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기괴한가요?…80년대 뉴욕의 ‘빨간맛’

입력 2021.03.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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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보신 그림(위) 어떠신가요? 물이 줄줄 흐르고, 창문은 죄다 깨져 있는 누추한 방. 물건들은 방 안을 떠다닙니다. 남성의 입에는 왜 칼이 꽂혀 있고, 어깨 위 시신은 뭘 의미하는 걸까요? 의문투성이인 이 그림의 첫인상은 "기괴하다", "어둡다", 두 번째 든 생각은 "방송 뉴스로는 안 되겠는데?" 였습니다. 마약에 취한 환각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는 전시 기획자의 설명을 듣고 나니 더 그랬죠.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작가 릭 프롤의 <세인트 에고니 Saint Agony(1983년)>입니다.

릭 프롤(Rick Prol)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릭 프롤(Rick Prol)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

우리에겐 낯선 작가 릭 프롤(1958년~)은 1980년대 가난한 예술가들이 몰려든 미국 뉴욕 맨해튼 남동쪽 '이스트빌리지'에서 활동한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이스트빌리지 미술계라고 하면 장 미셸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 같은 작가들이 유명하죠. 바스키아의 오랜 친구이자 마지막 어시스턴트가 바로 릭 프롤입니다. 80년대 이스트빌리지 미술계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한 생존 작가이기도 합니다.

1980년대 뉴욕은 높은 실직률과 범죄율로 붕괴 직전의 황폐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이스트빌리지 쪽은 마약 소굴이었고, 폐허가 된 건물들이 많았습니다. 임대가 안 되자 건물주들이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스스로 건물에 불을 지르면서 항상 불길에 휩싸인 동네였죠. 릭 프롤은 이런 광경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앞서 보신 그림 <세인트 에고니>는 마약에 찌들고, 궁핍한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80년대 상황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1980년대 뉴욕의 어두운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릭 프롤의 작품 14점이 우리나라를 찾았습니다. 전시가 열리는 리안갤러리의 안혜령 대표는 "왜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만 유명한지 의문이었다. 릭 프롤은 최근 재조명되기 시작했다"며, 국내 첫 <릭 프롤 개인전>을 기획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기이한 회화의 대가로 알려진 릭 프롤의 작품 몇 점을 소개합니다.

S.O.S(1985년)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S.O.S(1985년)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

캔버스의 가로, 세로 길이가 각각 4m, 3m에 이르는 이 대형 그림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암울하고 처참해 보입니다. 괴기스러운 표정의 한 여인이 잘린 머리를 들고, 파괴된 브루클린 다리가 있는 허드슨 강을 자전거로 건너고 있습니다. 냉전시대 핵 위협이 있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의 험난한 세상을 묘사했습니다. 전쟁의 불안감에서 벗어나고픈 여인의 절박함이 제목에서부터 느껴집니다.

(왼)Bandage(1982년) (오)Simple Art(1983년)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왼)Bandage(1982년) (오)Simple Art(1983년)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

분노와 폭력, 고통은 릭 프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감정입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한 소재로 깨진 병과 칼이 어김없이 사용되는데, 뜬금없이 그림 한쪽에 아이스크림콘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리면서도 이런 돌발 소재와 독특한 색감을 통해 만화처럼 유머러스하게 그려냈습니다.

(왼)Soil(1983년) (오)Es Nada(1985년)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왼)Soil(1983년) (오)Es Nada(1985년)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

창문틀을 오브제로 활용한 것도 특징입니다. 위 두 그림 모두 나무 창틀을 액자처럼 활용했는데, 실제 80년대 당시 뉴욕의 폐건물에서 뗀 것이라고 합니다. 창문의 거친 질감과 깨지고 너덜너덜해진 유리를 그대로 살려, 당시의 뉴욕 모습이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데요. 지금과는 사뭇 다른 40년 전 뉴욕 맨해튼의 풍경을 이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만 같습니다.

위 오른쪽 그림 아래에는 'For Marion'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데요. 릭 프롤이 당시 여자친구인 Marion에게 이 작품을 선물했다가 거부당해, 릭 프롤이 지금도 소장하고 있다는 웃지 못할 뒷얘기도 있습니다.

(왼)Wild West(1982년) (오)Thief(1982년)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왼)Wild West(1982년) (오)Thief(1982년)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

위 두 그림에는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가 비교적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왼쪽 그림 <와일드 웨스트 Wild West>는 화살을 든 인디언과 총을 든 백인의 대결 구도를 그렸습니다. 검은 말과 흰 말의 대비도 눈에 띄죠.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화살과 총, 색감의 대비로 명쾌하게 표현했습니다. 오른쪽 그림 <도둑 Thief>에는 이젤과 기타를 보따리에 넣어 도망가는 도둑의 모습이 담겼는데, 예술가들이 다른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릭 프롤의 작품에는 가난과 양극화, 폭력과 전쟁, 비양심적인 사회 풍토에 대한 비판의식과 고발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림 속 세계는 기이하고 잔인하고 어두워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메시지는 비폭력과 평화, 화합은 아닐까요?

단숨에 시선을 뺏는 강렬한 그림 속 수수께끼 같은 의미, 다양한 해석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릭 프롤 개인전. 4월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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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그림 기괴한가요?…80년대 뉴욕의 ‘빨간맛’
    • 입력 2021-03-19 09:00:01
    취재K
방금 보신 그림(위) 어떠신가요? 물이 줄줄 흐르고, 창문은 죄다 깨져 있는 누추한 방. 물건들은 방 안을 떠다닙니다. 남성의 입에는 왜 칼이 꽂혀 있고, 어깨 위 시신은 뭘 의미하는 걸까요? 의문투성이인 이 그림의 첫인상은 "기괴하다", "어둡다", 두 번째 든 생각은 "방송 뉴스로는 안 되겠는데?" 였습니다. 마약에 취한 환각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는 전시 기획자의 설명을 듣고 나니 더 그랬죠.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작가 릭 프롤의 <세인트 에고니 Saint Agony(1983년)>입니다.

릭 프롤(Rick Prol)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
우리에겐 낯선 작가 릭 프롤(1958년~)은 1980년대 가난한 예술가들이 몰려든 미국 뉴욕 맨해튼 남동쪽 '이스트빌리지'에서 활동한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이스트빌리지 미술계라고 하면 장 미셸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 같은 작가들이 유명하죠. 바스키아의 오랜 친구이자 마지막 어시스턴트가 바로 릭 프롤입니다. 80년대 이스트빌리지 미술계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한 생존 작가이기도 합니다.

1980년대 뉴욕은 높은 실직률과 범죄율로 붕괴 직전의 황폐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이스트빌리지 쪽은 마약 소굴이었고, 폐허가 된 건물들이 많았습니다. 임대가 안 되자 건물주들이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스스로 건물에 불을 지르면서 항상 불길에 휩싸인 동네였죠. 릭 프롤은 이런 광경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앞서 보신 그림 <세인트 에고니>는 마약에 찌들고, 궁핍한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80년대 상황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1980년대 뉴욕의 어두운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릭 프롤의 작품 14점이 우리나라를 찾았습니다. 전시가 열리는 리안갤러리의 안혜령 대표는 "왜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만 유명한지 의문이었다. 릭 프롤은 최근 재조명되기 시작했다"며, 국내 첫 <릭 프롤 개인전>을 기획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기이한 회화의 대가로 알려진 릭 프롤의 작품 몇 점을 소개합니다.

S.O.S(1985년)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
캔버스의 가로, 세로 길이가 각각 4m, 3m에 이르는 이 대형 그림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암울하고 처참해 보입니다. 괴기스러운 표정의 한 여인이 잘린 머리를 들고, 파괴된 브루클린 다리가 있는 허드슨 강을 자전거로 건너고 있습니다. 냉전시대 핵 위협이 있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의 험난한 세상을 묘사했습니다. 전쟁의 불안감에서 벗어나고픈 여인의 절박함이 제목에서부터 느껴집니다.

(왼)Bandage(1982년) (오)Simple Art(1983년)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
분노와 폭력, 고통은 릭 프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감정입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한 소재로 깨진 병과 칼이 어김없이 사용되는데, 뜬금없이 그림 한쪽에 아이스크림콘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리면서도 이런 돌발 소재와 독특한 색감을 통해 만화처럼 유머러스하게 그려냈습니다.

(왼)Soil(1983년) (오)Es Nada(1985년)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
창문틀을 오브제로 활용한 것도 특징입니다. 위 두 그림 모두 나무 창틀을 액자처럼 활용했는데, 실제 80년대 당시 뉴욕의 폐건물에서 뗀 것이라고 합니다. 창문의 거친 질감과 깨지고 너덜너덜해진 유리를 그대로 살려, 당시의 뉴욕 모습이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데요. 지금과는 사뭇 다른 40년 전 뉴욕 맨해튼의 풍경을 이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만 같습니다.

위 오른쪽 그림 아래에는 'For Marion'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데요. 릭 프롤이 당시 여자친구인 Marion에게 이 작품을 선물했다가 거부당해, 릭 프롤이 지금도 소장하고 있다는 웃지 못할 뒷얘기도 있습니다.

(왼)Wild West(1982년) (오)Thief(1982년) [사진제공 : 리안갤러리]
위 두 그림에는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가 비교적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왼쪽 그림 <와일드 웨스트 Wild West>는 화살을 든 인디언과 총을 든 백인의 대결 구도를 그렸습니다. 검은 말과 흰 말의 대비도 눈에 띄죠.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화살과 총, 색감의 대비로 명쾌하게 표현했습니다. 오른쪽 그림 <도둑 Thief>에는 이젤과 기타를 보따리에 넣어 도망가는 도둑의 모습이 담겼는데, 예술가들이 다른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릭 프롤의 작품에는 가난과 양극화, 폭력과 전쟁, 비양심적인 사회 풍토에 대한 비판의식과 고발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림 속 세계는 기이하고 잔인하고 어두워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메시지는 비폭력과 평화, 화합은 아닐까요?

단숨에 시선을 뺏는 강렬한 그림 속 수수께끼 같은 의미, 다양한 해석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릭 프롤 개인전. 4월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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