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슥슥 고쳐쓴 한·소 수교일…​1990년 외교비화 공개

입력 2021.03.2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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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가 오늘(29일) 30년이 지난 외교문서 2,090권, 약 33만여 쪽을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외교부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1994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28차례에 걸쳐 3만여 권(약 424만 쪽)의 외교문서를 공개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외교사료관 홈페이지( http://diplomaticarchives.mofa.g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90년 6월 4일 진행된 첫 한소 정상회담.1990년 6월 4일 진행된 첫 한소 정상회담.

■ 북한 반발에 극비 추진된 첫 한소 정상회담

1990년 당시 노태우 정부는 '북방 정책'을 통해 소련 등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 정상화를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이때 외교문서를 보면, 한국 정부가 소련과의 수교에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말 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에 대해 북한은 그야말로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외교문서를 보면 김일성 주석은 1988년 평양을 방문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상에게 "소련이 한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면 모스크바주재 대사관 이외의 공식 사절단을 전원 철수할 것"이라며 위협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북한의 반발에 소련의 태도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포기하지 않고 막후 채널을 통해 소련 측에 거듭 정상회담과 관계 정상화를 제안했고, 마침내 소련은 5월 중순이 되어서야 '6월 4일' 워싱턴에서 회동하자고 동의했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해 한소 정상회담 관련 사항은 5월 31일 대외 공식발표 전까지 보안에 극도로 신경을 썼습니다. 한소 정상회담은 '태백산' 행사라고 불렸습니다.

소련 역시 "북한이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한국 측이 회담을 지나치게 홍보(play up)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당부했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한소 정상회담의 중요성을 감안해, 한소 정상회담을 의미하는 '태백산' 행사를 위해 '숭례문 행사'에 배정된 예산을 끌어와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숭례문 행사'는 역시 조심스레 추진되던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계획이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김일성 전 북한 주석  노태우 전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김일성 전 북한 주석

■ 마음 급했던 한국 정부, '주한미군 철수'도 언급

노태우 정부는 소련과 수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시 소련 측에 조건을 달아 "여건이 가능해진다면 주한미군 철수도 가능하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외교문서를 보면, 홍순영 당시 외무부 2차관보는 블라딜린 보로노쇼프 소련 극동 연구지 편집장과 1989년 4월 27일 면담에서 "한·소 수교 및 주변 4강 국의 교차승인과 국제적 보장이 확보된다면 주한미군 철수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해당 발언은 소련 측이 "한·소 수교 시 주한미군이 철수가 가능하냐"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한국이 당시 '북방외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련과의 수교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가필돼 날짜가 바뀐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국 간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 코뮤니케’ 현장에서 가필돼 날짜가 바뀐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국 간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 코뮤니케’

■ "늦출 필요 없다" 즉석에서 바뀐 한소 수교일

한국과 소련은 6월 4일 정상회담을 하고 넉 달도 안 된 그 해 9월 30일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양국은 당초 실무급에서는 1991년 1월 1일에 수교하기로 합의했는데, 외무장관 회담 당일 날짜를 바꿨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가필로 정정한 합의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회담 기록을 보면 최호중 외무부 장관은 "떳떳하고 올바른 일을 할 때는 그것을 주저하거나 늦출 필요가 없다. 우리가 처음 회담을 하는 날 바로 수교하게 되면 더욱 뜻깊은 것이 될 수 있다"며 공동성명서 발효일을 9월 30일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은 "보좌관들이 수교 일자를 1991년 1월 1일로 할 것을 건의하고 계속 주장하고 있으나 현실적, 법적으로는 오늘인 9월 30일 자로 수교한 것으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고 전향적인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즉석에서 뒤쪽에 배석 중인 실무자에게 '공동 코뮤니케'를 달라고 해 날짜를 정정했습니다.


■ "한미 관계 껄끄럽게 할 수도"…걸프전 지원 압박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선, 당시 걸프전을 도와달라는 미국의 압박도 확인됐습니다.

미국 주도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겨냥한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하기 한 달 전인 1990년 12월 17∼19일, 반기문 당시 외교부 미주국장은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미국 국방부 칼 포드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는 반 국장과 면담에서 한국군 의료진을 사우디 측에 파견하는 문제를 거론하면서 "한국 측이 사우디 측에 대해 계속 진전 상황을 점검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리처드 솔로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6·25 사변 시 미국의 도움을 받은 바 있는 한국이 미국을 어떻게 지원하고 있느냐는 미국 여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며 "GATT(상품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문제와 걸프 위기가 한미 관계를 껄끄럽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고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 국장은, 정부가 다국적군 지원으로 약속한 5천만 달러를 11월 추가 경정 예산을 통해 확보했고, 조만간 미국 측에 지급할 예정이라며 "능력의 범위 내에서 최대한 지원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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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 슥슥 고쳐쓴 한·소 수교일…​1990년 외교비화 공개
    • 입력 2021-03-29 14:38:21
    취재K

외교부가 오늘(29일) 30년이 지난 외교문서 2,090권, 약 33만여 쪽을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외교부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1994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28차례에 걸쳐 3만여 권(약 424만 쪽)의 외교문서를 공개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외교사료관 홈페이지( http://diplomaticarchives.mofa.g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90년 6월 4일 진행된 첫 한소 정상회담.
■ 북한 반발에 극비 추진된 첫 한소 정상회담

1990년 당시 노태우 정부는 '북방 정책'을 통해 소련 등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 정상화를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이때 외교문서를 보면, 한국 정부가 소련과의 수교에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말 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에 대해 북한은 그야말로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외교문서를 보면 김일성 주석은 1988년 평양을 방문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상에게 "소련이 한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면 모스크바주재 대사관 이외의 공식 사절단을 전원 철수할 것"이라며 위협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북한의 반발에 소련의 태도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포기하지 않고 막후 채널을 통해 소련 측에 거듭 정상회담과 관계 정상화를 제안했고, 마침내 소련은 5월 중순이 되어서야 '6월 4일' 워싱턴에서 회동하자고 동의했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해 한소 정상회담 관련 사항은 5월 31일 대외 공식발표 전까지 보안에 극도로 신경을 썼습니다. 한소 정상회담은 '태백산' 행사라고 불렸습니다.

소련 역시 "북한이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한국 측이 회담을 지나치게 홍보(play up)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당부했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한소 정상회담의 중요성을 감안해, 한소 정상회담을 의미하는 '태백산' 행사를 위해 '숭례문 행사'에 배정된 예산을 끌어와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숭례문 행사'는 역시 조심스레 추진되던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계획이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김일성 전 북한 주석
■ 마음 급했던 한국 정부, '주한미군 철수'도 언급

노태우 정부는 소련과 수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시 소련 측에 조건을 달아 "여건이 가능해진다면 주한미군 철수도 가능하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외교문서를 보면, 홍순영 당시 외무부 2차관보는 블라딜린 보로노쇼프 소련 극동 연구지 편집장과 1989년 4월 27일 면담에서 "한·소 수교 및 주변 4강 국의 교차승인과 국제적 보장이 확보된다면 주한미군 철수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해당 발언은 소련 측이 "한·소 수교 시 주한미군이 철수가 가능하냐"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한국이 당시 '북방외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련과의 수교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가필돼 날짜가 바뀐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국 간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 코뮤니케’
■ "늦출 필요 없다" 즉석에서 바뀐 한소 수교일

한국과 소련은 6월 4일 정상회담을 하고 넉 달도 안 된 그 해 9월 30일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양국은 당초 실무급에서는 1991년 1월 1일에 수교하기로 합의했는데, 외무장관 회담 당일 날짜를 바꿨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가필로 정정한 합의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회담 기록을 보면 최호중 외무부 장관은 "떳떳하고 올바른 일을 할 때는 그것을 주저하거나 늦출 필요가 없다. 우리가 처음 회담을 하는 날 바로 수교하게 되면 더욱 뜻깊은 것이 될 수 있다"며 공동성명서 발효일을 9월 30일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은 "보좌관들이 수교 일자를 1991년 1월 1일로 할 것을 건의하고 계속 주장하고 있으나 현실적, 법적으로는 오늘인 9월 30일 자로 수교한 것으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고 전향적인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즉석에서 뒤쪽에 배석 중인 실무자에게 '공동 코뮤니케'를 달라고 해 날짜를 정정했습니다.


■ "한미 관계 껄끄럽게 할 수도"…걸프전 지원 압박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선, 당시 걸프전을 도와달라는 미국의 압박도 확인됐습니다.

미국 주도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겨냥한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하기 한 달 전인 1990년 12월 17∼19일, 반기문 당시 외교부 미주국장은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미국 국방부 칼 포드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는 반 국장과 면담에서 한국군 의료진을 사우디 측에 파견하는 문제를 거론하면서 "한국 측이 사우디 측에 대해 계속 진전 상황을 점검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리처드 솔로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6·25 사변 시 미국의 도움을 받은 바 있는 한국이 미국을 어떻게 지원하고 있느냐는 미국 여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며 "GATT(상품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문제와 걸프 위기가 한미 관계를 껄끄럽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고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 국장은, 정부가 다국적군 지원으로 약속한 5천만 달러를 11월 추가 경정 예산을 통해 확보했고, 조만간 미국 측에 지급할 예정이라며 "능력의 범위 내에서 최대한 지원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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