만달레이에 주둔중인 77여단 군인들, 77여단은 2017년 로힝야족을 잔인하게 학살한 특수부대다.
2019년 4월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 반군과의 교전을 앞둔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차를 마시던 우 테인 아웅의 집에 쳐들어와 부대와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20여 명의 마을 남자들이 축출됐다. 접경지역 지뢰 매설지역에 도착했다. 군은 마을남자들에게 100피트 전방으로 걸어가라고 명령했다. 거부한 몇몇 남성들이 집단 폭행을 당했다. 결국 한명이 지뢰를 밟았다. 몸이 산산조각났다. 당시 눈을 잃은 아웅(65)은 "죽을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지뢰밭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지뢰탐지기로 썼습니다"라고 말했다.

-방콕 포스트 보도중에서


이 어둠의 군대는 교전과 시민 살해, 성폭행, 방화 그리고 약탈의 매뉴얼을 배웠다. 살아남은 소수민족 소년들은 짐꾼으로 끌려간다(4세기전 아프리카 아이보리 코스트의 노예상인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10월 라카인 주, 람바르빌 마을에서 로힝야족인 샤아둘 아민은 낚시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쳐들어온 탓마도들이 14명의 마을 남성들을 체포했다. 지역 반군과 교전을 앞두고 군인들은 이들 남성들을 앞장 세웠다. 교전이 시작됐고 10살과 18살 청년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군인들은 두명의 시신을 주민들에게 묻으라고 지시하고 떠났다.

미얀마 북부의 소수민족 로힝야족(이슬람교),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할 무렵 로힝야족은 영국군에 편입되면서 미얀마(버마족/불교)인들의 미움을 샀다. 그 미움이 로힝야족 학살의 배경이다.
라카인 주와 카친주, 샨주의 수많은 소수민족 여성들도 이 군대의 잔혹함을 기억한다. 로힝야족인 오오 하이 윈(37)은 마을을 찾아온 3명의 군인들에게 집단 강간당했다. 그녀는 그 사실이 알려지고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녀는 이 사실을 고발했고, 가해군인들은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례는 하지만 탓마도의 나라에서 매우 보기 드문 승리일 뿐이다.

탓마도는 미얀마에서 권력을 뺏긴 적이 없다. 지난 9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 치 진영에게 크게 패배했지만 역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2015년 다시 총선에서 크게 패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그때도 권력을 분점했다.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던 지난 2008년 미얀마군은 헌법을 고쳤다. 군에게 25%의 의석이 자동으로 주어진다. 개헌을 위해서는 의원 75%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군이 동의하지 않으면 결국 개헌이 불가능하다. 이 헌법을 기초로 2016년 아웅산 수 치의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군과 권력 분점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미얀마국민은 아웅산 수 치에게 83%의 지지를 보냈다. 완전히 군 권력을 떼어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렇게 재집권하는 문민 정부가 출범하는 2월 1일. 군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얀마의 시계는 다시 1988년으로 돌아갔다.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고, 탓마도는 다시 시민들에게 발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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