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판사란? 재판이란?…‘사법농단’ 유죄 판결에 적힌 대답

입력 2021.03.24 (17:11) 수정 2021.03.24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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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사건은 관련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들에게 수많은 자기성찰적 질문을 던지도록 만듭니다. 법원 내에서 판사들이 벌인 다양한 행위를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피고인들의 행위가 죄가 되는지 따지는 과정에서, 재판부는 판사라는 직업의 본질, 재판의 공정성과 재판 독립의 가치에 대해 밀도있게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제(23일)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 연루자인 이민걸·이규진 전 판사에 대한 선고에서, 담당 재판부가 2년여 동안 고민해온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판사는 재판하는 사람…'지시받는 것'과 멀어져야"

재판부는 이민걸·이규진 전 판사가 법원행정처에서 일하는 심의관들에게 재판 개입성 지시를 한 것을 두고, 심의관들에게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이라며 직권남용죄를 인정했습니다.

심의관으로 보임된 판사들은 재판을 하지 않고 (재판업무를 지원하는) 사법'행정'을 담당하지만, 그럼에도 판사로서의 헌법·법령상 의무를 준수하며 일해야 하는데 피고인들의 부당한 지시로 이를 어기게 됐다는 설명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법관 독립을 규정한 헌법 제103조와, 비(非)재판업무 담당 판사들은 재판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정한 법원조직법 52조 1~2항, 판사는 외부 영향으로부터 사법권의 독립을 지켜 나가고, 다른 판사의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법관윤리강령 1조와 5조를 기준으로 삼아 직무를 집행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동안 피고인과 증인들은 "판사가 심의관으로 일할 때 그의 신분은 판사가 아닌 행정 담당 공무원이고, 이에 따라 심의관은 일반 공무원처럼 상급자에 대한 '복종 의무'를 진다"면서, 상급자의 부적절한 지시를 따르는 것은 '의무없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의무'였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행정업무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판사는 달라야 한다며, 판사직의 성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습니다.

"원래 판사의 근본 임무는 재판사무를 수행하는 것인데, 재판사무를 담당하는 판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설령 그가 배석판사라고 하더라도 같은 합의부 부장판사로부터 지시를 받아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헌법 제103조가 판사에게 독립하여 재판을 하도록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판사무를 담당하는 판사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는 것에 친해져서는 안 된다." (이민걸·이규진 사건 1심 판결문 중)


재판부는 이같은 특성을 토대로 볼 때, 판사를 심의관으로 일하게 하는 것은 "헌법 제103조가 정한 재판독립을 위협할 수 있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행정처 심의관이었던 판사도 나중엔 다시 재판 업무로 돌아가기 때문에 독립성이 중요한데, 사법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동안 상급자 지시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면서 해당 판사가 "누군가로부터 지시받는 것에 친해지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법원조직법이 "행정처 심의관을 판사 중 보할 수 있다"고 정해둔 것은, 일선 재판 사무를 행정처가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직접 재판업무를 경험해 본 인력이 필요할 수 있고 판사에게도 사법행정 사무 수행 경험이 향후 재판업무를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재판부는 덧붙였습니다.

■ "미숙하거나 나태한 판사의 재판상 잘못, 사법행정이 '지적' 가능"

이처럼 판사는 독립해서 재판을 하는 존재이지만, 그 재판 과정이나 결과가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라고 재판부는 밝혔습니다.

판사가 직업적으로 충분히 단련되지 못하거나 나태해서, 최근 접수된 사건 중 쉬운 사건 일부만 골라서 처리하다가 쟁점이 많고 복잡한 장기미제 사건들의 처리가 매우 늦어지는 경우 또는 법해석을 숙지하지 못하고 미숙한 재판을 하다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판사가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서는 '국민의 재판청구권'과 '재판의 헌법과 법률 기속성'이라는 중요한 가치와 '재판 독립'의 가치가 충돌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입법자는 그 방안으로 하급심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심급제도를 마련했고, 대법원장에게는 판사 근무성적·자질 평정권, 그리고 부적격자는 판사직을 유지할 수 없게 하는 연임심사권, 능력과 자질에 맞게 판사업무를 정할 수 있는 인사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제도들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며, "특정 사건 재판사무의 핵심영역(사실 인정, 인정사실에 대한 헌법·법령의 해석·적용, 이를 위한 모든 실체적 또는 절차적 판단 영역) 에 대한 지적 사무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일선 재판에서 장기미제 사건의 처리가 지연되는 상황이나 명백한 잘못이 있을 때,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이를 지적하는 사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재판부는 이같은 '재판 지적 권한'이 실제로 행사되지 않더라도, 판사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는 그 가능성만으로 미숙함·나태함에 대한 억지 효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재판부가 이처럼 사법행정권자의 '재판 지적 권한'을 긍정했기 때문에, 어제 이규진 전 판사도 여러 재판 개입 행위에 대해 직권남용죄 유죄 판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전 판사가 법원행정처·차장과 공모해 '재판 지적 권한'을 남용함으로써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판단입니다.

이는 이미 지난해 2월 선고된 또 다른 사법농단 사건 판결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재판 개입 혐의로 기소된 임성근 전 판사의 1심 재판부는 사법행정권자에게는 재판에 관여할 권한이 없고, 따라서 그들의 재판 개입은 '지위를 이용'한 행위일 수는 있어도 '직권을 남용'한 죄는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관여 권한'을 인정하는 것은 "법관의 재판권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통로"를 열어줘서 "헌법상 법관의 독립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도 했습니다.

이규진 전 판사 사건 재판부는 이같은 관점을 의식한 듯 "물론 재판 독립은 중요하다"면서도,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민의 재판청구권 보장, 재판의 헌법과 법률 기속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법조 일원화와 전문법원 제도 도입 등 판사 보임·법원 관련 제도의 변화로 "직업적으로 충분히 단련된 법조인"들이 재판을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과거 법·제도의 중요 부분이 유지되고 있어 '재판청구권 보장, 재판의 헌법·법률 기속성'과 '재판의 독립'의 충돌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현 제도하에서는, 미숙하거나 나태한 판사의 재판 행위로 인해 ' 법과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국민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우를 줄이기 위한 '재판 지적 권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재판엔 '구체적 타당성' 필수…제3자 영향 받으면 재판 아냐"

그렇다면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재판 지적 권한'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일까요?

재판부는 판결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법원은, 헌법 제103조가 정한 재판의 독립에 비추어 위와 같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가 할 수 있는 것은 위와 같은 현저한 지연이나 명백한 잘못의 지적에 그치고, 이를 벗어나 위 장기미제 사건들의 처리를 판사 인사 시기 등 특정 시점 이전까지 하라거나 명백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라고 하는 등 어떠한 권고를 하는 것은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가 할 수 없다고 본다." (이민걸·이규진 사건 1심 판결문 중)


즉 재판상 문제점에 대한 '지적'까지는 가능하지만, 더 나아가 해당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는 식으로 '방향을 권고'하는 것은 권한의 남용이라는 설명입니다.

재판부는 '인사권자'인 대법원장 등이 재판 방향에 대해 일정한 권고를 하게 된다면, 이는 판사가 눈치를 보게 함으로써 본인의 재판권 행사에 방해를 받거나 의무없는 일을 하게 되기에 충분하다고도 밝혔습니다.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가 그것(지적 권한)을 남용하여 일정한 권고에 해당하는 행위까지 한 경우, 상대방인 해당 재판사무 담당 판사는 […] 지적 권한의 원천이 된 연임심사권, 근무성적과 자질 평정권, 인사권까지도 염두에 두게 되기 마련이어서 그 판사가 위 권고를 제쳐두고 위 재판사무를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기 마련이다." (이민걸·이규진 사건 1심 판결문 중)

이어 판사가 재판업무에 있어 제3자가 마련한 방향이나 결론에 따라 판단한다면, 그 재판은 벌써 재판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재판이란 증거를 취사하여 신빙성 있는 증거를 기초로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여기에 법을 해석·적용하는 것인 만큼, 재판에 있어서는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정하고 확정된 사실관계에 맞는 결론을 내리는 것, 즉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중요한데, 해당 재판의 소송관계인과 담당 판사 이외의 제3자는 애당초 해당 재판의 증거를 접하기 어렵고 사실관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기에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내릴 기초 자체가 마련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기에 해당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 이외의 제3자가 마련한 방향에 따라 해당 재판의 판사가 결론을 내리는 것이나 아예 해당 재판의 판사가 제3자가 마련한 결론에 따르는 것은,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볼 수 없어 역시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민걸·이규진 사건 1심 판결문 중)

재판부는 또 "소송의 당사자 일방의 편에 서서 하는 재판은 벌써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다"면서 "재판의 독립"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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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판사란? 재판이란?…‘사법농단’ 유죄 판결에 적힌 대답
    • 입력 2021-03-24 17:11:11
    • 수정2021-03-24 19:19:41
    취재후·사건후

'사법농단' 사건은 관련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들에게 수많은 자기성찰적 질문을 던지도록 만듭니다. 법원 내에서 판사들이 벌인 다양한 행위를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피고인들의 행위가 죄가 되는지 따지는 과정에서, 재판부는 판사라는 직업의 본질, 재판의 공정성과 재판 독립의 가치에 대해 밀도있게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제(23일)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 연루자인 이민걸·이규진 전 판사에 대한 선고에서, 담당 재판부가 2년여 동안 고민해온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판사는 재판하는 사람…'지시받는 것'과 멀어져야"

재판부는 이민걸·이규진 전 판사가 법원행정처에서 일하는 심의관들에게 재판 개입성 지시를 한 것을 두고, 심의관들에게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이라며 직권남용죄를 인정했습니다.

심의관으로 보임된 판사들은 재판을 하지 않고 (재판업무를 지원하는) 사법'행정'을 담당하지만, 그럼에도 판사로서의 헌법·법령상 의무를 준수하며 일해야 하는데 피고인들의 부당한 지시로 이를 어기게 됐다는 설명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법관 독립을 규정한 헌법 제103조와, 비(非)재판업무 담당 판사들은 재판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정한 법원조직법 52조 1~2항, 판사는 외부 영향으로부터 사법권의 독립을 지켜 나가고, 다른 판사의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법관윤리강령 1조와 5조를 기준으로 삼아 직무를 집행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동안 피고인과 증인들은 "판사가 심의관으로 일할 때 그의 신분은 판사가 아닌 행정 담당 공무원이고, 이에 따라 심의관은 일반 공무원처럼 상급자에 대한 '복종 의무'를 진다"면서, 상급자의 부적절한 지시를 따르는 것은 '의무없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의무'였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행정업무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판사는 달라야 한다며, 판사직의 성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습니다.

"원래 판사의 근본 임무는 재판사무를 수행하는 것인데, 재판사무를 담당하는 판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설령 그가 배석판사라고 하더라도 같은 합의부 부장판사로부터 지시를 받아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헌법 제103조가 판사에게 독립하여 재판을 하도록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판사무를 담당하는 판사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는 것에 친해져서는 안 된다." (이민걸·이규진 사건 1심 판결문 중)


재판부는 이같은 특성을 토대로 볼 때, 판사를 심의관으로 일하게 하는 것은 "헌법 제103조가 정한 재판독립을 위협할 수 있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행정처 심의관이었던 판사도 나중엔 다시 재판 업무로 돌아가기 때문에 독립성이 중요한데, 사법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동안 상급자 지시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면서 해당 판사가 "누군가로부터 지시받는 것에 친해지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법원조직법이 "행정처 심의관을 판사 중 보할 수 있다"고 정해둔 것은, 일선 재판 사무를 행정처가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직접 재판업무를 경험해 본 인력이 필요할 수 있고 판사에게도 사법행정 사무 수행 경험이 향후 재판업무를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재판부는 덧붙였습니다.

■ "미숙하거나 나태한 판사의 재판상 잘못, 사법행정이 '지적' 가능"

이처럼 판사는 독립해서 재판을 하는 존재이지만, 그 재판 과정이나 결과가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라고 재판부는 밝혔습니다.

판사가 직업적으로 충분히 단련되지 못하거나 나태해서, 최근 접수된 사건 중 쉬운 사건 일부만 골라서 처리하다가 쟁점이 많고 복잡한 장기미제 사건들의 처리가 매우 늦어지는 경우 또는 법해석을 숙지하지 못하고 미숙한 재판을 하다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판사가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서는 '국민의 재판청구권'과 '재판의 헌법과 법률 기속성'이라는 중요한 가치와 '재판 독립'의 가치가 충돌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입법자는 그 방안으로 하급심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심급제도를 마련했고, 대법원장에게는 판사 근무성적·자질 평정권, 그리고 부적격자는 판사직을 유지할 수 없게 하는 연임심사권, 능력과 자질에 맞게 판사업무를 정할 수 있는 인사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제도들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며, "특정 사건 재판사무의 핵심영역(사실 인정, 인정사실에 대한 헌법·법령의 해석·적용, 이를 위한 모든 실체적 또는 절차적 판단 영역) 에 대한 지적 사무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일선 재판에서 장기미제 사건의 처리가 지연되는 상황이나 명백한 잘못이 있을 때,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이를 지적하는 사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재판부는 이같은 '재판 지적 권한'이 실제로 행사되지 않더라도, 판사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는 그 가능성만으로 미숙함·나태함에 대한 억지 효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재판부가 이처럼 사법행정권자의 '재판 지적 권한'을 긍정했기 때문에, 어제 이규진 전 판사도 여러 재판 개입 행위에 대해 직권남용죄 유죄 판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전 판사가 법원행정처·차장과 공모해 '재판 지적 권한'을 남용함으로써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판단입니다.

이는 이미 지난해 2월 선고된 또 다른 사법농단 사건 판결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재판 개입 혐의로 기소된 임성근 전 판사의 1심 재판부는 사법행정권자에게는 재판에 관여할 권한이 없고, 따라서 그들의 재판 개입은 '지위를 이용'한 행위일 수는 있어도 '직권을 남용'한 죄는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관여 권한'을 인정하는 것은 "법관의 재판권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통로"를 열어줘서 "헌법상 법관의 독립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도 했습니다.

이규진 전 판사 사건 재판부는 이같은 관점을 의식한 듯 "물론 재판 독립은 중요하다"면서도,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민의 재판청구권 보장, 재판의 헌법과 법률 기속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법조 일원화와 전문법원 제도 도입 등 판사 보임·법원 관련 제도의 변화로 "직업적으로 충분히 단련된 법조인"들이 재판을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과거 법·제도의 중요 부분이 유지되고 있어 '재판청구권 보장, 재판의 헌법·법률 기속성'과 '재판의 독립'의 충돌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현 제도하에서는, 미숙하거나 나태한 판사의 재판 행위로 인해 ' 법과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국민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우를 줄이기 위한 '재판 지적 권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재판엔 '구체적 타당성' 필수…제3자 영향 받으면 재판 아냐"

그렇다면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재판 지적 권한'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일까요?

재판부는 판결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법원은, 헌법 제103조가 정한 재판의 독립에 비추어 위와 같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가 할 수 있는 것은 위와 같은 현저한 지연이나 명백한 잘못의 지적에 그치고, 이를 벗어나 위 장기미제 사건들의 처리를 판사 인사 시기 등 특정 시점 이전까지 하라거나 명백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라고 하는 등 어떠한 권고를 하는 것은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가 할 수 없다고 본다." (이민걸·이규진 사건 1심 판결문 중)


즉 재판상 문제점에 대한 '지적'까지는 가능하지만, 더 나아가 해당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는 식으로 '방향을 권고'하는 것은 권한의 남용이라는 설명입니다.

재판부는 '인사권자'인 대법원장 등이 재판 방향에 대해 일정한 권고를 하게 된다면, 이는 판사가 눈치를 보게 함으로써 본인의 재판권 행사에 방해를 받거나 의무없는 일을 하게 되기에 충분하다고도 밝혔습니다.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가 그것(지적 권한)을 남용하여 일정한 권고에 해당하는 행위까지 한 경우, 상대방인 해당 재판사무 담당 판사는 […] 지적 권한의 원천이 된 연임심사권, 근무성적과 자질 평정권, 인사권까지도 염두에 두게 되기 마련이어서 그 판사가 위 권고를 제쳐두고 위 재판사무를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기 마련이다." (이민걸·이규진 사건 1심 판결문 중)

이어 판사가 재판업무에 있어 제3자가 마련한 방향이나 결론에 따라 판단한다면, 그 재판은 벌써 재판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재판이란 증거를 취사하여 신빙성 있는 증거를 기초로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여기에 법을 해석·적용하는 것인 만큼, 재판에 있어서는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정하고 확정된 사실관계에 맞는 결론을 내리는 것, 즉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중요한데, 해당 재판의 소송관계인과 담당 판사 이외의 제3자는 애당초 해당 재판의 증거를 접하기 어렵고 사실관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기에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내릴 기초 자체가 마련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기에 해당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 이외의 제3자가 마련한 방향에 따라 해당 재판의 판사가 결론을 내리는 것이나 아예 해당 재판의 판사가 제3자가 마련한 결론에 따르는 것은,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볼 수 없어 역시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민걸·이규진 사건 1심 판결문 중)

재판부는 또 "소송의 당사자 일방의 편에 서서 하는 재판은 벌써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다"면서 "재판의 독립"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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