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둔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승전 기념비

입력 2021.03.24 (09:0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북병사(北兵使)가 치계하였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0일 을축 두 번째 기사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을 물어 이순신을 가뒀다는 보고. 이순신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1587년이었으니 당시 이순신의 나이 마흔셋. 당시 이순신의 직책은 조산만호(造山萬戶)였습니다. 동시에 국토의 최북단 국경지대에 있는 녹둔도(鹿屯島)라는 섬의 농경지인 둔전(屯田)을 관리하는 임무까지 맡았죠. 지금으로 치면 최전방 육군부대 중대장쯤일 겁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이 기록은 이순신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순신이란 지휘관의 존재를 국가가 처음으로 '인지'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입니다. 중앙정부에 이름이 알려졌다는 사실이 갖는 무게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이순신을 모르는 한국인이 없지만, 당시 이순신은 이름 없는 하급 무관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렇다면 '패장' 이순신에게는 어떤 처분이 내려졌을까. 정확하게 6일 뒤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 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6일 신미 첫 번째 기사

잡아 올까요? 하고 물었더니 임금은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면서 곤장 몇 대 때리고 관직을 박탈한 뒤 백의종군하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이 기록 또한 이순신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임금이 녹둔도 전투를 패배로 못 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패전으로 규정했다면 이후에 이순신의 운명이 어찌 됐을까요. 게다가 5년 뒤에 조선을 불바다로 몰아넣은 참혹한 왜란을 생각하면 소름마저 돋습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는 법이라지만….

《북관유적도첩》에 실린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에 관한 글과 그림《북관유적도첩》에 실린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에 관한 글과 그림

이순신은 조선을 구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은 혹시 남아 있는 게 없을까?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이란 화첩입니다.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 즉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묘사한 그림 여덟 폭을 글과 함께 모아 묶은 책이죠.

이 책에 일곱 번째로 등장하는 그림이 바로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를 묘사한 겁니다. 위에 인용한 《실록》의 기록이 보여주듯, 임금은 녹둔도 전투를 패전으로 규정하지 않았죠. 더구나 두 차례 왜란을 거치면서 이순신은 국가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공식 추앙됩니다. 그래서 그림이 그려지고 남을 수 있었던 것이죠. 정부 주도로 그림이 그려졌다는 사실은 다시 말하면 후대에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가 '승전' 또는 그에 필적하는 업적으로 평가됐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수책거적’ 《북관유적도첩》, 조선 17~18세기, 41.2×31cm, 종이에 엷은 채색, 고려대학교 박물관‘수책거적’ 《북관유적도첩》, 조선 17~18세기, 41.2×31cm, 종이에 엷은 채색, 고려대학교 박물관

이 그림의 제목은 수책거적(守柵拒敵), 목책을 지키며 적을 막아냈다는 뜻입니다. 그림 옆에 간략한 해설이 붙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선조 정해년에 순찰사 정언신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조산만호 이순신에게 맡겼다. 가을이 와서 수확할 때가 되자 주변 오랑캐의 여러 족장과 내륙 깊은 곳의 물지개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추도에 군사를 숨겼다. 수비군이 얼마 되지 않아 약하고 농민들이 들판에 퍼져 일하자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먼저 기병으로 포위하고 목책을 따라 노략질을 했다. 이때 목책 안의 군사들이 모두 들에 나가고 머릿수가 얼마 되지 않아 곧 버티기 어려워졌다. 족장 마니응개가 참호를 뛰어넘어 목책 안으로 들어오려 하므로 목책 안에서 화살을 쏴 거꾸러뜨리니 적들이 패해 달아났다. 이순신이 목책을 열고 쫓아가 잡혀간 농민들을 구해 돌아왔다."

이 빛나는 승전을 기념하는 비석이 1762년(영조 38년)에 이순신 장군이 근무하던 곳에 세워집니다. 처음엔 주민들이 기념탑을 세우고 가까운 봉우리를 승전봉(勝戰峰)이라 불렀는데, 이순신의 5대손인 이관상(李觀祥, 1716~1770)이란 분이 관북절도사로 부임해 탑을 없애고 그 자리에 비를 세웠다고 하죠. 현재의 함경북도 나선시 조산리입니다. 북한 쪽 기록을 보면, 지금 남아 있는 비석은 1882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박래겸(朴來謙, 1780~?)이 북평사(北評事)로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체험한 일들을 적은 《북막일기 北幕日記》에 이순신 장군의 승전비를 직접 가서 봤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성문 밖에는 이충무공의 승전비가 있었다. 대개 충무공이 조산만호로서 일찍이 여기서 번호(蕃胡)를 깨뜨렸으므로 그 후손인 이관상(李觀祥)이 북병사로서 비를 세웠고 판서 조명정(趙明鼎)이 음기(陰記)를 지었다.

햐. 그 시절에 한양에서 북쪽으로 가장 먼 두만강 하구 끝까지 가서 이순신 장군의 승전비를 본 감회를 이렇게 짧게 쓰고 말았다니요. 물론 비석을 본 사람이 어디 박래겸뿐일 리는 없겠지만, 그나마도 직접 봤다는 기록은 정말 찾기가 어렵습니다. 워낙 변방 중의 변방이었으니까요. 어쨌든 귀중한 기록인 건 분명합니다.

(좌)이충무공 승전대 (우)이충무공 승전대비 비각(좌)이충무공 승전대 (우)이충무공 승전대비 비각

혹시나 해서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을 찾아보니 넉 점이 남아 있더군요. 왼쪽 사진은 조산리 석성 터에서 바라본 승전대(勝戰臺)입니다. 멀리 낮고 평평한 언덕이 보이죠. 기록에 남아 있는 승전봉(勝戰峯)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입니다. 오른쪽은 비석을 모신 건물입니다.

비석의 앞면과 뒷면비석의 앞면과 뒷면

비석의 앞면에는 승전대(勝戰臺) 세 글자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비석을 세운 내력 등을 자세히 소개한 글이 새겨져 있죠. 이렇게 비석 뒷면에 새긴 글을 음기(陰記)라고 하는데, 이 글은 위에 인용한 《북막일기》의 기록대로 당시 함경도 관찰사 조명정(趙明鼎)이 지었습니다. 비석 글씨와 원문과 해석은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https://portal.nrich.g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대목만 뽑아서 보겠습니다.

경흥(慶與) 녹보파호비(鹿堡破胡碑)

오호라, 이곳은 고 충무(忠武) 이공(李公) 순신(舜臣)이 변방 오랑캐를 물리친 곳이다. 만력(萬曆) 정해년(선조 20, 1587년)에 공께서 조산 만호 겸 녹보둔전관(造山萬戶兼鹿堡屯田官)으로 부임해왔다. 변방 오랑캐가 둔전(屯田)의 곡식이 익은 것을 보고 무리를 이끌고 와서 목책(木柵)을 에워싸고 병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공이 진(鎭)에 올라 북쪽으로 3리쯤에 있는 높은 봉우리에서 방어하며 적이 다니는 길목에 기병(奇兵)을 나누어 매복시켰다. 날이 저물어 적들이 돌아가는 것을 맞이하여 포를 쏘고 북을 치며 공격하니 죽고 다친 자가 매우 많으니, 적이 크게 두려워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후인이 그 봉우리를 승전대(勝戰臺)라고 이름하였다.

공의 충성(忠誠)은 해와 달을 꿰뚫으며 공렬(功烈)은 이정(彛鼎)에 새길 만하니, 작은 한 조각의 대(臺)는 공의 중요함을 나타내는 데는 부족하나 공이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적을 섬멸한 것은 소관(小官)부터 시작해서 조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공이 마침내 불세출의 공훈을 수립한 것은 실로 그 발단이 여기에 있는지라 사라져 없어지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의 5대손 관상(觀祥)이 이제 관북절도사(關北節度使)가 되어 천리 길을 편지를 보내 나에게 음기(陰記)를 써 줄 것을 요구하니, 오호라, 옛적에 이른바 물길은 차마 없어지게 놓아둘 수 없고 땅은 차마 황폐해지게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가의대부(嘉義大夫)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조명정(趙明鼎)이 기술하다. 임오년(영조 38, 1762년) 월 일에 세우다.

그렇다면 이 비석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그게 제일 궁금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면 최근 사진이라고 소개하는 것들이 더러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도 중요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다면 혹시 북한 매체가 직접 찍은 사진이나 영상은 없을까. KBS 영상 자료실을 샅샅이 뒤져봤더니 딱 하나가 나오더군요. 북한 조선중앙TV가 찍은 2015년 영상. 지금껏 본격적으로 소개된 일이 없는 이순신 승전비의 가장 최근 모습을 만나보실까요?


지난해 12월, 서울시가 북한, 러시아와 함께 '나선-녹둔도' 지역에서 이순신 장군 유적 발굴 조사에 본격적으로 나선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조사 지역은 이순신 장군이 녹둔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러시아 연해주 하산군과 북한 함경북도 나선 특별시 일대입니다. 지금은 남의 땅이 된 옛 녹둔도에서 의미 있는 발굴 성과가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녹둔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승전 기념비
    • 입력 2021-03-24 09:00:29
    취재K
북병사(北兵使)가 치계하였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0일 을축 두 번째 기사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을 물어 이순신을 가뒀다는 보고. 이순신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1587년이었으니 당시 이순신의 나이 마흔셋. 당시 이순신의 직책은 조산만호(造山萬戶)였습니다. 동시에 국토의 최북단 국경지대에 있는 녹둔도(鹿屯島)라는 섬의 농경지인 둔전(屯田)을 관리하는 임무까지 맡았죠. 지금으로 치면 최전방 육군부대 중대장쯤일 겁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이 기록은 이순신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순신이란 지휘관의 존재를 국가가 처음으로 '인지'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입니다. 중앙정부에 이름이 알려졌다는 사실이 갖는 무게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이순신을 모르는 한국인이 없지만, 당시 이순신은 이름 없는 하급 무관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렇다면 '패장' 이순신에게는 어떤 처분이 내려졌을까. 정확하게 6일 뒤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 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6일 신미 첫 번째 기사

잡아 올까요? 하고 물었더니 임금은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면서 곤장 몇 대 때리고 관직을 박탈한 뒤 백의종군하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이 기록 또한 이순신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임금이 녹둔도 전투를 패배로 못 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패전으로 규정했다면 이후에 이순신의 운명이 어찌 됐을까요. 게다가 5년 뒤에 조선을 불바다로 몰아넣은 참혹한 왜란을 생각하면 소름마저 돋습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는 법이라지만….

《북관유적도첩》에 실린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에 관한 글과 그림
이순신은 조선을 구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은 혹시 남아 있는 게 없을까?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이란 화첩입니다.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 즉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묘사한 그림 여덟 폭을 글과 함께 모아 묶은 책이죠.

이 책에 일곱 번째로 등장하는 그림이 바로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를 묘사한 겁니다. 위에 인용한 《실록》의 기록이 보여주듯, 임금은 녹둔도 전투를 패전으로 규정하지 않았죠. 더구나 두 차례 왜란을 거치면서 이순신은 국가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공식 추앙됩니다. 그래서 그림이 그려지고 남을 수 있었던 것이죠. 정부 주도로 그림이 그려졌다는 사실은 다시 말하면 후대에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가 '승전' 또는 그에 필적하는 업적으로 평가됐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수책거적’ 《북관유적도첩》, 조선 17~18세기, 41.2×31cm, 종이에 엷은 채색, 고려대학교 박물관
이 그림의 제목은 수책거적(守柵拒敵), 목책을 지키며 적을 막아냈다는 뜻입니다. 그림 옆에 간략한 해설이 붙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선조 정해년에 순찰사 정언신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조산만호 이순신에게 맡겼다. 가을이 와서 수확할 때가 되자 주변 오랑캐의 여러 족장과 내륙 깊은 곳의 물지개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추도에 군사를 숨겼다. 수비군이 얼마 되지 않아 약하고 농민들이 들판에 퍼져 일하자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먼저 기병으로 포위하고 목책을 따라 노략질을 했다. 이때 목책 안의 군사들이 모두 들에 나가고 머릿수가 얼마 되지 않아 곧 버티기 어려워졌다. 족장 마니응개가 참호를 뛰어넘어 목책 안으로 들어오려 하므로 목책 안에서 화살을 쏴 거꾸러뜨리니 적들이 패해 달아났다. 이순신이 목책을 열고 쫓아가 잡혀간 농민들을 구해 돌아왔다."

이 빛나는 승전을 기념하는 비석이 1762년(영조 38년)에 이순신 장군이 근무하던 곳에 세워집니다. 처음엔 주민들이 기념탑을 세우고 가까운 봉우리를 승전봉(勝戰峰)이라 불렀는데, 이순신의 5대손인 이관상(李觀祥, 1716~1770)이란 분이 관북절도사로 부임해 탑을 없애고 그 자리에 비를 세웠다고 하죠. 현재의 함경북도 나선시 조산리입니다. 북한 쪽 기록을 보면, 지금 남아 있는 비석은 1882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박래겸(朴來謙, 1780~?)이 북평사(北評事)로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체험한 일들을 적은 《북막일기 北幕日記》에 이순신 장군의 승전비를 직접 가서 봤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성문 밖에는 이충무공의 승전비가 있었다. 대개 충무공이 조산만호로서 일찍이 여기서 번호(蕃胡)를 깨뜨렸으므로 그 후손인 이관상(李觀祥)이 북병사로서 비를 세웠고 판서 조명정(趙明鼎)이 음기(陰記)를 지었다.

햐. 그 시절에 한양에서 북쪽으로 가장 먼 두만강 하구 끝까지 가서 이순신 장군의 승전비를 본 감회를 이렇게 짧게 쓰고 말았다니요. 물론 비석을 본 사람이 어디 박래겸뿐일 리는 없겠지만, 그나마도 직접 봤다는 기록은 정말 찾기가 어렵습니다. 워낙 변방 중의 변방이었으니까요. 어쨌든 귀중한 기록인 건 분명합니다.

(좌)이충무공 승전대 (우)이충무공 승전대비 비각
혹시나 해서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을 찾아보니 넉 점이 남아 있더군요. 왼쪽 사진은 조산리 석성 터에서 바라본 승전대(勝戰臺)입니다. 멀리 낮고 평평한 언덕이 보이죠. 기록에 남아 있는 승전봉(勝戰峯)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입니다. 오른쪽은 비석을 모신 건물입니다.

비석의 앞면과 뒷면
비석의 앞면에는 승전대(勝戰臺) 세 글자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비석을 세운 내력 등을 자세히 소개한 글이 새겨져 있죠. 이렇게 비석 뒷면에 새긴 글을 음기(陰記)라고 하는데, 이 글은 위에 인용한 《북막일기》의 기록대로 당시 함경도 관찰사 조명정(趙明鼎)이 지었습니다. 비석 글씨와 원문과 해석은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https://portal.nrich.g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대목만 뽑아서 보겠습니다.

경흥(慶與) 녹보파호비(鹿堡破胡碑)

오호라, 이곳은 고 충무(忠武) 이공(李公) 순신(舜臣)이 변방 오랑캐를 물리친 곳이다. 만력(萬曆) 정해년(선조 20, 1587년)에 공께서 조산 만호 겸 녹보둔전관(造山萬戶兼鹿堡屯田官)으로 부임해왔다. 변방 오랑캐가 둔전(屯田)의 곡식이 익은 것을 보고 무리를 이끌고 와서 목책(木柵)을 에워싸고 병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공이 진(鎭)에 올라 북쪽으로 3리쯤에 있는 높은 봉우리에서 방어하며 적이 다니는 길목에 기병(奇兵)을 나누어 매복시켰다. 날이 저물어 적들이 돌아가는 것을 맞이하여 포를 쏘고 북을 치며 공격하니 죽고 다친 자가 매우 많으니, 적이 크게 두려워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후인이 그 봉우리를 승전대(勝戰臺)라고 이름하였다.

공의 충성(忠誠)은 해와 달을 꿰뚫으며 공렬(功烈)은 이정(彛鼎)에 새길 만하니, 작은 한 조각의 대(臺)는 공의 중요함을 나타내는 데는 부족하나 공이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적을 섬멸한 것은 소관(小官)부터 시작해서 조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공이 마침내 불세출의 공훈을 수립한 것은 실로 그 발단이 여기에 있는지라 사라져 없어지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의 5대손 관상(觀祥)이 이제 관북절도사(關北節度使)가 되어 천리 길을 편지를 보내 나에게 음기(陰記)를 써 줄 것을 요구하니, 오호라, 옛적에 이른바 물길은 차마 없어지게 놓아둘 수 없고 땅은 차마 황폐해지게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가의대부(嘉義大夫)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조명정(趙明鼎)이 기술하다. 임오년(영조 38, 1762년) 월 일에 세우다.

그렇다면 이 비석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그게 제일 궁금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면 최근 사진이라고 소개하는 것들이 더러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도 중요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다면 혹시 북한 매체가 직접 찍은 사진이나 영상은 없을까. KBS 영상 자료실을 샅샅이 뒤져봤더니 딱 하나가 나오더군요. 북한 조선중앙TV가 찍은 2015년 영상. 지금껏 본격적으로 소개된 일이 없는 이순신 승전비의 가장 최근 모습을 만나보실까요?


지난해 12월, 서울시가 북한, 러시아와 함께 '나선-녹둔도' 지역에서 이순신 장군 유적 발굴 조사에 본격적으로 나선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조사 지역은 이순신 장군이 녹둔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러시아 연해주 하산군과 북한 함경북도 나선 특별시 일대입니다. 지금은 남의 땅이 된 옛 녹둔도에서 의미 있는 발굴 성과가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