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K] 4·3 잃어버린 땅…땅을 찾아낸 재판, 원동마을

입력 2021.03.29 (21:38) 수정 2021.03.2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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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4·3의 광풍은 인적 피해뿐 아니라, 막대한 재산 피해까지 입혔습니다.

당시 부모를 잃은 유족들은 집안 조상 땅이 있는지도 모른 채 힘든 삶을 살아오다가 누군가에게 빼앗기기도 했는데요,

KBS는 4·3 73주년을 맞아 희생자 유족들의 '잃어버린 땅'을 조명하는 기획 뉴스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첫 순서로 탐사K 취재팀 김가람 기자가 잃어버린 땅을 두고 빚어졌던 대규모 소송을 소개해드립니다.

[리포트]

제주경마공원 주변 수풀만 무성한 임야.

4·3 당시 잃어버린 마을인 원동마을 터입니다.

계엄령이 선포된 1948년 11월, 군인들이 들이닥쳐 주민 40여 명과 길 가던 사람 등 6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응필/4·3 당시 원동 거주자 : "소개령을 내렸는데 소개 안 갔다고 해서 다 붙들어서 다 이제 죽여버린 거죠. 학살해 버린 거죠."]

4·3 당시 원동마을에서 부모를 잃고 서울로 떠나 살던 강응필 씨가 제주에 돌아온 건 1983년.

강 씨 할아버지의 지분이 있던 공동목장이 마을 유지에게 넘어간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마을 유지가 공동목장에 조림사업을 한 뒤 농지위원들로부터 자신의 땅이라는 증언을 받아 내 소유권을 가져간 겁니다.

[이진화/강응필 씨 부인 : "나무를 심고서 세 사람이 그걸 나무 심은 걸 (소유권으로) 인정해주면 아마 거기를 이전할 수 있다. 그런 뭐가 있더라고요."]

가족의 땅이 이유도 모르게 남에게 넘어간 건 강 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지분을 돌려받았거나 포기한 경우를 제외한 원동마을 유족 19명은 1989년, 마을 유지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억울하게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며 원동마을 터에서 무혼굿도 가졌습니다.

[김창후/전 제주 4·3 연구소 소장 : "경찰들이 뒤에서 알게 모르게 탄압을 하고 유족들을 위협하기도 하고 이렇게 그때까지도 했었어요. 그런데도 굿을 하면서 결의를 보이기도 하고 했었는데."]

당시 재판 과정에선 이례적으로 현장 법정이 열리고 증인도 수십 명이 동원됐습니다.

결국, 확인 없이 보증서를 써줬다는 농지위원들의 증언이 나왔고, 마을 유지가 허위로 소유권 보존 등기를 했다는 재판부의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김경용/당시 소송 참여자 : "조상의 어떤 흔적을, 흔적을 찾은 느낌,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전혀 생각을 못 했습니다. 저희도. 그 땅이 있었다는 것도."]

대법원에서는 조림 사업을 통한 당시 유지의 일부 권리를 인정해주면서 돌려받은 땅이 다소 적어졌지만, 4·3으로 잃어버린 땅을 찾아낸 대규모 소송이었다는 데 의미가 컸습니다.

[김창후/전 제주4·3 연구소 소장 : "굉장히 큰 일이었어요. 분명 중산간 마을에서 그때 초토화되면서 잃어버린 마을이 되는 과정에서 옛날 조상들의 땅이었다는 걸 다 알고 있을 건데 이게 땅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에요."]

하지만 이 소송 이후, 4·3 유족들의 잃어버린 땅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려는 움직임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지금도 땅을 돌려받기 위해 힘든 싸움을 이어가는 또 다른 유족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탐사K입니다.

촬영기자:양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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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사K] 4·3 잃어버린 땅…땅을 찾아낸 재판, 원동마을
    • 입력 2021-03-29 21:38:44
    • 수정2021-03-29 22:01:19
    뉴스9(제주)
[앵커]

4·3의 광풍은 인적 피해뿐 아니라, 막대한 재산 피해까지 입혔습니다.

당시 부모를 잃은 유족들은 집안 조상 땅이 있는지도 모른 채 힘든 삶을 살아오다가 누군가에게 빼앗기기도 했는데요,

KBS는 4·3 73주년을 맞아 희생자 유족들의 '잃어버린 땅'을 조명하는 기획 뉴스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첫 순서로 탐사K 취재팀 김가람 기자가 잃어버린 땅을 두고 빚어졌던 대규모 소송을 소개해드립니다.

[리포트]

제주경마공원 주변 수풀만 무성한 임야.

4·3 당시 잃어버린 마을인 원동마을 터입니다.

계엄령이 선포된 1948년 11월, 군인들이 들이닥쳐 주민 40여 명과 길 가던 사람 등 6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응필/4·3 당시 원동 거주자 : "소개령을 내렸는데 소개 안 갔다고 해서 다 붙들어서 다 이제 죽여버린 거죠. 학살해 버린 거죠."]

4·3 당시 원동마을에서 부모를 잃고 서울로 떠나 살던 강응필 씨가 제주에 돌아온 건 1983년.

강 씨 할아버지의 지분이 있던 공동목장이 마을 유지에게 넘어간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마을 유지가 공동목장에 조림사업을 한 뒤 농지위원들로부터 자신의 땅이라는 증언을 받아 내 소유권을 가져간 겁니다.

[이진화/강응필 씨 부인 : "나무를 심고서 세 사람이 그걸 나무 심은 걸 (소유권으로) 인정해주면 아마 거기를 이전할 수 있다. 그런 뭐가 있더라고요."]

가족의 땅이 이유도 모르게 남에게 넘어간 건 강 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지분을 돌려받았거나 포기한 경우를 제외한 원동마을 유족 19명은 1989년, 마을 유지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억울하게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며 원동마을 터에서 무혼굿도 가졌습니다.

[김창후/전 제주 4·3 연구소 소장 : "경찰들이 뒤에서 알게 모르게 탄압을 하고 유족들을 위협하기도 하고 이렇게 그때까지도 했었어요. 그런데도 굿을 하면서 결의를 보이기도 하고 했었는데."]

당시 재판 과정에선 이례적으로 현장 법정이 열리고 증인도 수십 명이 동원됐습니다.

결국, 확인 없이 보증서를 써줬다는 농지위원들의 증언이 나왔고, 마을 유지가 허위로 소유권 보존 등기를 했다는 재판부의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김경용/당시 소송 참여자 : "조상의 어떤 흔적을, 흔적을 찾은 느낌,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전혀 생각을 못 했습니다. 저희도. 그 땅이 있었다는 것도."]

대법원에서는 조림 사업을 통한 당시 유지의 일부 권리를 인정해주면서 돌려받은 땅이 다소 적어졌지만, 4·3으로 잃어버린 땅을 찾아낸 대규모 소송이었다는 데 의미가 컸습니다.

[김창후/전 제주4·3 연구소 소장 : "굉장히 큰 일이었어요. 분명 중산간 마을에서 그때 초토화되면서 잃어버린 마을이 되는 과정에서 옛날 조상들의 땅이었다는 걸 다 알고 있을 건데 이게 땅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에요."]

하지만 이 소송 이후, 4·3 유족들의 잃어버린 땅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려는 움직임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지금도 땅을 돌려받기 위해 힘든 싸움을 이어가는 또 다른 유족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탐사K입니다.

촬영기자:양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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