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K] “나는 죄수의 딸입니다”

입력 2021.03.19 (07:00) 수정 2021.03.1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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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수용자 자녀' - 낯선 말입니다. 부모가 구속된 후 남겨진 아이들을 뜻합니다. 이 아이들을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존재조차 모르고 살지는 았았을까요?

KBS 탐사보도부는 교정시설에 수감된 수용자들에게 미성년 자녀가 있는지, 있다면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찾아 나섰습니다.

설문조사를 통해 이 아이들의 인권 실태와 우리 복지 체계에 사각지대는 없는지 알아봤습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아이들 이름은 가명입니다.)


열아홉 살 은미는 임신 중이었다. 아이를 갖고서 살고 싶어졌다고 했다. 목과 언뜻 보이는 손목에는 뚜렷한 흉터가 있었다.

은미는 중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일주일에 6일, 하루 열두 시간씩 일했다. 의무교육 제도가 있고 주 52시간 근무제도 있지만 은미는 일만 했다.

불법 업소도 가리지 않았다. 뒤늦게 벗어나려고 했더니 업주는 '미성년자가 일했다고 신고한다'고 되려 겁박했다.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은미는 "거기는 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말해줄 어른 한 명만 주변에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은미에게 열심히 일해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냐고 묻자, "그냥 살았다"고 했다. 월세를 내고 다음날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신없이 일하지 않으면 '그 사람처럼 될까 봐' 두려웠다고 했다. '그 사람'은, 아빠였다.

은미의 아빠는 교도소에 자주 갔다. 함께 살 때는 은미가 벌어온 돈을 가져갔고, 교도소에 들어가면 영치금을 보내달라 했다.

은미는 인터뷰에 응하면서 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와 함께 만나는 건 싫다"고 했다.

은미처럼, 엄마가 구속된 뒤 일만 하며 10대를 보냈다는 또 다른 열아홉 살 민주. 심리상담소에 갔더니 "넌 힘든 게 아니다. 네가 네 상황을 소설처럼 극화시켜서 그 안에서 힘들다고 여기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민주는 "남들에게 소설 같은 이야기가 내겐 현실이었다"고 말했다.


부모 중 한 명 이상이 구속된 미성년자는 최소 1만 명이 있다. 정확한 숫자가 아니다. 2017년 인권위가 수용자 자녀 규모를 처음 조사했는데 5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됐다.

2019년 법무부가 교정시설 입소자들에게 조사한 바로는 2만여 명이었다. 지난해 말 같은 조사에서는 1만 명이 조금 안 된다고 나왔다. 수치가 들쑥날쑥한 건 제대로 집계되지 않아서다.

법무부 담당자는 "자녀들이 혹시 '범죄자 가족'으로 낙인 찍힐까 봐, 자녀가 없다고 대답하는 수용자가 많다"고 설명했다.


KBS 탐사보도부가 법무부와 함께 수용자 3,080명을 설문 조사했다.

미성년 자녀가 있는 수용자 중 약 18%는 '자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른다'고 했다. 구속 뒤 자녀와 접견해본 적이 없는 경우가 72%, 자녀가 수감 사실을 모른다는 경우도 62%였다.

수감된 부모들은 자녀의 생계 지원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대답했고, 가족이 종교단체나 봉사단체, 관련 단체 지원을 받았다는 경우는 각각 1%대에 그쳤다.

이 아이들을 누가 찾아서 돌봐야 할까. 아동복지법은 부모의 부재로 아동이 방치될 상황이면, 지자체가 파악하고 보호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센터에 물어보니 "부모가 구속돼 남겨진 아동이 있는지를 우리가 알 수는 없다"고 했다. "아동이 직접 찾아와서 상담 요청을 하고 재산이 없다는 증빙을 내면 임시 현금 지원은 가능하다"고 했다.

아동이 생계가 어려움을 입증하는 소득 서류를 챙겨 '엄마가 구속됐습니다' 하고 보호처를 찾아다녀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에서는 경찰이 성인을 체포해 구속할 경우 그 자리에 자녀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캘리포니아 주는 체포 현장에 아동보호전문가가 함께한다. 남은 자녀를 보살필 보호자가 있는지 조사하고, 없으면 시설에서 보호한다.

학대 피해 아동을 즉시 보호하는 제도처럼 운영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난 아이들은 눈앞에서 부모가 수갑을 찼다고 했다. 그때 아무도 '넌 함께 지낼 보호자가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해 말 한정애 민주당 의원이 수용자 자녀 인권 보호와 지원 강화 규정을 담은 법안을 냈다. 하지만 국회는 아무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

법무보호복지공단 하준영 계장은 "수용자 자녀 지원은 홍보를 안 하는 게 오히려 도와주는 것"이라고 했다. 지원하는 게 알려지면 '왜 범죄자의 아이를 도와야 하느냐'는 질문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피가 어디 가겠냐', '보고 배운 게 범죄 아니겠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수용자 자녀 지원단체 '세진회'의 이호진 팀장은 "아이들을 돕는 건 범죄자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범죄는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자녀들은 죄지은 아이들이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동 인권과 관련한 호소에 공감할 수 없다면 '우리 사회가 안전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해달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박준영 변호사는 "자녀들이 사회의 보호를 받아 잘 지내고 있으면, 재소자들이 책임감을 갖게 되고 재범률도 낮아진다는 통계가 있다"면서 "자녀들이 해체된 가정 속에서 계속 살아가게 하는 것은 범죄율을 높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라고 말했다.

은미는 출산하고 나면 미용사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돈을 모아 할머니께 용돈을 드리고, 좀 더 모아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었던 아빠 이야기를 취재진에게 털어놓은 이유는 단 한 가지라고 했다. "나처럼 사는 애들이 또 없길 바라서"였다.

오늘(19일) KBS 1TV <뉴스9>,
일요일(21일) 21시 40분 KBS 1TV <시사기획 창-낙인, 죄수의 딸>에서 방송 예정입니다.

/ 하누리 기자 ha@kbs.co.kr [데이터 분석 : KBS 탐사보도부 데이터팀 이민지, 정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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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사K] “나는 죄수의 딸입니다”
    • 입력 2021-03-19 07:00:11
    • 수정2021-03-19 13:43:28
    탐사K
<strong>'수용자 자녀' </strong>- 낯선 말입니다. 부모가 구속된 후 남겨진 아이들을 뜻합니다. 이 아이들을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존재조차 모르고 살지는 았았을까요?<br /><br />KBS 탐사보도부는 교정시설에 수감된 수용자들에게 미성년 자녀가 있는지, 있다면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찾아 나섰습니다. <br /><br />설문조사를 통해 이 아이들의 인권 실태와 우리 복지 체계에 사각지대는 없는지 알아봤습니다. <em>(기사에 등장하는 아이들 이름은 가명입니다.)</em>

열아홉 살 은미는 임신 중이었다. 아이를 갖고서 살고 싶어졌다고 했다. 목과 언뜻 보이는 손목에는 뚜렷한 흉터가 있었다.

은미는 중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일주일에 6일, 하루 열두 시간씩 일했다. 의무교육 제도가 있고 주 52시간 근무제도 있지만 은미는 일만 했다.

불법 업소도 가리지 않았다. 뒤늦게 벗어나려고 했더니 업주는 '미성년자가 일했다고 신고한다'고 되려 겁박했다.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은미는 "거기는 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말해줄 어른 한 명만 주변에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은미에게 열심히 일해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냐고 묻자, "그냥 살았다"고 했다. 월세를 내고 다음날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신없이 일하지 않으면 '그 사람처럼 될까 봐' 두려웠다고 했다. '그 사람'은, 아빠였다.

은미의 아빠는 교도소에 자주 갔다. 함께 살 때는 은미가 벌어온 돈을 가져갔고, 교도소에 들어가면 영치금을 보내달라 했다.

은미는 인터뷰에 응하면서 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와 함께 만나는 건 싫다"고 했다.

은미처럼, 엄마가 구속된 뒤 일만 하며 10대를 보냈다는 또 다른 열아홉 살 민주. 심리상담소에 갔더니 "넌 힘든 게 아니다. 네가 네 상황을 소설처럼 극화시켜서 그 안에서 힘들다고 여기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민주는 "남들에게 소설 같은 이야기가 내겐 현실이었다"고 말했다.


부모 중 한 명 이상이 구속된 미성년자는 최소 1만 명이 있다. 정확한 숫자가 아니다. 2017년 인권위가 수용자 자녀 규모를 처음 조사했는데 5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됐다.

2019년 법무부가 교정시설 입소자들에게 조사한 바로는 2만여 명이었다. 지난해 말 같은 조사에서는 1만 명이 조금 안 된다고 나왔다. 수치가 들쑥날쑥한 건 제대로 집계되지 않아서다.

법무부 담당자는 "자녀들이 혹시 '범죄자 가족'으로 낙인 찍힐까 봐, 자녀가 없다고 대답하는 수용자가 많다"고 설명했다.


KBS 탐사보도부가 법무부와 함께 수용자 3,080명을 설문 조사했다.

미성년 자녀가 있는 수용자 중 약 18%는 '자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른다'고 했다. 구속 뒤 자녀와 접견해본 적이 없는 경우가 72%, 자녀가 수감 사실을 모른다는 경우도 62%였다.

수감된 부모들은 자녀의 생계 지원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대답했고, 가족이 종교단체나 봉사단체, 관련 단체 지원을 받았다는 경우는 각각 1%대에 그쳤다.

이 아이들을 누가 찾아서 돌봐야 할까. 아동복지법은 부모의 부재로 아동이 방치될 상황이면, 지자체가 파악하고 보호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센터에 물어보니 "부모가 구속돼 남겨진 아동이 있는지를 우리가 알 수는 없다"고 했다. "아동이 직접 찾아와서 상담 요청을 하고 재산이 없다는 증빙을 내면 임시 현금 지원은 가능하다"고 했다.

아동이 생계가 어려움을 입증하는 소득 서류를 챙겨 '엄마가 구속됐습니다' 하고 보호처를 찾아다녀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에서는 경찰이 성인을 체포해 구속할 경우 그 자리에 자녀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캘리포니아 주는 체포 현장에 아동보호전문가가 함께한다. 남은 자녀를 보살필 보호자가 있는지 조사하고, 없으면 시설에서 보호한다.

학대 피해 아동을 즉시 보호하는 제도처럼 운영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난 아이들은 눈앞에서 부모가 수갑을 찼다고 했다. 그때 아무도 '넌 함께 지낼 보호자가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해 말 한정애 민주당 의원이 수용자 자녀 인권 보호와 지원 강화 규정을 담은 법안을 냈다. 하지만 국회는 아무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

법무보호복지공단 하준영 계장은 "수용자 자녀 지원은 홍보를 안 하는 게 오히려 도와주는 것"이라고 했다. 지원하는 게 알려지면 '왜 범죄자의 아이를 도와야 하느냐'는 질문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피가 어디 가겠냐', '보고 배운 게 범죄 아니겠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수용자 자녀 지원단체 '세진회'의 이호진 팀장은 "아이들을 돕는 건 범죄자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범죄는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자녀들은 죄지은 아이들이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동 인권과 관련한 호소에 공감할 수 없다면 '우리 사회가 안전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해달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박준영 변호사는 "자녀들이 사회의 보호를 받아 잘 지내고 있으면, 재소자들이 책임감을 갖게 되고 재범률도 낮아진다는 통계가 있다"면서 "자녀들이 해체된 가정 속에서 계속 살아가게 하는 것은 범죄율을 높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라고 말했다.

은미는 출산하고 나면 미용사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돈을 모아 할머니께 용돈을 드리고, 좀 더 모아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었던 아빠 이야기를 취재진에게 털어놓은 이유는 단 한 가지라고 했다. "나처럼 사는 애들이 또 없길 바라서"였다.

오늘(19일) KBS 1TV <뉴스9>,
일요일(21일) 21시 40분 KBS 1TV <시사기획 창-낙인, 죄수의 딸>에서 방송 예정입니다.

/ 하누리 기자 ha@kbs.co.kr [데이터 분석 : KBS 탐사보도부 데이터팀 이민지, 정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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