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독일의 ‘나치 잔혹사’ 접근법, 그리고 일본

입력 2021.03.19 (09:00) 수정 2021.03.19 (13:43)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독일에게 있어 나치시대는 아픈 역사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 세계를 도탄에 빠뜨렸고 특히 유대인 600만 명을 희생시킨 과오는 아프다 못해 지우거나 감추고 싶은 역사일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자국 현대사에 '치욕'과도 같은 나치시대를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해 인정하고 사과하고 역사교육의 훌륭한 소재로 승화시킨다.

 나치군 최고사령부 벙커 지상 외관 나치군 최고사령부 벙커 지상 외관

■ 벙커의 재탄생…전시사령부를 역사교육장으로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45km를 가면 뷘스도르프라는 마을이 나온다. 쓰러진 집, 부서진 벽, 여기저기 흩어진 돌무더기. 폐허처럼 보이는 이 곳엔 2차대전 당시 나치 국방군과 육군의 최고사령부가 주둔해 있었다.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1939년 8월 26일 베를린에 있던 군 최고사령부가 수도 인근인 이 곳으로 이전했고,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6년에 걸친 2차대전의 시작이었다.

나치군 사령부는 지하 벙커에 주둔했다. 벙커 출입문은 700kg 이상의 강철로 만들었는데 외부엔 나무를 덧대서 별장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말 그대로 지하 요새가 펼쳐진다.

마이바흐 벙커와 체펠린 벙커. 전체 55ha에 이르는 2개의 벙커 구역은 수백 미터의 통로로 연결됐다.

육군 최고사령부가 위치한 마이바흐 벙커에서 출정 전략을 짜면, 통로로 연결된 통신사령부인 체펠린 벙커에서 이 명령을 유럽의 각 전선으로 내려보냈다. 당시 육군 최고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비롯해 나치군의 주요 지휘관과 참모들이 이 곳에서 전쟁 계획을 수립했다. 1941년 소련 침공 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도 여기서 만들어져 하달됐다.

벙커 통신장비벙커 통신장비

1939년 전쟁 초기 4,500여 명이었던 주둔 군인수는 전쟁이 끝날 무렵엔 8천여 명까지 증가했다. 벙커 안으로 화물차도 들어갈 수 있었고 작전 공간은 지하 3층, 18미터 깊이까지 구축됐다. 벙커를 지탱하는 벽의 두께는 1미터 이상으로 견고하게 만들어져 웬만한 폭격에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벙커 안에서 작전계획을 주고 받던 방식도 흥미롭다. 벙커가 워낙 방대하다보니 사람이 직접 서류를 들고 가는 대신 각종 정보나 검토해야 할 서류, 서명 받아야 할 서류들을 둥근 관에 넣은 뒤 압축 공기를 이용해 다른 방으로 전달했다.

국도도 우회시키고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통제해 '금지된 도시'라 불린 곳. 독일은 전쟁계획 생산지였던 이 지역의 흔적을 지우는 대신 남은 시설들을 정비해 안보 관광지로 변모시켰다.

사전 신청을 한 방문객은 앞서 설명한 벙커의 각 구역과 당시 사용됐던 통신장비 등 시설들을 관람할 수 있다. 한 해 2만여 명이 방문한다.

벙커 운영사 대표인 보르쉐르트 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는 이 시멘트가 평화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일을 다시는 하지 마라,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마라, 다시는 수많은 돈을 이런 허튼 곳에 쓰지 마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호소입니다."

좋은 역사는 아니지만 알아야 할 역사이기 때문에 벙커 투어를 운영한다는 설명이다.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시신 해부대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시신 해부대

■ 시신 해부·소각…'나치 잔혹사'도 교훈으로

나치의 잔혹한 역사는 강제수용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독일 중부 바이마르에서 10km 떨어진 숲 속에 세워진 부헨발트 수용소. 수감자 숙소구역만 40ha로 독일 내 최대 규모 강제수용소였다.

해부실에서는 수감자 시신의 장기를 적출하고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적출된 장기는 의대생들의 실습용으로 활용됐다. 생체실험이 끝난 시신은 소각장으로 옮겨졌는데 하루 4백 구의 시신이 잿더미로 변했다.

2차대전 동안 이 곳에 수감됐던 정치범과 유대인, 포로 등 28만 여 명 가운데 5만 6천여 명이 고문과 질병, 강제노역 등으로 숨졌다. 이 곳이 '시체 공장'으로 불리운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 피부로 만든 전등 갓, 벗겨낸 피부에 그린 외설적인 그림, 5분의 1 크기로 축소한 사람 머리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부헨발트 수용소는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학생 등 젊은 세대를 위한 역사교육이 연중 이뤄진다. 신체 해부대, 시신 소각장, 유골함, 철조망 등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역사를 배운다.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와 그의 논문 ‘태평양 전쟁에서의 성계약’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와 그의 논문 ‘태평양 전쟁에서의 성계약’

■ 질주하는 일본의 역사부정주의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위안부 왜곡 논문 발표 이후 최근 일본의 역사부정주의 또는 수정주의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위안부를 계약 관계로 설명하는 램지어 교수의 논지는 기존 역사부정주의자들 주장의 연장선상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문제는 민간 학계나 우익 뿐 아니라 일본 정부까지 나서 이런 역사부정주의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이다. 아베 정권은 2006년 1차 내각을 출범하면서부터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 재고를 천명했고 이후 역사수정주의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급기야 2016년 2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한 스기야마 신스케 외무성 외무심의관은 "강제연행은 없었다" "위안부 20만 명은 근거가 없다" "성노예가 아니다"라는 일본 극우세력의 이른바 '역사부정 3종 세트'를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위안부 강제연행이 진실로 정착된다면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본인은 앞으로 영원히 '범죄국가' '범죄민족'의 불명예를 떠안게 된다"라는 게 일본 극우세력의 주장이자 우려다. 이에 대해 일본의 양심적 철학자 노가와 모토카즈는 이렇게 묻는다. "국제사회가 (홀로코스트를 인정한) 독일을 영원한 '범죄국가'로 취급하고, 독일민족을 '범죄민족'으로 취급하려고 하고 있는가?"

독일은 오히려 홀로코스트의 부정(否定)을 범죄시하고 있고, 홀로코스트 인정에 의해 '국가존망이 달린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 일본은 그와 같은 위기에 처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일본 학자의 문제제기다.

나치의 대학살과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연행. 똑같이 2차대전 당시 자행된 전쟁·인권범죄지만 이를 처리하는 독일과 일본의 태도는 정반대다. 자국에 치욕적이고 잔혹한 역사지만 피하지 않고 반성하고 교훈으로 삼는 국가, 반면 객관적 증거마저 부정하고 왜곡하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국가. 어느 쪽에 미래가 있을까?

[방송 예고] '나치 벙커의 재탄생…상처 치료의 교육 현장으로'
(특파원보고 세계는 지금, KBS 1TV 3월 20일 밤 9시 40분)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글로벌 돋보기] 독일의 ‘나치 잔혹사’ 접근법, 그리고 일본
    • 입력 2021-03-19 09:00:04
    • 수정2021-03-19 13:43:27
    글로벌 돋보기

독일에게 있어 나치시대는 아픈 역사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 세계를 도탄에 빠뜨렸고 특히 유대인 600만 명을 희생시킨 과오는 아프다 못해 지우거나 감추고 싶은 역사일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자국 현대사에 '치욕'과도 같은 나치시대를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해 인정하고 사과하고 역사교육의 훌륭한 소재로 승화시킨다.

 나치군 최고사령부 벙커 지상 외관
■ 벙커의 재탄생…전시사령부를 역사교육장으로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45km를 가면 뷘스도르프라는 마을이 나온다. 쓰러진 집, 부서진 벽, 여기저기 흩어진 돌무더기. 폐허처럼 보이는 이 곳엔 2차대전 당시 나치 국방군과 육군의 최고사령부가 주둔해 있었다.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1939년 8월 26일 베를린에 있던 군 최고사령부가 수도 인근인 이 곳으로 이전했고,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6년에 걸친 2차대전의 시작이었다.

나치군 사령부는 지하 벙커에 주둔했다. 벙커 출입문은 700kg 이상의 강철로 만들었는데 외부엔 나무를 덧대서 별장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말 그대로 지하 요새가 펼쳐진다.

마이바흐 벙커와 체펠린 벙커. 전체 55ha에 이르는 2개의 벙커 구역은 수백 미터의 통로로 연결됐다.

육군 최고사령부가 위치한 마이바흐 벙커에서 출정 전략을 짜면, 통로로 연결된 통신사령부인 체펠린 벙커에서 이 명령을 유럽의 각 전선으로 내려보냈다. 당시 육군 최고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비롯해 나치군의 주요 지휘관과 참모들이 이 곳에서 전쟁 계획을 수립했다. 1941년 소련 침공 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도 여기서 만들어져 하달됐다.

벙커 통신장비
1939년 전쟁 초기 4,500여 명이었던 주둔 군인수는 전쟁이 끝날 무렵엔 8천여 명까지 증가했다. 벙커 안으로 화물차도 들어갈 수 있었고 작전 공간은 지하 3층, 18미터 깊이까지 구축됐다. 벙커를 지탱하는 벽의 두께는 1미터 이상으로 견고하게 만들어져 웬만한 폭격에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벙커 안에서 작전계획을 주고 받던 방식도 흥미롭다. 벙커가 워낙 방대하다보니 사람이 직접 서류를 들고 가는 대신 각종 정보나 검토해야 할 서류, 서명 받아야 할 서류들을 둥근 관에 넣은 뒤 압축 공기를 이용해 다른 방으로 전달했다.

국도도 우회시키고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통제해 '금지된 도시'라 불린 곳. 독일은 전쟁계획 생산지였던 이 지역의 흔적을 지우는 대신 남은 시설들을 정비해 안보 관광지로 변모시켰다.

사전 신청을 한 방문객은 앞서 설명한 벙커의 각 구역과 당시 사용됐던 통신장비 등 시설들을 관람할 수 있다. 한 해 2만여 명이 방문한다.

벙커 운영사 대표인 보르쉐르트 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는 이 시멘트가 평화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일을 다시는 하지 마라,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마라, 다시는 수많은 돈을 이런 허튼 곳에 쓰지 마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호소입니다."

좋은 역사는 아니지만 알아야 할 역사이기 때문에 벙커 투어를 운영한다는 설명이다.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시신 해부대
■ 시신 해부·소각…'나치 잔혹사'도 교훈으로

나치의 잔혹한 역사는 강제수용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독일 중부 바이마르에서 10km 떨어진 숲 속에 세워진 부헨발트 수용소. 수감자 숙소구역만 40ha로 독일 내 최대 규모 강제수용소였다.

해부실에서는 수감자 시신의 장기를 적출하고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적출된 장기는 의대생들의 실습용으로 활용됐다. 생체실험이 끝난 시신은 소각장으로 옮겨졌는데 하루 4백 구의 시신이 잿더미로 변했다.

2차대전 동안 이 곳에 수감됐던 정치범과 유대인, 포로 등 28만 여 명 가운데 5만 6천여 명이 고문과 질병, 강제노역 등으로 숨졌다. 이 곳이 '시체 공장'으로 불리운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 피부로 만든 전등 갓, 벗겨낸 피부에 그린 외설적인 그림, 5분의 1 크기로 축소한 사람 머리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부헨발트 수용소는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학생 등 젊은 세대를 위한 역사교육이 연중 이뤄진다. 신체 해부대, 시신 소각장, 유골함, 철조망 등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역사를 배운다.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와 그의 논문 ‘태평양 전쟁에서의 성계약’
■ 질주하는 일본의 역사부정주의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위안부 왜곡 논문 발표 이후 최근 일본의 역사부정주의 또는 수정주의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위안부를 계약 관계로 설명하는 램지어 교수의 논지는 기존 역사부정주의자들 주장의 연장선상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문제는 민간 학계나 우익 뿐 아니라 일본 정부까지 나서 이런 역사부정주의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이다. 아베 정권은 2006년 1차 내각을 출범하면서부터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 재고를 천명했고 이후 역사수정주의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급기야 2016년 2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한 스기야마 신스케 외무성 외무심의관은 "강제연행은 없었다" "위안부 20만 명은 근거가 없다" "성노예가 아니다"라는 일본 극우세력의 이른바 '역사부정 3종 세트'를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위안부 강제연행이 진실로 정착된다면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본인은 앞으로 영원히 '범죄국가' '범죄민족'의 불명예를 떠안게 된다"라는 게 일본 극우세력의 주장이자 우려다. 이에 대해 일본의 양심적 철학자 노가와 모토카즈는 이렇게 묻는다. "국제사회가 (홀로코스트를 인정한) 독일을 영원한 '범죄국가'로 취급하고, 독일민족을 '범죄민족'으로 취급하려고 하고 있는가?"

독일은 오히려 홀로코스트의 부정(否定)을 범죄시하고 있고, 홀로코스트 인정에 의해 '국가존망이 달린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 일본은 그와 같은 위기에 처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일본 학자의 문제제기다.

나치의 대학살과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연행. 똑같이 2차대전 당시 자행된 전쟁·인권범죄지만 이를 처리하는 독일과 일본의 태도는 정반대다. 자국에 치욕적이고 잔혹한 역사지만 피하지 않고 반성하고 교훈으로 삼는 국가, 반면 객관적 증거마저 부정하고 왜곡하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국가. 어느 쪽에 미래가 있을까?

[방송 예고] '나치 벙커의 재탄생…상처 치료의 교육 현장으로'
(특파원보고 세계는 지금, KBS 1TV 3월 20일 밤 9시 40분)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