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종파·외세…끝 모를 비극, 시리아 내전 10년
입력 2021.03.18 (07:00)
수정 2021.03.1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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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아 인구의 12%, 이슬람 시아 분파 '알라위파'
"천국에는 와인으로 된 강이 흐른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물론 천국의 와인은 이 세상의 와인과는 달리 사람을 취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어쨌든 술 마시는 것을 금기시하는 이슬람 경전에 와인 이야기가 나오는 건 의외인데, 알고 보면 이슬람 종파 중에 음주를 허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슬람 시아파의 소수파인 '알라위파'가 그렇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알라위파의 모습
알라위파는 종교의식 때 포도주를 사용하고, 삼위일체와 유사한 교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알라위파를 십자군 전쟁 당시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교로 보기도 합니다.
알라위파가 많이 살고 있는 곳은 시리아인데, 그렇다고 해도 인구 대비 12%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시리아를 통치하는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층은 알라위파입니다.
■ 프랑스 지배 거치며 시리아 집권 세력으로 성장
과거 알라위파는 시리아에서 천대의 대상이었습니다. 시리아 인구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이슬람 수니파가 보기에 술을 마시는 알라위파는 존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알라위파들은 변변한 직업도 갖기 어려웠고, 교육을 제대로 못 받으니 사회적 지위는 계속 낮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지배를 거치는 동안 상황은 달라집니다. 시리아가 속해 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차 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패전했습니다. 이후 1차대전에서 승전한 연합국은 오스만투르크를 나눠서 다스리게 되는데, 이때 시리아는 영국에 이어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프랑스로서는 시리아의 다수인 수니파를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구사한 것인데, 이 때 알라위파가 특히 군부에서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이어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시리아는 1970년 하페즈 알 아사드가 집권하면서 알라위파 전성시대를 맞이합니다.
1970년 시리아 대통령이 된 하페즈 알 아사드
■ 수니파의 반발…민주화 혁명 '아랍의 봄' 거쳐 내전으로
하페즈 알 아사드 정권은 이슬람 수니파의 세속화, 즉 탈종교화를 유도하며 유화정책을 펴기도 했지만, 수니파의 강경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무슬림 형제단은 1980년 수류탄을 이용해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을 암살하려했고, 하페즈 알 아사드는 군대를 동원해 무슬림 형제단을 강경 진압했습니다. 수감 중인 수니 강경세력 천여 명이 즉결처분되기도 했고, 1982년 하마에서는 시리아 정부군과 무슬림 형제단간 전투가 벌어져 무수한 시민들이 희생됐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하페즈 알 아사드의 독재 체제는 강화됐고, 2000년에는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습니다. 수니파에 대한 탄압은 더 강화됐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시리아 대통령이 된 바샤르 알 아사드
그러던 중 2011년 '아랍의 봄'이 시작됐습니다. 아프리카 북부 튀니지에서 벤 알리 대통령이 민주화 혁명으로 축출되자 그해 3월 시리아 남부 다라의 10대 학생들이 학교 담에 "다음은 당신(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 차례"라는 낙서를 했습니다. 이를 본 시리아 경찰은 10대들을 체포해 고문을 자행했고, 이에 분노한 시리아 시민들이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2011년 시리아 홈즈 인근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
알 아사드 정권이 이에 발포하며 강경 진압에 나서자 수니파는 무장봉기에 들어갔고 시리아 내전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시리아 정부군은 2013년 이후 사린가스 등 화학무기와 무차별 살상무기인 통폭탄까지 사용하며 반군 제압에 나서 국제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화학무기에 노출돼 치료를 받고 있는 시리아 어린이들. 2017년.
■ 미·러·터키·이란… 외세 대리전장이 된 시리아
그런데 시리아 내전 양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가 시리아 혼란을 틈타 발호했고, 시리아 내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IS 세력의 확장을 막는다는 명분 등으로 내전에 개입했고, 터키는 자국내 분리주의 세력과 연계돼 있는 쿠르드족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는 달랐습니다. 미국은 시리아 정부의 반인권적 화학무기 사용 등을 이유로 반군을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시리아가 친미 정부로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알 아사드 정권은 구소련 시절부터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하며 공습 등을 이어갔습니다.
여기에 인근 국가 이란은 시아파 맹주 국가로서, 시아파 분파인 알라위파가 수니파에게 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시리아 정부를 돕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시리아 내전은 정부군과 반정부군 간 대립에 쿠르드족과 IS, 미국과 러시아, 터키와 이란까지 가세하며 전선 조차 그을 수 없는 혼란 양상으로 진행됐습니다.
지난해 시리아 카미실리 인근에서 순찰 도중 조우한 미군과 러시아군
■ 내전 10년… 민간인 희생 38만여 명, 난민 1,200만 명
2015년 터키의 한 해변에서 3살 어린이 아일란 쿠르디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전쟁을 피해 시리아를 떠나 그리스로 가려다 배가 뒤집혀 목숨을 잃었습니다. 두 달 여 뒤에는 4살 여자 어린이 세나도 똑같은 사고로 희생됐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시리아 난민들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인권단체들은 10년에 걸친 내전으로 시리아 인구의 절반이 넘는 1,200만 명이 난민이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전 기간 희생된 민간인 수는 38만 명이 넘습니다.
지금도 시리아에선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 IS 잔당의 테러 등으로 인한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향후 10년이 과거의 10년과 달라질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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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03-18 07:00:55
- 수정2021-03-18 14:34:10
■ 시리아 인구의 12%, 이슬람 시아 분파 '알라위파'
"천국에는 와인으로 된 강이 흐른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물론 천국의 와인은 이 세상의 와인과는 달리 사람을 취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어쨌든 술 마시는 것을 금기시하는 이슬람 경전에 와인 이야기가 나오는 건 의외인데, 알고 보면 이슬람 종파 중에 음주를 허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슬람 시아파의 소수파인 '알라위파'가 그렇습니다.
알라위파는 종교의식 때 포도주를 사용하고, 삼위일체와 유사한 교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알라위파를 십자군 전쟁 당시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교로 보기도 합니다.
알라위파가 많이 살고 있는 곳은 시리아인데, 그렇다고 해도 인구 대비 12%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시리아를 통치하는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층은 알라위파입니다.
■ 프랑스 지배 거치며 시리아 집권 세력으로 성장
과거 알라위파는 시리아에서 천대의 대상이었습니다. 시리아 인구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이슬람 수니파가 보기에 술을 마시는 알라위파는 존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알라위파들은 변변한 직업도 갖기 어려웠고, 교육을 제대로 못 받으니 사회적 지위는 계속 낮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지배를 거치는 동안 상황은 달라집니다. 시리아가 속해 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차 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패전했습니다. 이후 1차대전에서 승전한 연합국은 오스만투르크를 나눠서 다스리게 되는데, 이때 시리아는 영국에 이어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프랑스로서는 시리아의 다수인 수니파를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구사한 것인데, 이 때 알라위파가 특히 군부에서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이어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시리아는 1970년 하페즈 알 아사드가 집권하면서 알라위파 전성시대를 맞이합니다.
■ 수니파의 반발…민주화 혁명 '아랍의 봄' 거쳐 내전으로
하페즈 알 아사드 정권은 이슬람 수니파의 세속화, 즉 탈종교화를 유도하며 유화정책을 펴기도 했지만, 수니파의 강경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무슬림 형제단은 1980년 수류탄을 이용해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을 암살하려했고, 하페즈 알 아사드는 군대를 동원해 무슬림 형제단을 강경 진압했습니다. 수감 중인 수니 강경세력 천여 명이 즉결처분되기도 했고, 1982년 하마에서는 시리아 정부군과 무슬림 형제단간 전투가 벌어져 무수한 시민들이 희생됐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하페즈 알 아사드의 독재 체제는 강화됐고, 2000년에는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습니다. 수니파에 대한 탄압은 더 강화됐습니다.
그러던 중 2011년 '아랍의 봄'이 시작됐습니다. 아프리카 북부 튀니지에서 벤 알리 대통령이 민주화 혁명으로 축출되자 그해 3월 시리아 남부 다라의 10대 학생들이 학교 담에 "다음은 당신(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 차례"라는 낙서를 했습니다. 이를 본 시리아 경찰은 10대들을 체포해 고문을 자행했고, 이에 분노한 시리아 시민들이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알 아사드 정권이 이에 발포하며 강경 진압에 나서자 수니파는 무장봉기에 들어갔고 시리아 내전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시리아 정부군은 2013년 이후 사린가스 등 화학무기와 무차별 살상무기인 통폭탄까지 사용하며 반군 제압에 나서 국제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 미·러·터키·이란… 외세 대리전장이 된 시리아
그런데 시리아 내전 양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가 시리아 혼란을 틈타 발호했고, 시리아 내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IS 세력의 확장을 막는다는 명분 등으로 내전에 개입했고, 터키는 자국내 분리주의 세력과 연계돼 있는 쿠르드족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는 달랐습니다. 미국은 시리아 정부의 반인권적 화학무기 사용 등을 이유로 반군을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시리아가 친미 정부로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알 아사드 정권은 구소련 시절부터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하며 공습 등을 이어갔습니다.
여기에 인근 국가 이란은 시아파 맹주 국가로서, 시아파 분파인 알라위파가 수니파에게 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시리아 정부를 돕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시리아 내전은 정부군과 반정부군 간 대립에 쿠르드족과 IS, 미국과 러시아, 터키와 이란까지 가세하며 전선 조차 그을 수 없는 혼란 양상으로 진행됐습니다.
■ 내전 10년… 민간인 희생 38만여 명, 난민 1,200만 명
2015년 터키의 한 해변에서 3살 어린이 아일란 쿠르디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전쟁을 피해 시리아를 떠나 그리스로 가려다 배가 뒤집혀 목숨을 잃었습니다. 두 달 여 뒤에는 4살 여자 어린이 세나도 똑같은 사고로 희생됐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시리아 난민들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인권단체들은 10년에 걸친 내전으로 시리아 인구의 절반이 넘는 1,200만 명이 난민이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전 기간 희생된 민간인 수는 38만 명이 넘습니다.
지금도 시리아에선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 IS 잔당의 테러 등으로 인한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향후 10년이 과거의 10년과 달라질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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